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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93)화 (93/154)

93.

이브니에는 암묵적 범죄자에 속해, 방문자 목록을 꼭 작성해야만 했다. 이후 플로라는 치유 사제에게 안내를 받아 이브니에가 머무는 회복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카신의 모습이 보였다. 이브니에가 누워 있는 침대 앞에 앉아 서류를 읽고 있던 그는 플로라와 눈이 마주치자, 놀란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플로라. 여긴 어쩐…… 그러니까, 이게.”

횡설수설거리며 당황한 듯한 모습에 플로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브니에를 간호하는 걸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그런 것일까?

플로라에게 이브니에는 별로 달갑지 않은 사람이었다. 센칸과 내통하고 있었단 사실만 생각해도 그랬다. 그럼에도 어쨌든 오해를 할까 봐 걱정할 수 있겠다 싶긴 했지만, 카신이 굳이 자신의 눈치까지 볼 필요는 없었기에 그저 말을 듣지 못하는 척 설핏 미소를 지어 주었다.

“아까 성전 앞에서 이든을 만났어요. 여기 계신단 얘기 듣고 왔어요. 오랜만이에요. 카신 단장님.”

기억을 되찾은 이후 카신의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제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다.

그래서 반가웠고, 또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이 찡했다.

카신도 플로라에게 한때 소중했던 사람이었다.

“그동안 통 보이지 않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아…….”

“대답하기 곤란하다면 하지 않아도 돼. 근위대의 비밀유지는 필수니까.”

뉘앙스를 보니 카신은 아직 소식을 듣지 못한 듯했다. 플로라는 무어라 말해야 할지 고민하다, 그저 말을 아끼기로 했다. 이제 와 옛 추억을 들먹이며 사근하게 다가가기도 어려웠고 그에게는 자신이 어떤 기억으로 남았을지 모르니까. 잊어버렸을 수도 있고…….

플로라가 씁쓸하게 웃으며 눈을 굴렸다.

“이브니에 경은 좀 어떤가요?”

침대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이브니에의 모습을 바라보던 플로라가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훨씬 수척해져 있었고, 피부는 핏기가 없이 창백하기만 했다. 척 보기에도 상태가 몹시 나쁜 것 같았다.

“매일이 고비인 것 같아. 그래도 오래 버텼어.”

카신의 목소리에는 은은한 걱정이 묻어 있었다.

플로라는 침상 가까이 다가갔다. 카신도 쭈뼛거리며 한 발 다가섰다.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이 눈에 걸려 신경 쓰였다.

“제가 이브니에 경을 죽일 것처럼 보이시나요?”

“……응? 그게 무슨!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겠어?”

“안절부절못하시는 것 같아서요.”

“오해하지 마. 그냥 네가 올 거라고 생각 못 해서 당황한 것뿐이니까.”

“제가 이곳에 오면 안 되는 건가요?”

플로라가 가볍게 말했지만, 카신은 진지하게 받아쳤다.

“그게 아니라…… 센칸과 내통했고, 직접적으로 네게 해를 가하지 않았어도 너와 동료를 죽이려 했던 건 틀림없으니까. 그래서 이곳에 방문할 줄 몰랐어. 기사단에 있을 때도 너와 이브니에 경은 아무런 연고도 없었으니까.”

“그건 그랬죠.”

“…….”

“폴 경을 생각하면 화도 나고요. 근데 생각하면 할수록 좀 안타깝더라고요.”

플로라는 이브니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카신은 플로라가 다음 말을 해주길 기다릴 뿐이었다.

약간의 침묵이 흐르고, 플로라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쓸모가 없어지면 이리 아무렇지도 않게 버려지고, 목숨을 위협받는다는 게…….”

“…….”

“단장님은 이브니에 경이 걱정되시죠?”

“뭐. 그런 것보단 날 대신해서 다친 것이 찜찜해.”

카신이 어깨를 으쓱였다가 이내 픽, 짧은 웃음을 흘렸다.

“그 괴한이 날 노렸었거든. 이브니에 경이 먼저 발견했는지 공격을 막아섰고.”

플로라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소중한 사람들을 건드리겠다는 말이 적힌 쪽지가 여전히 뇌리에 남아 있었기에 분노가 더해질 수밖에 없었다.

플로라는 카신을 슬쩍 보았다.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해도 얼핏 그의 눈빛에서 이브니에를 향한 걱정이 읽혔다.

오랫동안 함께했던 부하였으니 걱정이 되는 것은 당연하겠지.

게다가 듣자 하니 센칸 출신의 첩자도 아니고, 그저 그들의 계략에 휘말려 내내 어쩔 수 없이 괴롭힘을 당했던 모양인데.

시몬이 했던 말대로, 그렇다고 해서 이브니에 경의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목숨을 잃는 것까지는 그녀의 인생이 너무 가혹할 것 같았다.

