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있잖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시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지에서 시선을 뗀 에르네가 황제를 보았다.
“그냥 나 좀 겁쟁이가 된 것 같아. 갈수록 더 그러네. 누구에게라도 확신을 얻고 싶어서 그래.”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너무 소중해서 잃어버릴까 걱정이 되는 것.
그런 마음을 에르네도 잘 알았다. 황제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더라도 마음은 비슷하니까.
<그녀에게 직접 물어보십시오. 그게 가장 확실한 답이잖아요.>
“그래. 그래야지…….”
<인연이 아니면 놓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제가 옆에서 봐온 폐하는 지금까지 늘 무언가를 쟁취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오셨습니다. 혹여 서툴러 놓치더라도, 다시 붙잡으실 수 있을 거예요. 정말 진심으로 다가가신다면요.>
“…….”
<간혹 직감이 맞을 때도 있어요. 플로라가 질투하고 있다 느끼셨다면 그게 맞을지도 몰라요. 플로라는 감정을 숨기는 것에 특화가 되어 있는데, 폐하가 그리 짐작하실 정도라면…… 그녀 자신도 나름 최대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거면 좋겠군.”
에르네의 말이 다 맞았다. 그녀에게 직접 묻고 듣지 않는 한, 확실해지는 것도, 해결되는 것도 없을 것이었다. 고로 이런 식으로 혼자 생각하고 자괴감에 빠져드는 건 무의미한 감정 소모였다.
“참, 마법 결계 건에 대해선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리비에르 님께서 힘 써주고 계신다 들었습니다. 아직 따로 올라온 보고는 없어요.>
“리비에르도 왔으니 제대로 해결되었으면 좋겠군. 어떤 쥐새끼가 자꾸 마법 결계를 드나드나 했는데…… 참.”
플로라를 습격한 수상한 첩자들 몸에서 발견해낸 패치가 아니었더라면, 그리고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영영 몰랐을 사실이었다. 단순히 마법 결계에 오류가 있어서 간헐적으로 문제가 발생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다.
리비에르가 마법 결계를 강화하거나 혹은 방식을 바꾸려고 시도 중이라 했으니, 시간은 걸려도 어떻게든 해결해주겠지. 알면서도 자꾸 마법 결계에 이상이 생겼다는 소리를 전달받을 때마다 골이 지끈지끈 아프고, 마음이 쓰였다. 이번엔 또 어떤 놈이 멋대로 제국을 드나들었는지, 화가 나서 머리까지 홧홧해지곤 했다.
“얼마 전에 일어난 살인 사건은 어떻게 처리되었나?”
<집에 있던 여섯 살 난 아이가 행방불명되었습니다. 워낙 어두운 밤중에 일어난 사건이라 아무도 본 이가 없다고 하고요.>
“흠. 플로라에게 센칸의 이야기를 들어 그런가. 왜 자꾸 그쪽이 의심되지? 전형적이고 깔끔하잖아. 잔혹한 살인, 아이 실종…….”
<그동안 미제로 남았던 사건들과 비슷하긴 합니다.>
공론화되진 않아도 지속적으로 보고가 올라오는 아이 실종 사고, 의문의 살인 사건. 그중에는 아닌 것도 있겠지만 대부분이 센칸과 관련이 있을 거라 보는 중이었다. 시몬은 자신이 보고 받았던 그 모든 사건들을 떠올리며 설핏 표정을 굳혔다.
그 와중에 플로라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제국 내에서 일어나는 실종 사건에 더욱 집착하게 된 것은, 리비에르의 수양딸이 실종된 후부터였다. 아직은 리비에르도 자신도 짐작하는 단계라 조심스럽지만, 만에 하나 그 추측이 사실이라면…… 어서 플로라가 기억을 되찾으면 좋겠다 싶은 바람이었다.
시몬은 자신의 이마를 감싸 안으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번 해처럼 건국제 준비가 쓸데없고 귀찮다고 생각한 적은 처음이었다.
* * *
“폴.”
“플로라, 왔어?”
“몸은 좀 어때?”
“……보다시피. 많이 좋아졌어.”
이제 침대에 앉아있을 수 있게 된 폴의 안색은 예전 모습과는 달랐다. 눈을 감고 있던 폴의 모습이 시체 같았다면, 지금은 생기가 넘쳤다. 플로라는 이마저도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뭐야?”
“과자를 좀 가져왔어. 심심할 때마다 하나씩 먹어.”
플로라는 챙겨온 과자 바구니를 탁상에 올려두고, 침대 옆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백기사단은 이번 사냥대회에서 우승했다며. 정말 대단해.”
“……응.”
“너는 여명 기사단으로 갔고.”
