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이브니에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입만 벙긋거리자 아이든이 씩 웃었다.
“저, 제가 질문을 해도 되나요?”
“아…… 내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죠. 아이든이라고 불러요.”
“……아이든 님.”
“머리색이 참 예쁘네.”
아이든은 산만하게 눈을 굴리며 이브니에를 꼼꼼히 뜯어보다 동의 없이 그녀의 붉은 머리칼을 매만졌다. 자신을 가꾸는 것에 습관을 들인 그녀다 보니, 머리칼에는 언제나 윤기가 흘렀다. 마음에 품은 사람이 있으니 매일 고된 훈련 후에 귀찮고 피곤해도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그 외에도 남들이 자신을 동경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좋았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치근덕거리며 직접 손을 대길 바란 건 아니었다. 머리칼만 만질 뿐인데 살갗에 소름이 끼쳤다. 싫다고 해서 그에게 칼을 겨눌 수도 없고, 험한 말이 나오지도 않았다.
이브니에는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인상만 확 찡그렸다. 그런 그녀를 보며 아이든은 재미있다며 눈썹을 치켜 올린 채 웃었다.
그러나 곧 그는 흥미를 잃었다는 듯 이브니에에게서 손을 떼고 뒤를 돌았다.
“그럼 다음에 또 보자고. 당분간은 볼 일이 잦을 거야.”
정중한 듯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이브니에를 하대하는 눈빛에는 여전히 살기가 넘실거렸다. 기이하게 생긴 마수들을 만나 싸우고, 많은 적과도 칼을 겨눠봤지만 아이든은 그들보다 좀 더 소름 끼치는 기운이 있었다.
항시 죽음을 가까이에 둔 사람이었다.
이브니에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벽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았다.
아이든이 제 앞을 떠나길 기다린 것이 아니라, 다리가 뻣뻣하게 굳어 움직여지질 않았다.
숨을 몰아쉬었다가 내쉬길 반복하며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브니에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사단으로 돌아가야 이 불안한 마음이 좀 더 진정될 것 같았다.
“아!”
그렇게 몸을 틀었던 찰나였다. 목에 칼이 겨눠졌다. 날카로운 감각에 이브니에의 입술 사이로 새된 비명이 터졌다.
그녀의 눈앞에는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서린 심장을 뛰게 만드는 이가 있었다. 오늘따라 유독 차가운 눈빛에 다시 다리가 돌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단장님이 제게 칼을 겨누고 있다.
“이브니에.”
“……대, 대장.”
카신이 왜 여기에…….
이브니에가 두 눈만 깜빡인 채 한참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헛것이 아니었다.
조금 경직된 듯한 대장의 입술이 겨우 움직였다.
“난 경을 한 번도 나쁘게 본 적 없어. 솔직하게 자기 생각을 표현할 줄 아는 당당한 모습이 좋았지.”
고백이 아닌 줄 알면서도, 그가 자신을 좋게 봐주고 있다는 말에 마음 한구석이 찡해졌다.
이브니에는 차갑고 날카로운 금속이 자신의 목에 닿아 있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현실이 피부로 느껴지자 식은땀이 죽 나고, 손이 벌벌 떨렸다.
“그런데 센칸의 첩자가…… 경이었나? 날 속인 거였어?”
카신의 눈빛에는 분노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이브니에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혐오에 가깝게 바라보는 카신을 똑바로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여태 그녀에게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눈빛이었다.
“대, 대장…….”
방금 전 아이든과 함께 있던 것을 본 게 분명했다.
마법석을 거래하는…… 것을.
제게 칼까지 겨눈 데다 ‘센칸의 첩자’라고 지칭하는 것을 보니 빠져나갈 다른 방도는 없었다.
“사, 살려주세요.”
이브니에는 자신의 목에 칼이 닿아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순간 무릎을 꿇었다. 카신이 재빨리 칼을 틀지 않았더라면 깊게 베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은 아무렴 상관없었다.
“마법석을 몇 번 빼돌려 그들에게 넘기기는 했지만, 첩자라니요! 첩자 노릇은 하지 않았어요. 정말이에요.”
황실 기사단 내에 첩자가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백기사단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굴 의심해도 수장으로서 못 할 짓이라고 생각했고, 괜히 부하들에게 미안했다. 근데 정말 첩자가 백기사단 소속이라는 걸 확인하고 나자, 응어리진 채 쌓여 있던 죄책감이 분노로 돌변했다.
“마법석을 빼돌리는 게 얼마나 큰 죄인지 모르고 한 일인가?”
“……흐, 흐흑.”
“그게 첩자가 아니면 뭐지?”
이브니에는 도도했다.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다 거절당해도 굴하지 않고 당당했다. 그런 그녀가 어떤 날에는 대단하다 생각될 때도 있었다.
그녀가 기사단에 들어온 이래로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흐트러진 붉은 머리칼, 눈물범벅이 된 얼굴. 하지만 이 순간 카신의 눈에는 그것들마저도 불쌍하기보단 가식으로 보였다.
“저는 마법석 외에는 하네칸의 어떤 정보도 넘긴 적 없어요. 맹세해요.”
