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장면이 또다시 전환되었을 때, 플로라는 비로소 이것이 꿈속이며 자신의 잊었던 기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낯설지만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보였다. 그를 보자 마음이 찡하게 아프고,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 또한 알았다.
처음엔 그가 이곳에 있는 것이 참 낯설다고 생각했는데 더듬어보니 익숙했다. 편안했다.
“……예쁘지?”
지금보다 훨씬 고운 미성의 목소리가 작은 아이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린다. 아이는 남자의 손바닥에 펼쳐진 작은 빛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하지 않는 아이가 그저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자신 역시 같은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끙끙거렸다. 그런 모습이 안쓰럽고 귀엽다는 듯 슬픈 눈을 한 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남자, 리비에르가 손을 뻗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데, 꼭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처럼 포근하다.
그는 알고 있었을까.
평생을 바쳐 찾아 헤맸던 그 수양딸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 * *
“어서 일어나, 플로라.”
익숙하고도 다디단 목소리가 꿀처럼 흘러내렸다. 뺨에 와닿는 손길에 플로라는 서서히 눈을 떴다. 몸은 개운했으나 머리는 깨질 것처럼 아팠다. 흐릿한 시선 사이로 시몬의 모습이 비쳤다. 걱정하는 듯한 얼굴은 마냥 꿈인 것만 같았다.
플로라는 저도 모르게 시몬을 향해 손을 뻗었다.
지그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시몬이 손을 마주 잡아 주었다.
‘따뜻해…….’
이것 역시 꿈이라면, 달콤한 꿈속에서 영원히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 * *
플로라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모조리 깨달았다.
왜 리비에르의 저택을 보고 그런 찜찜한 마음들이 들었는지, 또 지독한 악몽에 시달려야 했는지.
“안녕. 나는 리비에르야.”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봐주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왈칵 눈물을 쏟았다.
아이는 사실 외로웠다. 전장에서 돌아오지 못한 아빠가 그리웠다. 말도 어눌한 작은 아이일 때도, 앞으로 영영 아빠를 보지 못하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 태어날 때부터 보지 못했던 어머니의 오라버니란 자에게 거둬졌으나 그들은 플로라의 재산을 노린 것뿐, 그녀를 제대로 돌보지는 않았다. 시골에서 겨우 삶을 연명하고 있던 스벤타 남작은 수도로 올라와 플로라의 재산을 제 것인 양 떵떵거리고 쓰고 다녔으며 그녀는 골방에 틀어박혀 밖으론 나오지도 못하게 했다.
플로라는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웃음을 잃었고, 말을 잃었고, 생기를 잃었다.
그런 그녀를 다시 세상 밖으로 이끌어 낸 것은 리비에르였다.
자신을 향해 그리 따뜻한 미소를 지어주고, 손을 내밀어 주고, 포근하게 안아준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플로라는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리비에르의 딸이 되었다.
리비에르를 따른 이후로는 그녀의 인생에 행복이란 단어밖에 남지 않았다. 언어를 다시 배웠고, 알지 못했던 자신의 강한 마력에 대해 깨달아 배우기 시작했다. 리비에르는 팔불출이 아니라 정말, 플로라가 자신의 뒤를 이을 대마법사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로 마력이 흘러넘쳤으며 어린 나이에 시도해보지 못할 법한 마법을 플로라는 척척 해냈다.
플로라도 마법을 사랑했고, 그것에 흥미를 느꼈다.
창창한 그녀의 앞날에 먹구름이 드리운 것은 순식간이었다.
리비에르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성으로 출근했고, 홀로 남은 플로라는 자신을 살뜰히 돌봐주는 고용인들과 그녀를 호위하는 기사와 함께 산책을 떠났다.
아름다운 날이었다. 하늘은 푸르고, 잎사귀는 무척 싱그러운.
“타마! 저것 봐. 너무 예쁘지?”
플로라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광장을 좋아했다. 다른 영애들과 마찬가지로 반짝이는 것과 아름다운 드레스를 구경하는 걸 좋아했고, 또한 시즌마다 인기 메뉴가 바뀌는 광장의 음식들을 맛보는 것도 좋아했다.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오후였다. 한 사건을 제외하면.
“……아!”
“…….”
아이스크림을 들고 종종거리며 걷던 플로라와 ‘그’가 부딪친 건 불운한 운명의 시작이었다. 눈빛에서 묻어나는 오만하고 차가운 기운이 플로라를 순식간에 겁먹게 만들었다.