“저는 폐하와 같은 생각이에요. 단장님. 이브니에 경이 쾌차해서, 센칸의 세력을 몰아내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

“그 괴한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센칸의 사람인 것은 틀림없을 거예요. 그는 단장님이나 이브니에 경을 죽임으로써 첩자에 관한 일을 입막음하려 했던 것 같은데…… 실패한 거고요. 이제 더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들 거예요. 그들이 제게 그랬던 것처럼요.”

플로라는 조곤조곤 자신의 할 말을 이었다. 카신은 플로라를 바라보지도 못한 채, 그저 묵묵히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그러니 단장님께서 이브니에 경을 곁에서 잘 지켜주셔야 해요.”

그제야 고개를 든 카신이 플로라를 보았다.

“넌 이브니에 경이 밉지 않나?”

“왜요? 이브니에 경이 센칸과 내통하고 있어서요? 아니면 제 무기를 부러뜨려서요?”

“…….”

“양쪽 다 사적인 감정이에요. 제국을 위해서라면 이브니에 경이 눈을 뜨시는 게 낫습니다.”

“경은 공과 사를 잘 구분하는군. 난 그러지 못했어. 쭉 모른 체하며 성으로 데려왔다면, 폐하께서 제국의 법대로 처리하셨을진대. 감정조절이 잘 안 되더군.”

카신은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그때의 일이 생생하게 떠오른 탓이었다. 이브니에의 붉은 머리칼처럼, 날카로운 칼날을 타고 흐르던 이브니에의 피가 떠올랐다.

“저와 단장님의 경우는 다르니까요. 저도 제가 신뢰하던 사람이 배신했다고 생각한다면 참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 인간의 감정은 아주 민감한 거잖아요. 어떤 관계였느냐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니까…… 단장님을 이해합니다. 저는.”

아마 폴이나 사르트 경이 첩자였다면 플로라의 마음이 이렇게 평화롭진 않았을 거다. 지금 카신처럼 마음에 전쟁이 난 것처럼 어지럽고 복잡했겠지.

플로라는 애초에 이브니에 경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느끼면서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본인 역시 무관심으로 대응하면 되니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이브니에가 센칸과 내통했던 범인이란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좀 놀라긴 했지만, 분노가 들끓는다거나 배신감이 치밀지도 않았다.

하지만 카신은 다른 상황이었다. 내부에, 그것도 오랫동안 알아 온 부하가 첩자라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 평정심을 찾긴 어려웠을 거다.

“그런데 이브니에 경이 센칸과 내통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의심하셨나요?”

“파르베와 어떤 여기사가 대화를 나눈 것 같았다는 제보를 받았어. 그래서 그 뒤로 은밀히 백작령으로 파견 나갔던 여기사들의 행적을 좇기 시작했지.”

“……그렇군요.”

예상보다 심심하게 밝혀진 상황이라, 플로라는 그저 덤덤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눈앞에서 이브니에 경이 그 범인이란 사실을 확인했을 때,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더군.”

플로라가 이해하는 것처럼 카신은 괴로웠다.

그 감정을 입 밖으로 꺼내고 보니, 더더욱 증폭되는 것만 같았다.

흐트러진 붉은 머리칼, 흔들리던 동공,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 같은 거친 숨, 그러면서도 제게 괜찮냐고 묻던 떨리는 목소리가 생생했다.

자신이 평정심을 가지고 행동했더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자책하지 마세요. 단장님.”

“…….”

“꼭 이브니에 경이 이렇게 된 것이 단장님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서요.”

축 주저앉은 카신의 어깨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이것저것 위로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더해졌다. 자신의 팀원들을 의심하고 들여다보는 동안, 속은 천천히 무너져 내렸겠지. 믿던 사람들을 의심해야 하는 일들이 얼마나 힘든 건지,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판단력이 좀 흐려질 수도 있죠. 괜찮아요. 인간은 매 순간 완벽할 수 없는 존재잖아요.”

“…….”

“일어날 일이 앞당겨졌던 것뿐이에요. 이브니에 경이 센칸과 내통하는 것을 들켰다면 어떻게든, 언제든 일어났을 일이에요. 그들은 쓸모없어진 첩자를 살려두지 않으니까요.”

플로라의 위로에 카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작은 파동이 일었다. 작은 돌멩이가 던져진 느낌이었다.

카신은 플로라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어딘가를 끊임없이 방황하는 듯하던 저 차가운 눈동자가 가슴속에 스며들어왔을 때를 기억한다. 모든 것에 관심이라곤 조금도 없어 보이던 저 눈빛이 이제는 퍽 따뜻함을 품고 있었다.

죄책감과 분노, 실망, 두려움 등으로 요동치던 마음이 조금씩 안정되는 것 같았다.

“고맙군. 그렇게 말해줘서.”

카신 님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이 가장 큰 위로가 되었다는 걸, 그녀는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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