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95)화 (95/154)

95.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거니?”

“네?”

마법 수업을 마치고 나서는 리비에르와 짧게 티타임을 가졌다. 집중하느라 머리가 아팠는데, 따뜻한 티를 마시고 있으니 마음이 녹아내렸다. 긴장이 풀리면서 자연스레 머릿속에는 카신이 떠올랐다. 그가 이브니에 경의 일로 힘들어할 걸 알기에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표정이 좋지 않아.”

플로라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던 리비에르가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이던 플로라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하려다, 어쩐지 리비에르에게는 뭐든 숨기고 싶지 않단 생각이 들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카신 단장님께서 요새 많이 힘들어하시는 것 같아 생각 중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단장님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지…….”

“카신을 여전히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인가?”

리비에르가 재미있다는 듯 물어 플로라가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그런 것은 아니에요!”

“카신 공작과의 기억도 돌아왔겠지?”

“……네.”

“그에게도 말해야 할 텐데.”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오래전 기억일 뿐인데요. 단장님은 아마 다 잊으셨을 거예요.”

플로라의 소심해진 모습에 리비에르가 찻잔을 내려놓고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어렸을 때 카신과 플로라가 붙어 있는 걸 질투하고 못마땅해했던 적은 있지만, 지금까지 그런 감정을 내비치는 것은 역시 아버지답지 못하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리비에르는 근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카신 공작도 널 잊지 못하고 있을 거야.”

근데 왜 이리 말하는 와중에도 입술이 떨리는 건지.

“네가 사라지고 나서 카신이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몰라.”

어린 카신이 얼마나 울면서 이레나를 찾아 헤맸는지 리비에르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크면서 기억이 무뎌질 수는 있어도, 이레나를 잊지는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가요.”

플로라는 최대한 덤덤하게 대답하려 했지만, 어쩐지 카신이 자신을 잊지 않았다는 것에 기쁘기도 했다. 기억을 되찾았을 뿐인데, 전보다 카신이 가깝게 느껴지고 친밀한 감정이 생겨 버렸다. 자신이 이레나라는 걸 말하지 않고, 혼자 기억을 안고 있으려니 괜히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기도 했다.

리비에르는 플로라가 조금 안도한 듯한 얼굴을 한 것을 보고, 역시 괜히 말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물론 겉으로 티 내지는 않았지만, 그의 이야기로 더 이상 말을 걸지는 않기로 했다.

* * *

리비에르는 행동력이 남다른 편이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이곳까지 저를 직접 만나러 오시다니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계속해서 이 일을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으나 결국 발길은 카신의 앞으로 닿아 있었다. 이레나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카신은 기사들을 물리고, 리비에르에게 직접 차를 내어주었다.

리비에르가 진지한 얼굴을 하고 카신을 올려다보았다.

어린 나이에 가문을 물려받고, 참 독하게도 살아온 사람이다. 비록 하네칸을 떠나 있었으나, 시몬이나 카신에 대해서는 나름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꾸준히 소식을 전달받고 들여다보았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적도 없고, 여자관계도 난잡하지 않으며 능력 있고 강단 또한 있는 사람이었다.

리비에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반듯한 남자다. 약간의 흠이라도 있었으면 고민조차 하지 않았을 텐데.

“리비에르 님?”

뚫어져라 자신의 얼굴만 쳐다보는 리비에르의 모습에 카신은 괜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용기 내어 리비에르와 눈을 마주쳐도 피한다거나 무슨 말을 건네지도 않으니 먼저 피하게 되었다. 죄인이 된 느낌이 든다.

갑자기 찾아와서 말도 없이 자신을 평가하듯 바라보는 시선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레나가 돌아온다면 어떨 것 같나?”

이레나 베일리스.

리비에르의 갑작스러운 말에 카신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방금까지 느꼈던 감정을 모두 잊고, 눈을 크게 뜬 채 그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레나를 찾은 것일까?

아장아장 뛰어다니고 해맑게 웃던 은발 머리의 소녀가 눈앞에 그려졌다.

심장이 뛰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륵 났다.

“이레나를…… 찾으신 겁니까?”

머뭇거리던 카신의 물음에 리비에르는 그저 느긋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서 하네칸으로 되돌아오신 걸까?

카신은 그녀가 어디 있느냐고, 당장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마음을 다스렸다. 리비에르가 침묵하는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플로라가 이레나였어.”

