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저는 완벽하게 제 감정이나 기분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건 오만이고, 착각이었죠. 정이란 게 붙어버리면 다 소용없더라고요.”
이브니에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은연중 믿고 있었기에 배신감은 더했다. 제 손으로 바로 죽이거나 혹은 감옥에 가둘 수 있었음에도 솔직해질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게 마음속에 그간 쌓아뒀던 정과 신뢰를 끊어낼 기회이자, 배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믿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건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이 그렇지 못했다. 순간의 감정을 참고 그녀를 성으로 데려와 감옥에 가뒀더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란 생각만 들었다.
누구의 위로도 와닿지 않을 것만 같았는데, 착각이었다.
어쩌면 위로란 것이 간절히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마음이 한결 나아.”
머뭇거리던 플로라가 까치발을 들어 손을 뻗었다. 이어 머리 위로 닿는 낯선 감촉에 카신의 눈이 크게 뜨였다.
“누군가 괜찮다고 말해주고, 이렇게 만져주면 생각보다 기분이 좋더라고요. 위로받는 것 같고, 응원받는 것 같고…….”
플로라가 제 키보다 큰 카신의 머리를 끙끙거리며 쓰다듬었다.
카신은 딱딱하게 굳은 채로 물끄러미 플로라를 보았다.
‘대장이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래서 걔가 싫었어요.’
‘싫어할 이유가 없다고요? 대장이 플로라 경을 그렇게 보니까. 사랑스러운 애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싫었다고요.’
순간 이브니에가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리고 심장에서부터 기묘한 열기가 피어올라 전신을 감싸기 시작했다.
카신이 마른 침을 삼키며 머리 위에 얹어진 플로라의 손을 잡았다.
쓰다듬는 손짓을 멈추려던 의도였는데, 보드라운 감촉이 손바닥에 맞닿자 어쩐지 심장이 더 간지러워지는 것 같았다. 카신은 애써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이런 건 됐어.”
“제가 너무 선을 넘었나요? 죄송합니다…….”
플로라는 아차 싶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티 내지 않기로 해놓고, 제 기억 속에 있는 어린 카신이 이리 훌쩍 자랐다는 것이 너무 반갑기도 하고 친밀하게 느껴져서 선을 넘어 버리고 말았다. 위로가 되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좋은 방법은 아니었던 것 같다.
“같이 좀 걸을까.”
플로라는 카신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고 그 뒤를 따랐다.
* * *
단장실에 돌아온 카신은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다가, 곧 보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잠깐 플로라와 이야기를 나눴던 것만으로도 기분이 환기되었다. 그녀와 있으면 이상하게 편했다. 오랜만에 받아본 위로라는 것에 어쩌면 제 편이 되어준 것만 같아 마음이 든든하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가주가 된 카신은 많은 짐을 홀로 지어야 했다. 자신이 무언가가 되지 않으면, 열심히 하지 않으면, 많은 고용인이나 남은 가족들이 손가락질받거나 고통받아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매일 가면을 썼다.
뭐든지 잘 해내는 척, 용감한 척, 힘들지 않은 척.
태어나기 전부터 가문을 위해 일한 집사와 어린아이일 때 자신을 돌봐주던 유모에게만 유일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는 그마저도 하지 못하게 됐다. 편한 사람한테라도 나약함을 보이면, 안에 웅크리고 있는 나약함이 점점 그 부피를 늘려갈 것 같았기 때문에.
기대고 털어놓는 것에 습관이 되면 그 사람들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단 막연한 두려움에 갇혔다. 자신의 운명은 왜 이리 기구해 세상 물정 모를 때부터 큰 짐을 짊어져야 하는지 한탄도 많이 했지만, 크면서 그것조차 무뎌졌다. 당연한 것이 되어 버렸다. 자신은 두려움도, 나약함도, 실수도 없는 완벽한 존재라고 생각하며 배우고, 이 악물고 살아왔다.
한데…….
‘판단력이 좀 흐려질 수도 있죠. 괜찮아요. 인간은 매 순간 완벽할 수 없는 존재잖아요.’
