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84)화 (84/154)

84.

사르트가 백작령을 다시 방문한 것은 한 편지를 받은 뒤였다.

백작령에 있는 거대한 산속을 헤집으며 길을 찾아낸 그는 간신히 작은 오두막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버려진 집 같아 가까이 다가가기가 망설여졌지만, 삐걱거리는 발판을 밟고 올라가 용기 내 문을 두드렸다.

얼마 후 끼익, 하고 문이 열리며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거구의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잠을 자다 막 깬 건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사르트를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남자가 누구냐는 질문을 먼저 건넸다.

“제국 기사단 소속 사르트라고 한다. 그대가 리오르인가?”

“……아! 맞습니다.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사르트가 누군지 알아챈 오두막의 주인은 잠이 확 달아난 듯 눈을 크게 뜨고, 몸을 틀었다. 그 사이로 사르트가 들어갔다. 겉에서 보는 것보다 오두막 안은 넓고 쾌적해 보였다.

“이,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보던 사르트는 리오르의 안내대로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르트는 곧 차를 내오려는 리오르를 붙잡아 본론으로 들어갔다.

“편지에 적어 보냈던 일을 제대로 들어보려고 불쑥 찾아왔네. 미리 기별하지 않은 것은 사과하겠다.”

“……아, 아닙니다.”

“본 걸 얘기해봐.”

“협곡에서의 밤이었습니다. 뾰족한 돌이 깔려 있어 등이 배겨 잠에 쉽게 들지 못했어요. 평소 밤에는 잠을 쉽게 못 드는 불면증이 있기도 했고요…… 그때 어떤 소리가 들렸어요.”

리오르는 이번 백작령 마수 토벌에 병사로 자원한 인물이었다.

자신이 기거하는 깊은 산에 마수가 돌아다닌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참여하게 된 것이었다. 한때 용병 기사로 활동했기에 능력은 충분했던 모양이다.

백작령에서 있었던 사건을 뒤늦게 알게 되어 곰곰이 생각하다,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어 편지를 보낸다고 동기를 밝혔기에 의심은 적었다. 지금은 지푸라기 같은 단서만 있어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기에 사르트는 고민 없이 백작령에 내려올 수 있었다.

“남자와 여자의 대화였죠. 처음에는 제국 기사님들의 사랑놀음이겠거니 생각해서 모른척했는데, 지금 가만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바로 편지를 보냈습니다.”

“무슨 대화였지?”

“제대로 들은 건지 모르겠는데…… 여자가 뭘 빼냈다고 했어요. 남자는 그 물건을 받고 보수를 준 것 같고요. 확실한 건 아니지만 대화의 뉘앙스가 그랬어요.”

사르트는 자신이 들은 것이 확실하지 않을 수 있다는 리오르의 말에도, 심각한 얼굴을 지우지 않았다.

‘무언가를 빼냈다. 보수를 주고받았다.’

분명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있었다. 가장 큰 단서를 찾은 것 같기도 했다.

남자와 여자.

이번 토벌 임무에 차출된 여자 기사는 그 수가 남자보다 현저히 적었다.

이 일에 엮여있는 게 사라져버린 파르베 뿐만이 아니었던 거다.

“얼굴은 보지 못한 게 확실한가?”

“……네. 워낙 속삭이던 소리라 제가 제대로 들은 건지도 모르겠어요. 괜히 엿듣는 것 같아서 듣지 않으려고 애썼거든요. 그런데 뭔가를 주고받았다면, 그게 무엇일까요?”

리오르의 질문에 사르트는 대답 대신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값어치가 있는 것은, 아마도 마법석이겠지.

사르트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 * *

제도에서 일어나는 범죄사건은 거의 카신에게 보고가 올라오지만, 지방에서의 일은 전파 속도가 확실히 늦었다. 언뜻 소문으로만 들었을 때도 심각하고 잔인했던 사건이라 카신은 일지를 눈여겨보았다.

둔탁한 흉기로 죽을 때까지 가격당하고, 죽은 후에 질질 산속으로 끌려가 무참하게 버려진 남자의 사건이었다. 별다른 흔적도 없고, 목격자도 없는 데다가 남자가 홀로 키우고 있었다는 아이마저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흥이 많고 술을 좋아해서 이따금 아직 어린 아이를 홀로 방치한 채 놀러 다니기는 하지만, 마을 내에서 그에게 원한을 가질 만한 사람은 없었다.

의문의 죽음과 아이의 실종. 석연찮은 부분들이 많았다.

카신은 일지를 읽어 내리며 톡톡, 책상을 두드리다가 다른 일지를 펼쳤다.

황제가 하네칸 전역에서 일어나는 실종 사건에 신경을 쓰는 만큼, 카신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실종되었다는 보고만 받으면 미친 사람처럼 그 사건을 헤집어 대었다.

