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간헐적으로 꾸는 꿈은 매번 비슷했다. 잠을 자는 게 두려울 정도로 싫었던 꿈이 아닌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걸까. 정말 별거 아닌 꿈인데, 눈을 뜨면 이상하게 마음이 아릿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집중해야지.”
“……아, 네.”
플로라는 곁에서 들려오는 리비에르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녀가 집중하자 손바닥에서 작은 빛이 솟아올랐다. 눈앞에 펼쳐진 작은 빛에 플로라가 환하게 웃었다. 어색하지 않은 웃음이 날 정도로 기뻤다.
“잘했어.”
“해낸 건가요?”
“그래.”
아무 성과가 없는 것 같아서 마음이 조급했었다. 그래도 이리 차츰 나아지고 있는 모습을 보니, 스스로가 신기하기도 하고 리비에르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아직 리비에르처럼 빛으로 어떤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그래도 동그란 빛이 제 손에서 둥둥 떠다닌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컸다.
“마력을 점점 더 제대로 쓸 수 있게 되는 것 같은데. 봉인이 풀리게 되는 건가…….”
“벌써요?”
플로라는 리비에르가 예전에 시몬과 나누던 대화를 떠올렸다.
‘다른 사물이나 마법진 같은 건 타인이 해제할 수 있지만, 몸에 직접 새긴 마법은 함부로 풀 수 없어요. 자칫 잘못했다간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
‘마법을 시전 할 때 그걸 깨트릴 수 있는 장치를 심어두었을 겁니다. 예를 들면, 이 음식을 먹게 되면 나는 마법에서 풀려날 거야, 하고 말이죠. 그게 음식일 수도 있고, 어떤 말일 수도 있고, 장소일 수도 있어요.’
리비에르가 말하길, 기억을 지우고 마력을 봉인한 것에 어떤 장치를 심어놨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 장치가 벌써 깨졌다고 보지는 않았다. 깨질 만한 어떤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건…….
플로라는 잠시 숨을 삼켰다가 리비에르를 바라보았다.
“저 리비에르 님.”
“……응?”
“저택 수리는 잘 되어 가시나요?”
리비에르는 플로라의 엉뚱한 질문에 저의가 무어냐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 죽은 정원을 살리는 일은 쉽지 않지만. 대저택 외관 보수는 얼추 끝나가는 것 같더군.”
“지난번에 절 초대해주신다고 했잖아요. 그냥…… 생각나서요.”
“아름다운 정원을 기대하는 게 아니면 오늘 만찬이라도 대접할 수 있을 거야.”
리비에르가 그 일을 기억할 줄 몰랐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플로라는 순간 자신이 그동안 꿔왔던 꿈을 떠올렸다.
분명 리비에르의 대저택이었다.
처음 꿈은 하녀와 시종이 살해당한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악몽이었는데, 그다음부터는 꿈에서 굉장히 편안한 마음을 느꼈다. 풍경은 같은데, 매번 다른 꿈을 꾸는 거다.
그게 하필 리비에르의 저택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흩어지는 마력은 잘 제어가 되는 건가?”
리비에르는 곧 수업으로 돌아갔다. 플로라는 흩어진 마력들도 느낄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들은 슬라임처럼 몸속 구석구석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리비에르는 그 마력들을 한곳에 모으는 연습을 자나 깨나 끊임없이 하라고 일러주었다.
리비에르가 확인해줄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스스로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마력을 느끼기 시작한 건 최근이었기에 아직 미숙했지만, 온몸 곳곳에 퍼진 그 끈적한 기운을 생각할 때마다 각오를 다졌다.
“그래도 처음보단 많이 능숙해졌어. 기본적 자질은 갖춰진 것 같으니 다음엔 다른 마법을 가르쳐줄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던가. 리비에르의 다정한 칭찬의 말에 의욕이 불타오르는 듯했다.
“자, 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고. 아까 했던 말을 이어 해 볼까?”
“……네?”
“내 저택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서. 어떤 이유인지 들어보려고.”
“아, 저번에 리비에르 님의 저택에 다녀온 뒤로 인상 깊었는지 계속 꿈을 꾸더라고요.”
“꿈?”
되묻는 리비에르의 말에 플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쩐지 표정 관리가 안 된다는 듯 웃지도, 그렇다고 딱딱하게 굳은 표정도 아닌 애매모호한 얼굴을 한 채였다.
플로라는 더 말을 이어야 하나 고민했지만, 리비에르가 어서 더 해 보라는 듯 빤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입을 열었다.