“맞아. 내가 말할 것도 없이 다 알고 있네.”
“응. 어제 멜리아가 왔었거든.”
“…….”
“정말 축하해! 내가 복귀했을 때 네가 없을 거란 게 좀 슬프긴 하지만 잘된 일이잖아.”
“고마워. 언젠가 다시 같이 임무에 나설 날이 오겠지.”
폴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넌 언젠가 근위대가 될 거라고 짐작하곤 있었어. 네 끈기나 실력, 판단력 같은 걸 종합적으로 봤을 때 말이야. 정말 부럽다. 여명 기사단은 모든 기사의 최종 꿈이잖아.”
느릿하게나마 말을 잇는 목소리에도 돋아나는 새싹 같은 생명력이 느껴져 플로라는 폴과 대화하는 것이 행복했다.
“근데 나…… 복귀할 수 있겠지?”
“그게 무슨 말이야?”
폴이 어색하게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몸 상태가 이래서 그냥 막연한 걱정이 들어. 예전처럼 몸을 움직일 수 있을까 싶어.”
“분명 나을 거야. 그런 걱정은 하지 마.”
폴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문에서는 기사 관두고 돌아오라고 난리야.”
차라리 깔끔하게 죽었으면 모르겠지만,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며 겨우 삶을 되찾은 폴을 바라보았던 부모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예전이라면 이해하지 못했을 그 감정들을 이제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네 선택이 중요하지.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잘 모르겠네, 아직은. 나도 죽을 고비 여러 번 넘기고 나니까 다시 검을 잡을 수 있을지 무섭기는 해. 근데, 제국의 기사가 되는 것 외에 다른 일은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내가 검을 잡지 않으면 무얼 할지 그것도 걱정이야.”
눈을 뜨고, 치유를 받고, 더딘 회복 기간을 지내는 동안 폴도 생각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한순간에 어두워진 그의 표정에 플로라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널 믿어. 폴.”
“…….”
“네가 검을 사랑한다는 것도 잘 알고. 가상훈련이었지만 마수와의 싸움에서 얻은 후유증과 두려움도 극복해낸 사람이잖아.”
플로라의 응원에 폴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격투대회는 나도 꼭 나가고 싶었는데. 아쉽다.”
“내년이 있잖아.”
“플로라, 너는 이번에 나갈 거야?”
“……글쎄. 아마 일정을 봐야 하지 않을까?”
“나가게 된다면 알려줘. 경기 관전이라도 꼭 하고 싶어.”
“그럴게.”
플로라는 종종 시간을 내 폴의 병문안을 가 기사단 내의 이야기들을 나눴다.
폴은 이따금 사색에 잠긴 듯 멍한 눈을 하고 있다가, 플로라를 바라보곤 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어쩐지 재촉하고 싶지 않아 가만두었다.
그런 폴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플로라가 슬슬 기사단으로 복귀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있잖아. 플로라.”
“……응?”
“무사해서 다행이야.”
플로라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진심 어린 눈빛에 어쩐지 마음 한 켠이 아려왔다.
자신만 무사한 것 같아서 죄책감을 느끼던 참이다. 그런 폴에게 위로의 말을 들으니 어쩔 줄을 몰랐다.
“날 공격했던 사람 말이야. 네게 악감정을 가진 것 같았어. 얼굴은 어두워서 보지 못했지만…… 내가 네 곁에 있기 때문에 죽는 거라고, 널 미워하라고 하더라고.”
“…….”
“단장님께 듣자 하니 아직 수사에 큰 진척은 없다고 하던데. 그럼 범인도 아직 찾지 못한 거잖아.”
이미 범인이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이제 카신도 그러하겠지.
하지만 폴에게도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는 없어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네가 여명 기사단으로 간 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해. 정말. 적어도 거긴…… 늘 폐하에 의해 움직이는 군대니 쉽게 널 해치지 못할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해야 해.”
“폴…… 내 걱정해 줘서 고마워. 널 다치게 한 사람은 내가 꼭 잡아서 가만두지 않을 거야. 얼른 나아.”
폴이 고개를 끄덕이며 플로라에게 어서 가보라는 듯 손을 휘저어주었다.
파르베…….
변해버린 그의 모습을 떠올리자, 골이 띵하게 아파 오는 듯했다.
지금은 어떻게 되었으려나. 완전히 마수의 모습을 하고 있진 않을까?
플로라는 이 제국 내에 여전히 그가 있다는 사실에 불안해졌다. 당장 성으로 쳐들어오지는 않겠지만, 앞으로 격투대회나 건국제 같은 많은 행사를 앞둔 와중에 찝찝한 사건과 상황들이 많이 벌어지니…… 어서 그를 잡을 수 있으면 좋겠단 생각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