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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82)화 (82/154)

82.

부동의 자세로 눈만 깜빡이던 플로라가 황급히 숨을 삼켰다.

그의 주홍색 눈빛이 따뜻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건국제 때는 너도 에르네와 함께 나와 지내면서 호위를 맡는 게 어떨까 해서.”

“아…….”

임무에 대해 말하는 것이었구나.

하마터면 큰 오해를 할 뻔했다.

“……연장 근무라고 욕해도 어쩔 수 없어. 네가 내 눈앞에 멀쩡히 있어야 안심이 될 것 같으니.”

“아, 네. 저는 괜찮습니다.”

시몬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되게 싫어하는 표정인데.”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폐하를 가까이 모시는 건 근위대의 큰 영광입니다.”

혼자 허튼 생각을 해서인지, 괜히 분위기가 어색하게 느껴지고 민망했다.

“그럼 에르네에게도 제안해 볼게. 어차피 근위대 소속 일정은 모두 그의 관할이니 안 된다고 하면 나도 어쩔 수 없지만. 그땐 다른 방안을 생각해봐야지.”

“……네.”

플로라는 고개를 폭 숙였다.

“리비에르와 수업은 괜찮던가?”

“아! 좋으신 분이에요. 수업도 재미있고요.”

리비에르의 말에 플로라는 다시 고개를 들어 눈을 반짝였다.

그와의 마법 수업은 정말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꼭 아카데미에서 수업받는 기분이 드는 것 같달까.

시몬도 그 대답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에는 밖에서 만나 훈련받느라 리비에르 님의 저택을 지난 적 있었어요.”

저택 안을 들어가 본 것도 아닌데 계속 뇌리에 남아 있었다.

평소 플로라였다면 보고도 그냥 지나쳤을 곳일진대. 그런 거대하고 음습한 성이라면 센칸에서 지낸 성도 못지않았다. 한데 왜…….

“리비에르 님의 저택이 계속 마음에 남더라구요. 그래서 그런지…….”

“무슨 일이 있었나?”

“그날은 꿈도 꾸었습니다. 제가 리비에르 님의 저택 정원에 있었고, 그곳에서 누군가 죽는 꿈이었어요. 익숙한 공간이라고 느껴 그런지 찝찝하더라고요. 다음에 리비에르 님과 훈련할 시간에도 말씀드리려 합니다. 제가 그런 예지 능력을 받은 사람은 아니겠지만…… 혹시나 해서요.”

시몬은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플로라의 말에서 무언가를 느낀 탓이었다.

“그 이후로도 계속 꿈을 꾸었나?”

“아니요. 그런 꿈을 꾼 건 오랜만이었어요.”

“전에는 어떤 꿈을 꾸었는데?”

시몬의 질문에 플로라가 옅게 웃었다.

“제 오랜 친구에 대한 꿈입니다.”

“……친구?”

“네. 센칸에서 억울한 죽임을 당한 친구였죠. 사랑스럽고 밝은 아이였는데…….”

“아, 내가 실례했군.”

“아닙니다.”

기운이 빠진 듯한 플로라의 모습에 시몬이 눈치를 살폈다.

혹시 자신이 그녀의 아픈 곳을 다시 건드리진 않았나 싶어, 마음이 닿을 수밖에 없었다.

* * *

시몬은 건국제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칸나와 주기적으로 만나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두 사람의 약혼이 거의 가까워졌다고 오해하고 있었고, 그들 중에는 플로라도 포함되어 있었다.

플로라의 첫 근무는 칸나 영애와 시몬이 오찬을 즐기는 식당 앞을 지키는 일이었다.

시몬에게 다정하게 에스코트를 받으며 유유히 식당으로 사라지는 칸나의 모습까지 플로라는 보고 싶지 않아도 봐야만 했다.

이런 비참한 마음은 자신만 알고 있으면 된다고, 그리 다독였지만 상처는 계속해서 그녀의 감정을 할퀴고 헤집어댔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내 초대에 응해주어 고맙소. 칸나 영애.”

두 사람의 마지막까지 지켜봐야 하는 입장은 고통스러웠지만, 고통이 계속되면 무뎌진다고 하던가. 그래도 예전보다는 훨씬 나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플로라는 그리 자신을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아, 이제 근무를 하는 모양이네. 플로라 경.”

“……예. 폐하.”

“앞으로 잘 부탁해.”

“제 목숨 다 바쳐 모시겠습니다. 폐하.”

지척에 있는 플로라를 발견한 시몬의 미소에도, 그녀는 감히 고개를 들어 마주 웃을 수 없었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시몬이 먼저 걸음을 떼어주길 바랄 뿐이었다.

딱 거기까지의 사이였다.

* * *

“……있잖아.”

<예. 폐하. 말씀하십시오.>

에르네가 자신을 바라보자, 시몬이 손에 들고 있던 초대장들을 내려놓았다.

