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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92)화 (92/154)

92.

머리도 멍하고 혼란스러웠지만, 적어도 리비에르를 보고 있는 동안에는 플로라 자신의 자아가 ‘이레나 베일리스’라는 것은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리비에르와 함께 보낸 시간은 비록 지금까지 살아온 삶보다 적은 시간이었지만, 그가 자신의 가족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가족.

자신에게는 해당하지 않을 줄 알았던 그 단어가 코앞으로 다가오자 마음이 울컥거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플로라. 너는 네 뿌리를 찾고 싶다는 생각해 본 적 없어?’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어요. 하지만 해야 할 일이 많아 미루다 보니, 자연스레 잊히더라고요.’

‘가족이 아직 남아 있을 수도 있잖아.’

‘글쎄요. 거기까지는 생각을 안 해봤네요. 살아 계신다고, 절 기억이나 할까요?’

언젠가 시몬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리비에르는 있잖아. 여전히 생사조차 모르는 자신의 수양딸을 찾으러 다니고 있어.’

그는 자신을 계속 기억해주고 있었건만…… 그렇지 않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대를 낳아준 분들이 살아 있다면 분명, 아직 그대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게 부모라는 거거든.’

가족이란 건 허황된 꿈이라고만 생각했을 뿐이다.

플로라가 차오르는 감정을 꾹 내리누르고 눈을 지그시 감자, 리비에르가 부드럽게 손을 잡아 왔다.

“머리가 아프진 않아?”

다정한 목소리는 플로라의 감정을 더더욱 극대화 시켰다.

막을 수 없는 눈물이 눈꺼풀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플로라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요.”

“한꺼번에 많은 것을 받아들이려니 몸이 버티기 힘들 수밖에. 조금 더 쉬어. 플로라.”

나긋한 말에 플로라는 천천히 눈을 뜨고, 리비에르를 바라보았다.

“곁에 있어 주실 건가요?”

“당연하지.”

그 말이 왜 이리 안심이 되는 건지.

플로라는 그의 말에 거짓말처럼 긴장을 풀고,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 * *

플로라가 다시 깨어났을 땐 리비에르뿐만 아니라, 시몬까지 방 안에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가장 보고 싶었던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을 보자 이보다 더한 행복은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플로라가 눈을 뜬 것을 먼저 확인한 것은 시몬이었다.

읽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급하게 다가오는 모습에 플로라가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플로라……!”

그녀가 무어라 말할 틈도 없이 자신의 품에 가둬 안은 시몬이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플로라는 그에게 폭 안긴 채로 두 눈만 크게 깜빡일 뿐이었다. 사냥대회에서도 이런 표정을 지으며…… 몸이 부서질 듯 꽉 안아주었지.

분명히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황제가 자신을 그저 충성스러운 ‘신하’로만 본다고 하더라도,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는 건 틀림없는 것 같아 다시 심장이 주제도 모르고 날뛰었다. 그건 지금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했다.

“흠흠.”

시몬이 플로라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하자, 곁에 있던 리비에르가 대놓고 헛기침을 하며 두 사람만의 공간이 아님을 상기시켰다. 플로라가 헛숨을 삼키며 살짝 시몬을 밀어내자, 그제야 시몬이 팔을 풀고 멀어졌다.

얼굴이 열이 오른다. 머리까지 김이 폴폴 나오는 것 같은 기분이야. 플로라가 한숨을 짧게 내쉬며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자, 리비에르가 곁에 앉으며 몸은 좀 괜찮냐고 물었다.

“아…… 네. 괜찮아요.”

전에 깨었을 때보다는 현실이 훨씬 피부로 와 닿았다. 머리로도 쉽게 그를 자신의 ‘가족’이라고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좋은 징조였다. 플로라가 리비에르를 바라보며 옅게 웃자, 그도 망설이는 듯하다가 손을 뻗어 플로라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언제 이렇게 자라서…….”

이번에는 플로라보다 리비에르가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가족. 가족이라는 것이 생겼다.

잠시 후 리비에르는 마법사들의 회의가 있어 자리를 비웠고, 시몬과 플로라 단둘이 방에 남게 되었다.

“플로라. 네게 전해줄 소식이 몇 가지 있어.”

“네.”

어색한 공기의 흐름을 깬 것은 시몬이었다. 무슨 말이든 좋으니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참이라, 플로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경청했다.

“백기사단 소속 이브니에 경을 기억하나?”

“……네. 몇 번 뵌 적 있어요. 백작령 마수 토벌대에 함께 하기도 했고요.”

이야기를 오래 나눠본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을 향한 눈초리가 그리 곱진 않았었다.

