98.
속이 상해 왈칵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저는…… 폐하께서 답을 찾아 주시길 바랐습니다.”
“…….”
“하지만 그러지 않으셨어요. 전 물을 수 없어, 혼자 해답을 찾아야 했습니다. 폐하께선 위치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셨지만 제게는 아니니까요.”
시몬은 플로라가 눈시울을 붉히자 적잖게 당황한 듯했다.
말문이 막힌 듯 그에게선 아무 말이 없었다.
대체 그의 감정은 무엇일까. 무엇이기에, 이렇게 사람을 뒤흔들어 놓는 것일까.
눈가가 촉촉해졌을 뿐인데 꾹꾹 내리누르고 있던 감정들이 흔들렸다. 폭발한 무언가가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제가 구한 답은 폐하께서 저를 소중한 사람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란 것이었습니다. 폐하께서는 자신의 사람에겐 늘 진심으로 대하신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플로라.”
“저는 그 이상으론 꿈꾸고 싶어도 꿈꿀 수 없는 위치니, 딱 거기까지밖에 생각할 수 없었어요. 폐하가 아무리 좋아도…….”
말을 그만 멈춰야 했다. 한데 목울대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듯했다.
나오지 말아야 할 말들이 단어가 되어 입 밖으로 쏟아져 내렸다.
“플로라. 방금 뭐라고…….”
그만하란 말이 머릿속에서 아우성쳤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지고 만 후였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며 눈이 크게 뜨였다.
차오르던 눈물도 어느새 쏙 들어가 버렸다.
시몬 역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으로 멀거니 서 있다가, 플로라가 주춤 뒤로 한 걸음 물러서자 정신을 차린 듯 손을 뻗었다.
“어디 가?”
플로라가 인사를 하는 것도 잊고, 도망치려는 것을 재빨리 잡아챈 시몬이 물었다.
“그…… 제가 해야 할 게 생각나서요.”
“갑자기?”
“……예. 갑자기.”
“말을 하다 말고? 내가 아무리 좋아도, 다음이 없어.”
짓궂다. 착 가라앉아 있던 시몬의 목소리가 어느새 한결 다정해졌고, 눈빛 또한 따뜻하게 느껴졌다.
플로라는 더 이상 그의 눈을 마주 볼 수 없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닫은 채 가만히 있자, 잡은 손목을 부드럽게 매만지던 시몬이 다시 말했다.
“그냥 쏙 내빼겠다는 거야? 시한폭탄을 던져 놓고.”
“제가 어떻게 감히 폐하께 폭탄을 던지겠어요…….”
플로라는 집요하게 시선을 맞추려는 시몬을 피해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 아예 고개를 숙여 버렸다.
귀까지 화끈화끈거렸다. 말해 버렸다. 꽁꽁 싸매 놓았고, 절대 제 마음을 드러낼 일 없다고 생각했는데. 상상으로도 해 본 적 없는 말이다.
어물쩍거리는 사이 그가 잡은 손목을 확 잡아당겼다. 그리곤 그녀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쿵쿵. 플로라의 심장만큼이나 거칠게 뛰어대고 있는 그의 심장 박동 소리가 선연하게 느껴졌다.
“이래도 폭탄이 아닌가?”
늘 생각해왔던 건 이런 게 아니었다. 마음을 드러내면 시몬은 멀어질 것 같았고, 자신에게 선을 그을 것 같았다.
시몬의 반응이 전혀 달라서 심장이 더 뛰었고, 머리가 하얗게 점멸했다 되돌아오길 반복했다. 호흡조차 가빠지는 듯했다.
“응? 플로라.”
시몬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만 폭 숙인 채 떨고 있는 플로라의 이름을 따뜻하게 불렀다.
고개를 들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뻣뻣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이대로 석상이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가 잡은 손이 저릿하게 느껴졌다.
다시금 애타게 이름을 불러주는 그의 목소리에 플로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다정한 그의 눈빛이 마음 깊숙이 스며든다.
“그동안 답을 주지 않으려 한 게 아니라, 네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렸어. 내 마음대로 굴면 멀리 도망가 버릴 것 같아 무서웠거든. 먼저 궁금해해 주길 바랐어. 그럼 난 이 마음을 못 이기는 척 다 쏟아내었을 거야.”
“…….”
“이제 못 이기는 척 다 쏟아낼게. 난 네가 좋다.”
시몬의 말들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오해했던 게 아니었어. 허무맹랑한 착각을 한 게 아니야.
시몬의 마음을 알게 되자, 가장 먼저 그런 생각이 들면서 그동안 마음고생 했던 것들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돌발 고백으로 잠잠해진 듯하던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
“미안해. 내가 겁쟁이라서. 누군가를 이성으로 좋아해 본 게 처음이라 좀 서툴러.”
