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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97)화 (97/154)

97.

플로라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신이 그녀의 대답에 만족한 듯 씩 웃으며 먼저 자리를 떠났다.

플로라는 그나마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던 카신이 사라지자, 다시 안절부절못하며 고개를 떨궜다. 이제 가도 되는 걸까? 시몬에게서 한참 말이 없어 슬쩍 고개를 들었던 플로라는 그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표정은 어딘가 불편하고 불쾌해 보였다.

“……두 사람은 대체.”

시몬이 말을 하려다 말고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옹졸한 모습에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이전에도 한 번 플로라에게 마음을 내비치려 한 적 있었다.

이든과 카신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불편해진다고. 그때도 끝끝내 겁쟁이처럼 말을 마치지 못했다. 칸나가 왔다는 말에 도망치듯 말을 돌렸었지. 하지만 정말 불편했다.

마주할 때마다 가까워지는 듯한 두 사람의 모습이…… 그의 마음을 할퀴었다.

“보기 불편해.”

시몬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불편하다는 그의 말에 플로라도 일전에 시몬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시몬과의 대화는 사소한 것 하나도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생생했다.

“불편하게 해드렸다면 송구합니다. 폐하.”

플로라는 그때와 똑같은 대답을 내어놓았다. 감정은 더 깊어진 듯했지만 목소리의 어조는 좀 더 침착해져 있었다.

“이번에도 묻지 않는군.”

헛된 희망을 품지 말자. 플로라는 다시금 마음을 먹었다.

“그런 건 전혀 궁금하지 않아?”

“왜…… 그런 걸 물으시는 겁니까.”

이번에는 반사적으로 대답이 흘러나가고 말았다. 순간 아차 싶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플로라는 자신이 말해 놓고도 되려 놀란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내뱉은 말의 어조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웠는데, 심장은 실수로 제국의 비밀을 발설한 것마냥 세차게 요동쳤다. 시몬도 의외에 반문에 놀란 듯 눈을 치켜뜬 채였다.

그러나 플로라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그전에도 답은 알려주지 않았으니, 이번에는 대답을 듣고 싶었다.

매번 혼자 망상하고, 해답을 찾아야 하는 일은 어려우니까.

나름 잘 해결해 왔다고 생각해도, 시몬은 끊임없이 플로라의 선택들이 틀렸다고 질책하는 것 같았다.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플로라도 그러고 싶어서 매번 그런 답을 선택했던 것이 아니다.

“그건…….”

물어보길 종용해놓고, 그는 대답을 망설였다.

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는 듯 시몬의 미간이 설핏 구겨졌다가 풀어지길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플로라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플로라도 마찬가지로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이 공간에 단둘만 남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둘 사이의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것을 느낄 때쯤이었다.

“폐하! 저희가 좀…… 늦었….”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활기찬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시몬의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던 플로라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았다.

네이라와 이든이 함께 정원의 입구로 뛰어 들어오고 있었다.

“어? 플로라 경!”

“레이디!”

두 사람 역시 한껏 멋을 낸 듯 우아한 차림새였다. 플로라를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해 주는 그들에게 플로라 역시 마주 묵례했다.

그들의 쾌활한 목소리 덕분에 긴장감 넘치던 분위기가 어느새 와장창 깨졌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폐하를 만나러 오신 거예요?”

눈을 반짝이며 묻는 네이라를 향해 플로라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었지만 여전히 밝고 당차고 아름다웠다. 때 묻지 않은 맑고 투명한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자니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폐하. 네이라 님, 이든.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플로라는 이 파티의 인원이 전부 모였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빠져야 할 때라고 판단했다. 그녀의 정중한 인사에 시몬은 주춤거리다 결국 힘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어쩐지 속이 상했다.

이번엔 나름 용기를 내어 물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떤 대답을 듣고 싶었던 것도 아니면서 괜히 속만 상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동안, 스스로가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황제의 정원에 모인 사람들은 그들만의 세계에 갇힌 것 같았다.