카신 단장님의 연인, 또는 일방적인 짝사랑 같은 느낌이었는데.

플로라는 잠시 이브니에의 얼굴을 떠올렸다가 다시 시몬을 바라보았다.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플로라를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잠시 당황한 듯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그녀가 첩자였어.”

“……네?”

“그동안 센칸에게 마법석을 넘기고 보수를 받았다고 하더군.”

“그게 정말입니까?”

플로라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정말 예상도 못 했던 사람이기에, 놀랄 법도 했다.

누가 범인이라 하더라도 놀랄 상황이긴 했지만, 이브니에는 백기사단의 ‘정예기사’인 걸……. 그녀가 첩자였다니.

“네 무기를 망가뜨리고, 첩자에게 사주를 받아 쪽지를 전달했다고 하던데. 이브니에가 벌인 짓인 것 같더군.”

플로라는 말문이 막혀 그저 눈만 동그랗게 뜬 채로 시몬의 말을 들었다.

이브니에보다는 가장 먼저 카신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브니에의 곁에 서 있던 카신의 얼굴은 그래도 굉장히 편해 보이고…… 신뢰하고 있는 듯했는데. 그래도 자신의 단장이었던 사람이라,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챙겨주고, 도와줬던 사람이니까. 그만큼 정도 많이 들었다.

“이브니에 경은 어떻게 되었나요?”

“마법석을 밀매하는 것을 카신이 직접 목격했다.”

“…….”

“카신이 성으로 데리고 오기도 전에 누군가에게 습격을 당했고, 공격을 대신 막아준 이브니에는 쓰러졌어. 백작령에서 다쳐 돌아온 폴 경처럼 위독한 상황이야.”

“습격을…… 당했다고요. 카신 단장님께서는 그자의 얼굴을 보았다고 하세요?”

“워낙 어두운 골목길이라 얼굴은 보지 못했다고 해. 이브니에가 깨어나서 모든 걸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어.”

플로라는 그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것일까.

“이브니에 경이 습격당할 것을 대비해 기사들을 배치했고, 경비를 강화했어. 무사히 치유받고 모든 사실을 들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이야.”

또다시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 * *

플로라가 방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은 깨어난 날로부터 이틀 후였다.

자신이 일주일가량 정신을 잃은 채였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기억은 되찾았고, 마력도 되찾은 듯했지만 그녀가 여전히 마법을 자유자재로 쓸 수는 없었다. 리비에르가 차차 가르쳐주겠다고는 하나, 그는 굉장히 바쁜 상태였다.

플로라도 자리를 비웠던 시간 동안 밀려 있던 일을 처리하고, 밀린 훈련을 익혀야 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 겨우 다시 한가해지기 시작했을 때쯤, 치유의 성전을 향했다.

“이든.”

“……아, 플로라 양?”

성전 입구에서 막 나온 이든의 모습이 그리 반가울 수가 없었다.

플로라가 반색하며 그를 부르자, 이든 역시 맑게 웃으며 플로라의 앞에 섰다.

“어디 가시는 길이십니까?”

이브니에 때문에 치유력을 많이 소모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듯, 그의 얼굴은 또다시 피로에 찌들어 있는 듯 보였다.

“폐하께서 부르셔서요.”

“……아, 그렇군요.”

시몬의 이야기가 나오자 어쩐지 표정 관리를 하기가 어렵다.

“플로라 양은 어쩐 일로…… 아! 설마 저를 보러 오신 건가요?”

진심으로 감동했다는 듯 우수에 찬 눈이라, 플로라는 이브니에를 보러왔다고 차마 말하지 못했다. 뭐 그리 생각하면 어떤가.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이든이 좋아하면 됐다.

“근데 어쩌죠? 얼른 가봐야 해서요. 이렇게 세상이 야속할 수가!”

이든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저는 괜찮으니 어서 가보세요.”

“이런 기회가 흔치 않을 텐데 말이에요! 혹시 제게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러 오신 것은 아니겠죠?”

“그런 거 아니에요. 이든.”

“……네. 그럼 저는 이만…… 아, 참. 방금 카신 님도 치유의 성전에 왔어요. 이브니에 경과 좋은 사이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카신 님이 있으니 내키시면 한 번 들러보세요.”

헛걸음하게 했다고 생각해 미안했는지, 이든은 어떻게든 성전에 볼일을 만들어주려는 듯 이브니에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차피 목적은 이브니에였는데, 카신까지 와 있다니 꼭 들러야겠다고 생각하며 고맙다고 답했다. 이든은 끝까지 아쉬운 듯 머뭇거리다 결국 길을 떠났고, 성전 앞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이든과 대화하는 것을 들었는지 제지 없이 플로라를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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