“알다시피 건국제 때 센칸의 라비우 왕도 귀빈으로 올 거고 그가 데려오는 이들 중에…… 아이든이라는 남자가 있을지도 몰라.”

뜸을 들이는 걸 보니 플로라의 이야기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황제가 이런 말을 해올 거라고 어느 정도 짐작했던 에르네는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뭐, 뭘 알아?”

<플로라 경이 안전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 아니십니까?>

“아니, 뭐…….”

시몬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 했으나, 제 의도를 간파한 에르네 덕에 적잖게 당황하는 중이었다. 뺨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모습을 보며 에르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폐하의 곁을 맡기는 건 폐하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고 판단됩니다.>

“눈에 안 보이면 불안해. 그래서 공식적인 행사에서는 플로라를 원거리 배치하고, 야간에는 너와 함께 교대로 내 침실을 호위하는 게 어떨까 하는데.”

원거리 후방 배치라. 밤에는 침실 배치.

시몬이 플로라를 센칸의 사람들에게 철저하게 숨기고 싶어 하는 마음은 잘 알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요즘 건국제의 공식적 행사가 많아 에르네 역시 기사들을 배치하고, 훈련하느라 몹시 바쁜 상태였다. 플로라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나쁘지 않은 말 같았다. 이미 정해진 매뉴얼대로라면 플로라는 아직 황제 가까이는 다가올 수조차 없는 위치였지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규율을 깨야 할 수밖에 없겠다.

센칸의 첩자가 근위대 숙소까지 들어올 거란 끔찍한 생각은 하고 싶지도 않지만, 이미 플로라는 한번 성에 숨어들어온 첩자에게 습격당할 뻔한 적도 있었으니 아예 그 위험성을 배제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자신의 부하가 된 이를 지킬 수 있을 때 지키는 것도 대장의 몫이라고 판단한 에르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새 플로라는 어떤가? 적응은 잘한 것 같아?”

<오늘부터 임무 배치했습니다. 아직까지는 긴장했는지 매뉴얼대로만 행동하려는 것 같습니다. 돌발 상황이 벌어지면 대처하는 법 또한 서서히 익혀가겠죠.>

“……그렇군. 힘이 없어 보이지는 않고?”

에르네가 눈을 깜빡였다. 자기가 모르는 플로라의 어떤 비밀이 남아 있는 것일까 했는데, 시몬의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보니 그건 전혀 아닌 듯했다.

<딱히 그런 건…….>

“칸나 영애가 요새 성에 자주 오는데, 그 일에 대해…… 플로라가 신경을 쓰진 않나 해서.”

<……흠.>

이미 에르네는 칸나와 시몬이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 전해 들었다. 자신의 최측근이자 근위대장인 에르네에게까지 숨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시몬이 칸나와의 계약에 대해 털어놓았기 때문이었다.

에르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가 시몬을 보았다. 지금은 많이 성숙해진 얼굴이었지만, 에르네의 눈에는 왜인지 시몬이 아카데미 시절 앳된 소년으로 돌아가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가 보기에 지금까지 사랑이란 주제로 황제가 무언가 잘 해냈던 기억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 또한 잘하고 있는 건 아니니, 조언할 위치도 못됐다. 하지만 이리 쩔쩔매고 있는 황제를 보면 이제 대놓고 말해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분명 호기심이었고, 그렇게 궁금해하다 보니 어느 순간 마음이 닿은 모양이었다.

그녀에게서 정보를 빼내는 목적을 달성하고 흥미를 잃으면 금방 시들해질 관심이라고 생각했는데, 이후에도 점점 깊어지는 것 같은 시몬을 보며 에르네는 불안했었다.

그래도 시몬이 자주 웃고, 타인에게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혼자만 이리 뒤에서 동동거리면 무슨 소용인가.

<폐하.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됩니까?>

머릿속에 울리는 말에 시몬은 살짝 긴장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하신 질문에 대한 제 대답이 무슨 소용입니까?>

“응?”

이대로 두면 이 불쌍한 황제는 삽질만 하다 진짜 사랑은 놓치고, 귀족들에게 등 떠밀려 정략결혼을 할 것 같았다.

권력이나 정치적 측면으로 보자면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결말이었지만, 황제를 생각하면 그가 행복해지는 결말을 응원하는 것이 옳았다.

<질투하는 것 같다고 하면 플로라에게 마음을 고백하실 겁니까?>

“…….”

<반대로 질투하지 않는 것 같다고 대답하면 마음을 접으실 건가요?>

에르네의 말에 시몬은 침묵했다.

그의 말뜻을 정확하게 알아들었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침묵하고 고민하는 동안, 에르네는 오늘 올라온 근위대의 근무 일지와 은밀하게 들어온 정보들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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