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80)화 (80/154)

80.

복도에는 적막이 흘렀다. 플로라는 저도 모르게 힐끗, 단장실 옆에 있는 시몬의 침실을 바라보았다. 침실의 거대한 문은 굳게 닫혀 있었으며 근위대 기사들과 시종, 시녀들이 그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들과 눈이 마주치자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무언가 들킨 듯 초조한 마음이 들어, 플로라는 후다닥 자리를 피했다.

여명 기사단의 숙소로 돌아와 루가르를 만났다. 다행히 대장과의 대화가 오래 걸리지 않았기 때문에 함께 기사단을 돌아보기로 했다. 백기사단과 별로 다를 것은 없는 구조였다. 가까이에 시몬이 기거하는 황성이 있다는 것만 빼면 거의 비슷하다고 보아도 됐다.

해 질 녘 주홍색으로 물든 하늘이 영롱했다. 플로라는 이 시간마다 늘 습관처럼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시몬을 떠올렸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막을 수 없는 마음이었다.

이제는 인정해야 하거늘, 상처받고도 또 혼자 이리 버둥거리는 꼴을 보면 한심해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쩔 수 없는 딜레마였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아…… 아니요.”

“계속 다른 생각을 하시는 것 같아서요.”

표정에 심란한 마음이 다 드러났는지, 루가르가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어째서 좋아하는 마음은 숨길 수가 없는 것일까. 이런 것까지 훈련해야 할까.

플로라는 민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울적해졌다.

훈련장을 돌아다니고, 만나는 선배들과 인사를 나누던 플로라의 앞에 누군가 섰다.

“플로라 경?”

“……아, 안녕하십니까.”

익숙한 얼굴이었다. 오늘 벌써 몇 번이나 마주쳤던 얼굴이니까.

다부진 체격에 짧게 자른 갈색 머리를 가진 남자의 표정은 어딘지 돌처럼 딱딱하게 느껴졌다. 곁에 있던 루가르도 허둥지둥 선배를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카탈 경.”

“루가르 경도 있었군. 반갑네.”

카탈은 플로라와 루가르를 향해 인사했다.

“내가 근무하는 시간에 자주 봐서 그런지 익숙하군. 새로 입단했다는 소식은 들었어. 앞으로 잘 부탁하네.”

표정은 딱딱하고 감정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적어도 목소리에는 따뜻함이 묻어났다. 플로라가 옅게 웃으며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건넸다.

* * *

리비에르와 성 밖에서 만난 것은 첫 수업 이후, 삼 일이나 지난 뒤였다.

광장에서 리비에르와 만나 별건 아니지만 마도구를 파는 상점도 구경하고, 산책을 했다.

“오래 성에 갇혀 있으면 갑갑할 때가 있어. 나야 저택과 성을 수시로 왕래하지만, 경은 숙소도 성 안에 있다고 들었네.”

“……아. 네.”

플로라와 리비에르는 어느새 인적이 드문 거리를 걸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는 어딘지 쓸쓸해 보이는 커다란 대저택이 보였다.

가까워질수록, 오랫동안 관리되지 않았다는 것이 더 확연히 보였다. 철창들은 녹이 슬어 본래 어떤 색이었는지 그 의미를 잃었고, 유리창 곳곳은 깨져있기도 했다.

높고 낡은 철창 너머로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남자 고용인이 정원의 시든 나뭇잎을 쓸고, 또 다른 고용인이 나무들을 관리하는 데 힘쓰는 것이 보였다.

플로라가 그곳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듯하자, 리비에르가 중얼거렸다.

“유령이 나올 것 같나?”

갑작스러운 질문에 정신을 차린 플로라가 리비에르를 올려다보았다.

그 역시 대저택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이상하게 저택을 보는데 왜 언젠가 와봤던 것 같은 기시감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플로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집이 쓸쓸해 보이네요.”

“……그런가. 이곳에 사는 이들은 유령이 나오는 대저택이라고 하던데.”

플로라가 두 눈을 깜빡였다.

지난번 황제와 리비에르가 처음 만났을 때 나누던 대화가 떠오른 탓이었다.

유령이 나오는 대저택이라면, 리비에르의 집일까?

플로라가 궁금하다는 듯한 얼굴을 하자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덕에 복구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군. 내가 돕는다고 돕긴 했지만, 마법부의 일이 너무 바빠서 좀 소홀했고…….”

