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카신의 머리는 이성적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감정적으로 대해봤자 자신의 마음만 나약해질 뿐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브니에 역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대답하길 바랐다. 지금 상황에서 용서해 달라, 믿어달란 말은 필요 없었다.
“나도 벗어나려고 노력했어요. 하지만…… 무서웠어요. 대장. 죄송해요.”
“더 할 말은 없나? 경의 죄에 대해서.”
“……더 이상은 없어요.”
카신이 미간을 좁혔다.
“방금도 마법석을 거래한 건가?”
이브니에는 체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령 마수 토벌 임무 당시 플로라에게 협박 메시지를 보낸 것도 경인가? 그녀의 무기에 손을 대고.”
“…….”
“경이 한 일이냐고 물었어.”
이브니에가 잠시 입술을 질끈 물었다.
“마법석을 거래하러 잠입했던 첩자가 이야기해줬어요. 그는 플로라가 센칸에서 도망쳐 나온 배신자라고 했죠. 그래서 죽여야 한다고 했어요.”
“직접 죽이려 했어?”
이브니에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플로라를 싫어하긴 했지만, 제가 어떻게 죽여요? 쪽지만 몰래 전달해달라고 했어요. 무슨 내용인지는 읽지도 않았어요. 딱 그것밖에 하지 않았어요, 저는!”
무자비한 파르베가 자신의 기사단에 해를 끼칠까 두려웠다. 센칸의 첩자가 백기사단에 소속되어 있다니, 이브니에는 동료들을 위해서라도 또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녀를 내쫓고 싶었다. 또 다른 이유로도 플로라가 싫었다. 제 나라로 잡혀 돌아가거나 또는 그들의 손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플로라를 왜 싫어했어? 활은 왜…….”
카신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찡그린 채 물었다.
그 말에 이브니에가 이를 악물고 카신을 올려다보았다.
“플로라는 네가 말한 대로 센칸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이야. 첩자가 아니라고. 쫓기며 사는 약자를 보호해주지는 못할망정, 다 알면서도…… 경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하지? 첩자가 아니라면 그 애가 싫을 이유는 없잖아.”
“그건 대장의 생각이고요.”
“……뭐?”
“대장이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래서 걔가 싫었어요.”
“…….”
“대장이 준 활이 눈에 보여서 부러뜨렸고요.”
이브니에는 이렇게까지 말해야 하는 게 순간 자존심 상했다.
말하고 보니 자신이 얼마나 유치한 질투를 하고 있었는지 실감이 나서 더 그랬다.
속으로 생각할 때는 얼마나 유치하든, 본인만 아는 마음이니 끊임없이 자기 합리화를 할 수 있었는데 입 밖으로 꺼내고 보니 참 초라하고 별 볼 일 없었다.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유치한지, 초라한지, 별 볼 일 없는지 깨닫고 나니 자존심이 상해 참을 수가 없었다. 마법석을 밀거래하다 걸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 사실보다 그게 더 수치스러웠다.
“싫어할 이유가 없다고요? 대장이 플로라 경을 그렇게 보니까. 사랑스러운 애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싫었다고요.”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이브니에는 다 털어버리기로 결심했다.
대장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구구절절 호소하는 자신의 감정 따위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 멈추지 않았다.
카신은 분명 플로라가 기사단 시험을 보고, 입단할 때부터 그녀에게 흥미를 느꼈을 것이다. 임무에서 돌아와 신입들을 보고, 카신이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을 보았을 때부터 불안감이 싹텄다. 그가 어떤 부드러운 표정을 짓는지 알았기에.
그건 부하를 보는 눈이 아니라, 이성을 보는 눈이었다.
“센칸에서 온 첩자라는 걸 알았을 때는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최대한 또박또박 말하려 했지만 발음이 뭉개졌다.
눈물이 났다. 이렇게 자신의 유치하고 치졸한 마음을 말하는 이 상황이 속상했다.
대장은 이미 이런 마음을 알고 있었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드러내고 싶진 않았는데.
“내가 직접 죽일 수는 없지만, 쫓아낼 수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방식으로요.”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를 그렇게 쉽게…… 이브니에 경. 고작 이런 사람이었나? 그렇다면 내가 사람을 한참 잘못 봤군.”
“모르겠네요. 원래 그런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변한 건지.”
“플로라 경이 기사단 안에 센칸의 첩자가 있다고, 내게 말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네. 신분을 속이고 몰래 들어온 줄 알았으니까요. 저와 마법석을 거래한 첩자가 신분을 위장해 병사로 마수 토벌에 참여하게 된 것처럼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타국의 첩자가 황실 기사단에 입단하겠어요?”