“……네?”

“마력을 봉인하면서 기억도 함께 잃은 듯해. 최근에 다시 되찾았고.”

눈앞이 하얗게 점멸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뭐하러 공작에게 거짓말을 하겠나.”

리비에르가 이레나를 가지고 농담을 할 위인은 아니었다.

‘……플로라가, 이레나였다고?’

그녀를 처음 보고 느꼈던 것이 거짓이 아니었다니.

카신은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플로라를 찾아가고 싶었지만, 리비에르를 두고 그럴 순 없었기에 그저 이를 악물어 인내했다.

“플로라도 자신이 이레나라는 걸 알고 있다는 거죠?”

“그래.”

문득 얼마 전 플로라가 이브니에 경이 있는 치유실에 방문했던 일을 떠올렸다.

왠지 모르게 평소보다 자신을 더 걱정하고, 친근하게 대하던 태도가…… 기분 탓은 아니었나 보다.

“공작도 그동안 내게 말은 안 했어도 이레나를 그리워하고, 찾아다녔다는 거 알아. 그러니 말해주는 거고.”

“…….”

“예전처럼 이레나에게 잘 대해 줘.”

리비에르는 제 할 말을 마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단장실을 나섰다.

홀로 남은 카신은 심장이 두근거려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레나가 플로라였다니. 이레나와 닮았다고, 이레나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긴 했지만 막상 현실이 되고 나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디 하나 고장 나버린 기계가 된 것 같았다.

* * *

시몬과 칸나는 티타임을 가졌다. 플로라는 황제의 정원 앞을 지켜야만 했다. 이제 조금은 무뎌졌구나 생각하다가도, 불쑥 그가 자신을 안아 줄 때를 떠올리면 마음 한구석을 누군가 콕콕 찌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야 했다.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건 오히려 다행일지도 몰랐다.

교대 시간이 되어 다른 선배 기사가 도착했고, 플로라는 이제 숙소로 되돌아갈 시간이었다. 터덜터덜 힘없이 걸어가던 와중, 멀리 에르네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평소 입고 다니던 근위대 복장은 벗어 던진 채, 몸에 꼭 맞는 제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어디 무도회라도 가시나.

<교대했나?>

플로라가 정중하게 인사하자, 걸음을 멈춘 에르네가 물었다.

“네. 단장님은 어디 가시는 길이세요?”

<폐하께.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아…….”

<참, 잠깐 날 따라와.>

더 시킬 일이 있나 싶어, 플로라는 에르네의 명령에 군말 없이 그 뒤를 따랐다.

에르네는 옷이 불편한지 걷는 내내 자꾸만 옷깃을 만지작거렸다. 어쩐지 걷는 모양새도 좀 어색해 보였다.

티 가든의 입구에 근위대 선배들이 진을 치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방금 왔던 길을 되돌아 들어가려니, 어쩐지 반항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더 시키실 일이 있는 건가요?”

<폐하께서 네게 할 말이 있다고 하셨다. 전한다는 걸 깜빡했어.>

“하지만 폐하께서는 지금 칸나 영애와 함께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지금은 폐하의 소중한 시간에 제가 방해될지도…….”

<아카데미에서 함께한 친구들끼리 다 같이 모이는 자리야. 그리 소중한 시간이 아닐지도 모르고.>

“예?”

에르네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계속해서 걸었다. 플로라는 머뭇거리면서도 계속 그를 따랐다.

“대장!”

그때 발랄한 목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이제 막 교대 시간이라, 아까 플로라가 나설 때까지만 해도 없던 루가르가 티 가든 입구에 자리하고 있었다. 에르네는 슬쩍 루가르 쪽으로 시선만 돌렸을 뿐, 듣지 못한 체하며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아니,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걸음이 더 빨라진 것도 같았다.

“대장. 루가르 선배가 부르는데요.”

플로라는 어떻게든 단장님을 멈춰 세워야 할 것 같아 입을 열었다.

말하며 올려다본 에르네의 귀 끝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의 모습을 보니, 루가르가 부르는 걸 듣긴 했는데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부끄러운 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플로라는 루가르의 편이었다. 그녀의 생각은 다를 터였다. 플로라가 보기에도 지금 에르네의 모습은 멋있었으니, 그녀 역시 꼭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