“매번 다른 꿈이었어요. 꿈에서 깨면 기억을 잊을 때도 있었고요. 다만…… 하나는 확실하게 알았어요. 그 장소가 전부 리비에르 님의 저택이었다는 거.”
플로라의 말에 리비에르의 한쪽 눈썹이 구겨졌다.
“왜 이런 꿈을 반복해서 꾸는 걸까요?”
“……좀 특이하긴 하군.”
“그래서 한 번 더 가보고 싶어서 여쭤본 거예요. 실례인 줄 알지만…… 호기심을 잘 못 참는 편인 모양입니다.”
“괜찮네. 내가 초대해 주겠다고 먼저 말하기도 했으니.”
“…….”
“한데 그런 꿈을 꾸면서 몸에 변화는 없었나?”
“좀 피곤했던 거 빼면…… 괜찮았습니다.”
피곤함은 자주 있는 일이라 이제 아무렇지도 않았다.
리비에르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의 눈동자가 생각에 잠긴 듯 짙게 가라앉았다.
“그럼 지금은 시간이 되겠나?”
“……지금이요?”
“응.”
리비에르가 결심한 듯 플로라에게 물었다.
“어…… 대장님께 물어봐야 할 것 같아요.”
“아마 될 거야. 문제가 생긴다면 내가 책임지지.”
“…….”
플로라는 곤란하긴 했지만 솔직히 그 저택에 다시 방문할 수 있으면 좋겠단 생각을 계속 해왔기에 승낙했다.
순전히 그녀의 꿈 때문에 생긴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일이었지만 만에 하나의 가능성도 놓고 보면, 기회가 있을 때 꼭 리비에르의 저택에 가야 한다는 판단이 섰다.
플로라에게 알게 모르게 어떤 균열이 생겼고, 그래서 꿈을 꾸기 시작했다면?
플로라는 리비에르를 따라 성을 나섰다.
그의 대저택까지는 성과 거리가 좀 있어 한참은 꼬박 걸어야 했다. 그사이 이상하게 긴장이 풀리지 않아서 리비에르가 하는 말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도 리비에르가 저택을 비운 새에 인기가 없어진 동네라 광장과 인근한 마을 중에선 가장 한적하고 조용한 편이었다. 풍경을 볼 여유도 있고, 주변을 경계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그런데 플로라.”
“……네?”
“그런 꿈을 꾸었을 때 어떤 기분이 들던가.”
“꿈속에서는 행복했고, 깨고 나면 슬펐어요. 정말 특이한 꿈은…… 가장 처음에 꿨던 건데요.”
“뭐였지?”
“저는 그 저택의 정원에 서 있었는데, 주변에 오래된 하녀 복장을 한 사람들이 보였어요. 무작정 그들을 따라갔는데, 비명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소리를 쫓아 뛰어가 보니 그들은 누군가에게 공격을 당해 죽어가고 있었어요.”
“…….”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꿈을 꾼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그 이후로도 종종 리비에르 님의 저택에 관한 꿈을 꾸게 되면서 그런 생각은 좀 적어졌어요.”
그건 이상하게, 다른 많은 꿈을 꾸었어도 가장 뇌리에 남는 기억이었다.
죽어가는 그 사람들의 애절하고도 절망스러운 눈빛이 플로라 자신을 향해 있었는데,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리비에르에게서 한참 말이 없어 힐끗,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플로라를 마주 보았다.
“그렇군…… 확실히 호기심이 생길 만도 하겠어. 나도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거든.”
리비에르가 호탕하게 웃었다.
두런두런 마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저 멀리 리비에르의 저택이 보였다.
꿈에서 하도 보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쩐지 오랜 고향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그러면서도 긴장은 풀리지 않았는데, 그걸 눈치챈 리비에르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주었다.
저택이 점점 가까워졌다.
거대한 저택의 입구를 넘어서지 못한 지난번과는 달리, 오늘은 이 안으로 발을 디딜 수 있게 되었다. 리비에르는 저택의 외부 보수 공사는 거의 마쳤다고 했지만, 정원의 식물들이 빼빼 마르고 죽어버린 건 여전해서 그런지 처음 보았을 때처럼 음침한 분위기는 그대로였다. 리비에르가 온 것을 확인한 고용인들이 저택의 문을 열어 주었다.
“아니, 리비에르 님. 성에서부터 이곳까지 걸어오신 겁니까? 마차는 어디에 두시고…….”
“운동 삼아 좀 걷고 싶어서 말이지. 이 기사님과 대화할 것도 있고.”
리비에르를 걱정스레 살피던 집사가 눈이 그제야 플로라에게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