“어리석어. 넌 애초에 플로라 경을 동료로, 부하로 생각하지 않았군.”
한 번 밑바닥을 보이고 나니 그다음은 인정하기가 쉬웠다.
이브니에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지어졌다.
“맞아요.”
플로라를 질투했던 게 맞다.
카신의 시선을 끄는 그녀의 외모, 그리고 실력까지. 어느 하나 부럽지 않은 게 없었다.
이브니에는 남들에게 손가락질받지 않기 위해 매 순간 스스로를 꾸몄고, 밤잠을 줄여가며 훈련했다. 여자라서 부족하니 남들보다 더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듣기 싫어 숨어 연습하던 때도 많았다. 그런데 플로라는 이브니에가 가지고 싶은 건 다 가지고 있는 듯해서 싫었다.
“그 애를 질투했어요.”
카신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보니 대장은 이미 알고 계셨네요. 플로라가 센칸 출신의 첩자라는 걸.”
“…….”
“알고도 그걸 가만히 두신 거예요. 우리 기밀을 빼 갈지도 모르는 적국의 사람을.”
“그래. 알고 있었지. 처음엔 신분을 숨겼다지만, 결국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모든 것을 밝혔어. 의심받을 걸 알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지. 폐하께 충성을 맹세한 이후로 한 번도 우릴 배신하거나 배신하려 하지 않았고. 그래도 문제가 있나? 나는 먼저 솔직하게 모든 걸 밝히고, 하네칸에 충성을 맹세한 플로라가 경보다 낫다고 생각하는데.”
냉기 섞인 목소리에 이브니에는 이를 앙다물었다.
이 상황에도 이런 생각이 드는 자신이 참 우스웠지만, 플로라를 감싸는 카신이 미웠다.
대장이 그럴수록…… 그 애가 밉다고요.
차마 하지 못한 말이 가슴 속에 응어리로 남았다.
이브니에의 눈시울이 붉어지자, 카신이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가 말을 이었다.
“적국의 첩자와 손을 잡고 마법석을 밀매한 것으로도 모자라, 동료 기사까지 괴롭힌 경의 죄는 무겁다.”
“…….”
“또한.”
차가운 그의 눈빛을 견뎌내기 어려웠다. 이브니에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눈에 고여있던 눈물방울이 로브 위로 툭 떨어졌다.
“네가 이 일을 나중에라도…… 지금이라도, 먼저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건.”
머리 위로 차가운 목소리가 비수처럼 꽂혀 내렸다.
“우릴 믿지 못한 거야. 대장이라고 따른다면서. 나를. 그리고 하네칸을.”
믿지 못한 건가. 그런 건가…….
그래, 죄를 고백하고 나면 쫓겨날 것만 같았다. 아니면 죽임을 당할 거라고 생각했다.
“내게 먼저 말했다면 방법을 찾았을 거야. 센칸이 어떤 나라인지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대비했겠지.”
항상 제게 딱딱하기만 했던 카신이 저를 감싸줄 것이라고는, 사실 꿈에도 생각 못 했었다.
그러니 믿지 못한 게 되는 걸까.
그저 두려웠던 거라고 해도, 변명처럼 들리겠지.
이브니에는 이제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이야기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말했지만, 대장이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는 이미 건너간 듯했다. 이렇게 되기까지 모두 자신이 자초한 것임을 안다.
이브니에는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 물어보려던 찰나였다. 그녀는 시선 끝에 걸린 누군가를 발견했다.
“……대, 대장!”
목에 닿아 있는 칼날이 살갗을 스치는 줄도 모르고, 이브니에가 황급하게 일어나 비명을 질렀다.
“이브니에 경!”
그녀의 갑작스런 행동에 카신이 눈을 크게 뜨며 다시 칼을 거뒀다.
이어 느껴지는 다른 인기척에 빠르게 몸을 틀었다.
순간 단도가 그의 얼굴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대로 서 있었다면 아마 그의 목에 꽂혔을 무기였다.
습격이다. 그러나 카신은 당황하지 않고 주변을 살폈다.
새카만 로브를 입은 남자가 보였다.
빛 한점 들지 않는 음울한 골목길 사이에 서 있던 그것은 스르륵 순식간에 사라졌다.
카신이 그를 쫓으려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품에 안긴 따뜻한 온기에 순간 정신을 차렸다.
“……이브니에 경.”
시선을 내리자 가장 먼저 붉은 머리칼이 보였다.
이어 그녀의 날갯죽지 옆에 꽂힌 단검을 발견했다. 정확하게 카신의 심장을 노린 위치였다. 무너지지 않으려는 듯, 간신히 카신에게 매달린 채 벌벌 떨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마자 카신이 손에 쥐고 있던 검을 떨어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