플로라의 말에 오랜 시간 단단하게 쌓고 다진 벽이 볼품없이 무너진 느낌이었다. 자신은 위로란 것이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 앞에선 마음 깊이 숨겨둔 나약함이 발가벗겨진 채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 같았다.
창피하거나 자존심 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위로받고 싶고, 제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신은 눈으로 의미 없이 보고서의 검은 글씨를 읽어내리다, 결국 깊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보고서에 집중할 수 없었다. 자꾸만 다른 생각들이 떠올랐다.
어느새 따뜻함까지 품어버린 그 눈빛 때문일까. 마음이 어지러웠다.
* * *
건국제 준비로 성에 있는 이들 모두가 매우 분주했다. 짧은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그동안 많은 것이 바뀌었다. 시몬은 늘 바빴으나, 요즘은 더욱 바빴다. 이브니에 경과 폴 경이 같은 독에 당해 쓰러졌다는 소문이 성 내에 돌았고 결국 귀족들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아직 시몬은 배후를 알면서도 밝히지 않고 모른 체했지만, 회의에서 나눠야 할 안건이 더 늘었으므로 시간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 바쁜 와중에도 시몬은 틈을 내어 칸나를 만났다. 시몬이 칸나와 함께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씁쓸하긴 했어도, 처음처럼 감정을 주체하기 어렵다거나 다독이는 것이 어렵진 않았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마음이 비워진 것인지, 무뎌진 것인지, 아니면 정리가 된 것인지는 몰라도 한결 편해졌다.
플로라 역시 바빴다. 마력을 다루는 연습도 해야 하고, 마법 수업도 들어야 하고, 근위대 역시 건국제에서 황제를 가까이서 보필해야 하는 중요한 임무가 있으므로 일정에 대해 듣고 한 명도 오차가 없도록 단체 훈련을 진행해야 했다.
“와…….”
플로라의 입가에 이리 환한 미소가 지어진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잘했어. 플로라.”
리비에르도 바빠져서 수업하는 시간이 줄고, 만나는 주기도 길어지긴 했지만 숙제를 내주면 내주는 대로 성실하게 임해서 그녀의 마법 능력은 날이 갈수록 출중해졌다.
처음에는 구체 모양의 빛의 형상을 내뿜던 것이 이제는 차츰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플로라가 만들고자 했던 건 나비의 모습이었다. 손바닥 위에서 팔락이며 날갯짓하는 빛을 바라보자 마음이 따스해지는 것 같았다.
“마력을 제어하는 건 할 만해?”
플로라는 다정한 리비에르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슬라임처럼 몸속에 구석구석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는 것 같은 마력들을 한데 모으라고 하셨지. 플로라는 끊임없이 노력했다. 눈앞이 핑 돌고 할 때마다 숨이 찼지만 오기로 버텼다. 지금은 그 끈덕지게 퍼졌던 마력이 동그랗게 한데 모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마법을 사용할 때도 한결 편했다.
“노력하고 있어요. 아직 다 된 것 같진 않지만요.”
“방금 만든 거 다시 한번 해보겠어? 좀 더 세밀하게.”
“……네!”
플로라는 어느새 손바닥 위로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던 마력을 없앴다가, 다시 한번 형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애썼다.
스멀스멀 연기처럼 피어오르던 빛이 이내 작은 나비의 형상을 만들었다.
플로라가 집중하자 날갯짓을 팔랑거리던 형상이 곧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
플로라가 자신의 마법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리비에르가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잘하고 있어. 플로라.”
“너무 예뻐요.”
리비에르는 플로라가 기특했다.
플로라는 모르겠지만, 리비에르는 수업을 할 때마다 점점 그녀의 마력을 제어하던 강도를 낮추는 중이었다. 다음번에 다시 만날 때쯤이면 제 마력을 제대로 운용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해 있을 듯했다.
온갖 업무를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요즘이지만, 그래도 마음이 조금은 달라졌다. 아직 어색하기는 해도 플로라를 생각하면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평범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좋았다. 항상 안고 살았던 마음의 짐이 사라진다. 이레나를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삶의 모든 것이 변한 것 같다.
플로라가 웃으며 리비에르를 올려다보았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어린 시절의 그 해맑은 이레나와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