자신도 평범하게 하네칸에서 살아왔다면 저 사이에 낄 수 있었을까.

아무 일 없이 리비에르의 수양딸로만 살았다면…… 지금 삶은 어땠을까.

기억을 되찾고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는데 머릿속에 그런 생각만 들었다.

화려하게 차려입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있는 고위층 귀족 가문의 영식들 틈에 자신이 설 자리는 없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다가왔기 때문일까.

플로라는 무심결에 제 옷을 내려다봤다.

단조로운 근위대 복장. 화려한 드레스를 언젠가 입어보긴 했지만, 그때도 제 것이 아님을 잘 알아서 어색하기만 했다. 자신의 뿌리가 하네칸이라 한들. 귀족 영애라 한들. 이미 너무 먼 길을 걸어온 것 같았다.

화려한 드레스만 입는다고 해서 저들 곁에 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을 지켜야만 할 뿐,

오랜 버릇처럼 현실을 상기하려는 질책이 오늘은 오랫동안 아팠다.

“플로라.”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플로라는 빠르게 뒤를 돌았다. 특유의 다정한 목소리는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시몬.”

어쩐지 그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었다. 오기였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단 둘뿐이니 시몬이 문제 삼지 않으리란 것도 알았다.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입 안이 달았다. 심장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리듯 요동쳤다.

어느새 시몬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플로라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넘실거리는 감정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오늘따라 유독. 더.

“표정이 안 좋아 보여 마음 쓰여서. 혹시 아까 내가 한 말 때문에 기분이 상한 건가?”

그렇게 받아들였다니. 그의 걱정에 플로라는 입술 안쪽을 세게 씹었다. 곧바로 알싸한 통증과 함께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넘칠 것처럼 찰박거리는 감정을 아픔으로라도 잊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의 세심함과 다정함, 그리고 따뜻함이 플로라의 마음을 점점 더 주체할 수 없게 했다. 커지는 걸 막을 수 없게끔 한다.

“요즘 일정이 바빠 피곤해서 그런 것뿐입니다. 기분 상하지 않았어요. 제게 마음 쓰지 마세요. 폐하.”

오랜 친구들, 그리고 연인과 함께하는 티 파티 도중, 일개 근위기사 한 명 때문에 따라 나올 황제가 세상천지에 또 어디 있을까.

이렇게 마음을 써 주니 그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벗어나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곁에서 이런 관심을 받고 그를 바라볼 수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해서.

잠시 물끄러미 플로라를 바라보던 시몬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저 네가 날 궁금해했으면 했어. 내가 어떤 말을 해도, 어떤 행동을 해도 그 의중을 궁금해하지 않는 것 같으니.”

“저는 폐하께 반문할 그런 위치가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하시는 말이 저를 생각해 주는 것이란 건 알고 있습니다. 불편하셨다면 이유가 있으시겠죠. 어떤 말이든 영광이라고 생각하…….”

“방금 그 말은.”

“…….”

“궁금한 것은 있지만 묻지 못했다는 건가? 반문할 위치가 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시몬의 목소리가 조금 바뀌었다. 무언가 억눌러 담았던 것을 터트리듯, 격양된 것 같았다.

“위치 따위 신경 쓰지 않아. 플로라. 그랬다면 네게 내 이름을 불러 달라고 하지도 않았겠지.”

“…….”

“네가 날 편하게 대해 주길 바라고, 궁금해해 주길 바라. 물어봐 주길 바라고 있어. 플로라, 네게는 무엇이든 대답해 줄 수 있어. 내가 이렇게까지 말해야 마음을 알아줄 텐가?”

마음이 울렁거렸다.

그가 이렇게까지 그 자신에 대해서 궁금해해 주길 바라는 저의를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어서 또 해답을 찾아야만 했다.

플로라는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정말 모르겠다. 시몬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끝이 없는 미로 속에 갇혀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스스로의 마음 하나 어쩌지 못해 완전히 망가진 인형이 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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