생김새만 봐서는 하네칸 제국의 사람은 아니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태양의 신이 돌본다는 오렐 왕국에서 온 것 같은 남자였다. 피부는 고동빛이었으나 눈동자는 그보다 연한 갈색으로 투명한 구슬처럼 보였다. 지금은 건국제가 열리고 있는 시기였으니 아마 그 귀빈 중 하나이리라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더더욱 위축되었다. 왠지 모를 위압감에 플로라는 저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았다.
“……죄송합니다.”
애초에 그와 부딪친 것은, 가판대에 내어놓은 반짝이는 왕관 모양의 브로치에 눈이 멀었던 플로라의 잘못이었다. 플로라도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정중하게 사과했다.
“다친 곳은 없습니까.”
남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생각해주는 듯하나 차가움이 서린 목소리였다.
남자의 투명한 눈빛에는 왠지 모를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플로라는 대답 대신 그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의 표정을 보고 순간 연민 같은 걸 느꼈던 것이 그녀 인생의 가장 큰 실수였을까…….
“……아, 저기!”
플로라가 괜찮다는 것을 확인한 남자는 망설임 없이 다시 제 갈 길을 향했다.
바닥에 떨어진 검은색 주머니를 발견한 것은 플로라였다.
지나다니는 인파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 주머니의 주인이 남자일 것이리라 확신했다. 뒤에서 자신을 뒤따르던 유모가 부르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플로라는 남자를 쫓아갔다. 남자가 걸음을 멈춘 것은 광장에 난 좁은 골목길에 들어선 뒤였다. 몇 걸음만 빠져나가면 사람이 바글바글한 광장인데도, 이 골목길은 꼭 마법으로 소음을 차단한 것마냥 조용했다. 그와 자신이 꼭 다른 세계에 들어온 것만 같은 착각이 일 정도였다.
“무슨 일이지?”
남자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날카롭게 말했다.
플로라가 쭈뼛거리다 검은색 주머니를 남자에게 내밀었다.
“이거, 이걸 떨어트리고 가서요.”
“……아.”
남자가 낚아채듯 주머니를 가져갔고, 플로라를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봤어?”
“아니요.”
고맙다는 말은 못해줄망정, 도둑으로 몰아가는 눈초리라니. 플로라가 순간 욱했다.
“나는 혹시라도 소중한 것일까 봐 돌려주려고 한 건데! 고맙다는 말이 우선이죠!”
입술을 삐죽이며 중얼거리자, 플로라를 빤히 내려다보던 남자가 한쪽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고맙다.”
그녀의 투정이 귀엽다는 듯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널 따르던 이들은 어딜 갔지?”
“광장으로 나가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길을 잃은 건 아니고?”
“아니에요!”
“이곳은 위험하니 얼른 돌아가.”
“그런데 오라버니는 왜 이곳에 있어요? 위험한데.”
뒷골목에 온갖 음침한 것들이 모여 있다는 것쯤은 어린 플로라라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유모가 광장에 난 골목길로 들어가면 절대 안 된다고 여러 번 이야기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뭐가 있는지는 잘 몰랐고, 그저 거대한 괴물이 살고 있다는 말만 들었기에 겁을 잔뜩 집어먹은 채였다.
플로라는 순간 유모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그리고 손가락 끝으로 빛을 뿜어냈다. 주변이 환해지면 괴물이 자신들을 습격하지 못하리란 생각 때문이었다.
“같이 나가요. 네?”
두리번거리던 플로라가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약간 얼이 빠진 얼굴로 플로라를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마법을 쓰는 모습에 놀란 듯했다. 넋이 나간 듯한 그의 표정이 어쩐지 웃겨서, 플로라는 히죽 웃었다.
타국에서 온 사람이라면, 그것도 마법이 없는 나라에서 온 손님이라면 이런 걸 당연히 신기하게 생각할 것이다. 플로라는 따뜻한 리비에르의 마법을 보고 마음이 열렸듯, 이 석상처럼 얼어붙은 듯한 오라버니 역시 눈동자 속에 담긴 고요한 분노와 외로움 같은 건 비워내고 마음을 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너, 이름이 뭐야?”
“……이레나.”
“예쁜 이름이네. 이레나 영애.”
“오라버니는요?”
“나는 라비우라고 한다.”
그것이 이레나, 아니, 플로라의 비극이 시작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