“네 맹세를 내가 어떻게 믿지?”
자신의 부하를 믿었기에 더 화가 났다.
칼을 쥔 카신의 손이 벌벌 떨렸다.
“대장.”
이브니에의 눈동자에 절망의 빛이 서렸다.
“저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자작의 딸이었어요. 가문을 물려받아봤자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스스로 무언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고요. 무엇이라도 되지 않으면 작위만 따지다 고고하게 늙어 죽을 것 같았어요.”
“그만.”
“어렸을 때부터 검을 휘두르는 걸 좋아했어요. 시작은 그렇게 단순했어요. 제가 어렸을 때는 마수와의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 기사를 자주 뽑았거든요.”
감정을 자극하려는 말이란 걸 알았지만 어느새 카신은 이브니에의 말을 듣고 있었다. 겨우 그만하라는 말을 했지만 이브니에는 듣지 않았다. 그녀는 이 자리에서 베여 죽더라도 해야 할 말은 해야겠다고 생각해 다시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제힘으로는 한계가 있었어요. 지방 기사 시험에서도 빈번하게 떨어졌죠. 그때 그들을 만났어요. 나를 도와주겠다고 했고, 처음엔 의심했지만 그들의 실력을 보고 도움을 받게 됐어요.”
그들이 어떻게 이브니에게 접근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어린 이브니에의 눈에 잘 훈련된 센칸의 기사들은 대단해 보였고, 희망을 주었다.
처음에는 타국의 첩자인 줄도 몰랐다. 그저 황실 기사를 준비하는 용병 정도로만 생각했다. 종종 일거리가 없는 용병들이 기사 준비를 하거나 호신의 용도로 검술을 배우고자 하는 이들을 가르친다는 말을 들은 적 있었기 때문이다.
이브니에가 자신은 돈이 없어 검술을 배우는 값을 치를 수 없다 하니, 그들은 그 값을 기사단에 합격한 뒤 받겠다고 했다.
뼈를 깎는 고통으로 일 년을 수련했다. 이브니에는 놀랍게도 황실 기사단 시험에 합격했고, 이후에서야 그들의 정체를 알았다. 그때 바로 밀고했어야 했지만, 어리석게도 어린 이브니에는 혹시 타국의 첩자들과 자신이 엮였단 사실을 알게 된다면 기사단에서 내쳐지지 않을까 두려워 입을 다물었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제국의 기밀도 아니었고, 그저 마수와의 전쟁 이후 들어오는 마법석을 한두 개씩만 가져다 달라는 것뿐이었으니까.
“처음에는 좋았어요. 마법석을 빼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으니까요. 꼼꼼하게 개수를 조사하지도 않고요……. 센칸에서 보수도 넉넉히 받았으니 제겐 큰 이익이라고 생각했어요.”
“…….”
“하지만 저도 사람인지라, 기사단에 정을 붙일 때마다 점점 죄책감이 느껴졌어요. 그래서 이제 합격을 도와준 값은 다 지불한 것 같으니 이 일에서 손을 떼겠다고 했지만, 그들은 되려 저를 협박하기 시작했어요.”
그랬다간 황실에 밀고를 할 거라고. 마법석을 빼돌리고 그 보수를 받은 배신자라는 걸 알면 네 인생은 망할 거라고. 그리고 우리의 정보를 넘긴 대가로, 네 목숨을 앗아갈 거라고.
이브니에는 두려웠다. 그들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어쨌든 시험에 합격한 건 그녀였다. 악착같이 매달리고 고통 어린 훈련을 하며 얻어낸 결과물이었단 말이다.
그런데 그리 쉽게 센칸의 첩자라는 오해를 받아, 기사단에서 퇴출당하고 다시 가난한 자작의 신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손에 죽고 싶지도 않았고, 동료들을 잃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카신. 그를 만나면서 더더욱 이브니에의 생각은 확고해졌다. 정직하고 용맹한 기사가 되고 싶었다. 자신의 단장을 따라서.
“대장…….”
이브니에가 고개를 떨군 채 흐느꼈다. 카신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 보았다. 말에서 거짓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신뢰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들을 털어놓고 감정을 호소한다고 해도 자신이 지금 본 현실이 달라지지 않는다. 이브니에의 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카신은 절박해 보이는 이브니에의 모습을 애써 외면했다.
“이브니에 경.”
“…….”
“경이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경위 따위 알고 싶지 않아. 그건 네가 스스로 죄를 자백했을 때나 통하는 말이지. 용서가 필요한 시기는 이미 지났다. 우리가 밝혀내지 않았다면, 경은 다음 파견에도, 그다음 파견에도 계속 마법석을 빼돌렸을 거야.”
“아니에요! 정말 그만두려고 했어요.”
“그런 불확실한 말은 할 필요 없어. 그 말을 어떻게 믿지? 협박당했다고 하지 않았나. 여태 그 협박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다음이라고 벗어날 수 있었을까?”
어느새 카신은 분노를 잠재운 채였다. 이브니에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도리어 생각이 정리되고, 마음이 차분해진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