마음이 벅차다는 게 이런 거구나. 금방이라도 펑 터져버릴 것만 같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눈가가 붉어진 채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듯 눈만 깜빡이고 있는 플로라를 향해 시몬이 손을 뻗었다.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는 손길 한 번에 온몸의 기력이 모두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플로라는 겨우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가 좋다.’
꿈만 같은 말이었다. 정말 꿈이면 어쩌지.
플로라는 감히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한동안 시몬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눈을 꾹 감았다 떠도 시몬이 있다.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이 좀체 믿기지 않았다.
“폐하, 이거 꿈 아니죠?”
“아니야.”
그가 웃으며 계속해서 눈가를 어루만져 주었다.
정말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냐. 꿈이 아닐 리가 없어요.”
마음이 계속 이랬다, 저랬다 흔들렸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현실이면 좋겠지만 역시나 꿈인 것 같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폐하는 칸나 영애와 약혼을…….”
“칸나랑 나?”
“네. 최근에 계속 붙어 다니셨잖아요. 두 분이 연인 사이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약혼하진 않았잖아.”
“아카데미 때부터 소문이 자자하셨다고 들었어요. 칸나 영애가 폐하의 정혼자라고. 건국제 때 공식적으로 발표하실 줄 알았어요.”
“하네칸에 그런 소문이 돌고 있는 건 알아. 우리 두 사람이 의도한 바이기도 했고…… 그나저나 아카데미 시절 얘기까지 들은 거야? 누구에게?”
“그게 중요해요?”
“아니. 중요한 건 따로 있지.”
플로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중요한 게 있다고?
“그래서 질투했어?”
눈을 깜빡이던 플로라가 시몬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서슴없이 그런 소릴 하는 시몬 덕분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무슨 그런.”
“서로의 마음도 힘들게 알았는데, 이제 와 숨기려고 하지 마. 난 아까 카신이 네 머리 이렇게, 이렇게 할 때 솔직히 화났어. 눈이 갑자기 뒤집히는 것 같았다고.”
시몬이 손을 뻗어 아까 카신이 했던 것처럼 플로라의 머리를 꾹꾹 쓰다듬어 주었다.
아까 화가 났었다는 걸 표현하듯 그리 부드러운 손길은 아니었다. 그건 그렇고, 시몬과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이 영 어색했다.
“그래도 덕분에 내가 이리 용감해졌으니 고마워해야 하나.”
플로라는 다시금 이게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제 볼을 세게 꼬집어 보았다.
“아…….”
곧은 미간이 구겨지고, 시몬의 눈이 동그래졌다.
“뭐 하는 거야?”
“정말 꿈이 아닌가 해서요.”
“볼이 붉어졌잖아. 하지 마.”
현실인 모양이다. 걱정하듯 자신의 뺨을 들여다보는 시몬을 내려다보던 플로라는, 이 벅찬 마음을 어쩌지 못하곤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가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어…… 플로라?”
그에 당황한 시몬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제 품에 날아 들어온 꽃이 너무 포근해서, 혹시나 바스러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 조조곤한 목소리가 귓가로 스며들었다.
“저도 마음이 이상했어요. 폐하가 칸나 영애를 만난다고 하실 때마다 심장이 아프고, 우울했어요. 이런 게 질투라면…… 저도 했던 것 같아요.”
그가 용기를 내어준 만큼, 자신 역시 솔직해져야 할 것 같았다.
이제 마음을 숨기고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 만으로도 지금까지 해오던 모든 걱정이 눈 녹듯 사라지는 듯했다.
이게 만약 꿈이라고 할지라도 지금은 행복을 즐기고 싶었다. 이렇게 마음이 벅찼던 적이 또 언제 있었던가.
처음으로 라비우에게 인정받았을 때? 그리 꿈꾸던 하네칸에 처음 왔을 때? 황제의 근위대가 되었을 때? 아니, 이건 그런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전혀 다른 벅참이었다.
플로라는 그를 잃을까 좀 더 세게 끌어안았다.
“이 정도로 날 좋아하는 줄은 몰랐어. 숨 막혀. 플로라.”
한참 말이 없던 시몬이 능청스레 대꾸하며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가 말을 하고 나서야, 플로라는 자신이 시몬을 너무 세게 끌어안고 있었음을 깨닫고 멀찍이 떨어졌다.
“죄, 죄송합니다.”
그래도 시몬의 표정은 밝았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얼굴에 사과하면서도 안심했다. 그때 시몬이 손을 뻗었다. 잡아달라는 것만 같았다.
“이제 그런 걸로 사과할 필요 없어. 손잡고 같이 좀 걷자. 이 길은 통제해서 아무도 없어.”
플로라는 조심스레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잡을 때까지도 ‘내가 감히 이 손을 잡아도 될까?’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잡고 나니 그런 건 중요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맞잡은 손에 온 머릿속이 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