그래서 알아챈 사실 한 가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실종 사고 중 몇몇 사건은 같은 수순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아이의 주변인은 무참히 살해당한 뒤, 아이만 사라진다.

리비에르의 곁에 있던 그 조그만 아이 역시도 그런 식으로 종적을 감췄다.

반짝거리는 은발 머리를 떠올리자, 자연스레 그 아이에서 플로라의 얼굴이 떠올랐다.

“……병이군. 병이야.”

“에에? 네? 단장님. 어디 아프십니까?”

카신의 혼잣말을 들은 하키라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물었다.

그에 카신이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혼잣말이었어.”

“어디 불편하신 거면 꼭 말씀해주십시오!”

“……그래.”

카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키라는 한참 더 그런 카신이 수상하다는 듯 쳐다보았지만, 이내 그가 다시 일 처리에 집중하는 듯하자 결국 시선을 떼었다.

* * *

“떠들지 말고!”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지하, 아이 세 명이 옹기종기 앉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구석에 동떨어진 채 앉은 한 남자아이는 방금까지도 울음을 터트린 듯 눈가가 발개진 채 입술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그 외에 다른 아이들은 남자가 소리를 지르는 것에 익숙해진 모양인지 놀라는 기색도 없이 덤덤한 얼굴이었다. 기쁨과 슬픔, 두려움 같은 감정들은 표정에 그려지지 않았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이 지하에서 가장 시끄러운 건 아이들을 감시하는 덩치 큰 남자뿐이었다. 그때 지하로 누군가 내려왔다. 남자가 미간을 찡그린 채 뒤를 돌아보았다가 황급하게 자세를 고치고, 이제 막 계단을 내려온 이들에게 인사했다.

“고생이 많아. 마틴.”

고생이라고는 소리 지르는 게 전부였지만.

스벤타 남작은 예의상 감시관에게 격려 인사를 건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함께 온 동행인, 로브를 둘러써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이에게 가까이 다가가 무언가 속삭였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를 마쳤는지 남작은 감시관을 향해 말했다.

“내일부터는 저들에게 일거리를 주지 마라. 깨끗이 씻기고, 입히고, 맛있는 걸 먹여.”

감시관은 대답 대신 알겠다는 듯 허리를 굽혔다.

그러면서도 눈은 저도 모르게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를 향했다. 어딘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였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섬뜩한 기운이 느껴져 어쩐지 두렵기까지 했다. 로브를 입은 남자의 시선이 마틴에게 닿는 듯하자, 그는 다시 허둥지둥 고개를 숙였다.

곧 남자가 몸을 틀어 나가자, 스벤타 남작도 허둥지둥 그를 따라나섰다. 높은 계단을 오르고 비밀통로를 지키는 감시병들을 지난 뒤에야 남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각하. 요즘 제국 내에 흉흉한 사건 사고가 많이 늘었어요. 그 소식 들으셨나요? 센타 지방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이요.”

남자는 남작의 말에 아무 대꾸하지 않았다.

“남작.”

그리고 얼마간의 침묵이 흐른 후, 스벤타 남작을 불렀다.

“예. 각하.”

“그대의 저택에서 일하는 고용인이 이상한 사람을 봤다던데. 짐승처럼 빨리 달리던 사람이라고?”

“아, 그 일이요. 그걸 어떠, 어떻게…… 그런 허무맹랑한 소문이 각하께도 전해진 겁니까?”

“더 이상 불필요한 소문은 내지 말게.”

스벤타 남작은 의외라는 듯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런 작은 소문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을 줄 알았는데.

그런데 왜 소문을 내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 꽤 오래 지난 일인 데다 이미 안줏거리로 씹을 만큼 씹어서 흥미조차 잃은 상태였다.

저의가 무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남작은 질문 대신 수긍의 뜻을 전했다. 괜히 물었다간 화를 입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스벤타 남작은 생각보다 이런 쪽에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궁금한 것쯤은 억누를 수 있었다. 그렇게 밑바닥에서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그의 뜻에 따라 친척지간이었던 가문 하나를 통째로 날려 먹는 짓도 서슴지 않았던 사람이 바로 자신이다. 큰돈을 맛보고 나니, 더 이상 두려울 것도 없었으며 가문의 위상을 드높여준 각하께 충성을 다해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불필요한 건 신경 쓰지 말자.

“그걸 봤다는 고용인은…….”

“…….”

“심부름을 보내야겠어. 장소와 날짜를 쪽지로 전달할 테니, 꼭 그자로 보내.”

의미심장한 말이 남작의 귀에 박혀 들었다.

남작은 또다시 얼떨떨한 얼굴을 했지만, 당황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브라움을 심부름 보내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뻔했다. 남자의 목소리에서 풍기는 뉘앙스만으로도 충분히 유추 가능한 일이었다.

왜 그의 목숨을 끊어서라도 이 소문을 더 이상 퍼지지 못하게 막으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반기를 들거나 깊게 알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간 자신이 브라움의 다음이 될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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