“리비에르 님의 저택인 거죠?”

“그래. 당장 소개하기는 좀 부끄러운 모양새지만.”

리비에르는 부끄러운 모양새라고 했지만, 플로라는 왠지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저택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발을 디뎌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나중에 정리가 좀 되면 소개해주지. 괜찮겠나?”

“……리비에르 님이 허락하신다면 저는 좋아요.”

플로라는 홀린 듯이 그곳을 바라보다가 앞서 걷는 리비에르의 뒤를 바짝 쫓기 시작했다.

* * *

언젠가 봤던 대저택이 분명했다.

거대한 나무는 바짝 마른 채 시들어가고 있었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발끝으로 말라비틀어진 낙엽들이 굴러다녔다.

고개를 들면 높고 뾰족한 지붕을 가진 검은 대저택이 한눈에 들어찼다.

유령이 나올 것만 같은 으스스한 분위기가 발을 떼기 두렵게 했다.

저택의 정원 한가운데 서서 물끄러미 풍경을 바라보던 플로라는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긴장하며 몸을 틀었다.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손을 대었지만 무기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플로라는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시선에 꽤 오래된 듯, 다소 촌스러운 디자인의 하녀 복장을 한 여자와 남자가 걸렸다. 플로라는 반사적으로 그들을 쫓았다.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따라잡기가 녹록지 않았다.

아악!

순간 오랫동안 방치되어 우거진 지저분한 수풀 더미로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가 이어졌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면서 두피까지 소름이 쫙 끼쳤다.

플로라의 걸음은 자연스레 빨라졌다.

갑자기 공간이 바뀐 듯, 허름한 대저택과 말라비틀어져 가는 정원이 아닌 싱그럽게 우거진 수풀이 보였다.

그것이 이상하다고 느낄 틈도 없이, 플로라는 소리가 나는 쪽을 향했다.

고통스러워하는 비명이 사라졌다.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들 때쯤, 소리가 끊긴 곳에 도착했다. 플로라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수풀 사이를 헤집었다.

해 질 녘 노을이 내리쬐는, 아름다운 풍경 너머로 끔찍한 광경이 보였다.

검붉은 피가 낭자했다. 칼에 찔린 채로 간신히 숨을 쉬려는 듯 꿈틀거리는 사람들은 플로라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아!”

눈을 번쩍 뜬 플로라가 깊은 탄식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이 현실이고, 방금은 꿈이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또 악몽의 시작인가…….

하네칸에서 지내면서 르네에 대한 꿈은 거의 꾸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꿈에서 나온 사람이 르네는 아니었다.

르네 대신, 처음 보는 낯선 남녀가 나왔다. 누군지는 알 수가 없었다.

언젠가 제 손으로 직접 죽인 사람들일까? 그들이라면 왜 꿈에 나타나는 것일까.

플로라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흐트러진 긴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작게 난 창문 너머, 검푸른 하늘이 보였다. 아직도 밤은 깊고 쓸쓸했다.

“……리비에르.”

분명히 그의 저택이었는데.

찝찝한 마음이 좀체 가시지 않았다. 어제 리비에르 님과 웨스턴 마을 쪽을 지나며 그의 대저택을 봤고, 인상 깊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꿈에까지 나올 줄이야.

꿈에서도 긴장한 것이 자면서도 이어졌는지, 몸이 찌뿌듯했다.

더 이상 잠은 오지 않을 것 같아 간단히 옷을 걸치고 밖을 나섰다.

새벽 공기는 여전히 시원했다. 반짝거리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산책하는 중간, 기사단 선배들을 마주쳤다.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낯설지 않은 공간으로 느껴졌다.

맑은 공기를 마시니 잠이 점차 깨고, 악몽 같지 않은 악몽으로 인해 찝찝해졌던 기분도 차츰 회복되는 것 같았다.

“플로라 경.”

“……아, 이젤 경.”

“여기서 무얼 하나?”

플로라는 누군가 자신의 곁에 슥, 하고 서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밤하늘과 굉장히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이젤의 푸른 머리칼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근무는 아닐 테고.”

“그렇습니다. 잠시 산책을 나왔어요.”

“왜. 잠이 오지 않아?”

“……네. 악몽을 좀 꿔서요.”

“환경이 바뀌어 잠자리가 불편할 수도 있겠군.”

“…….”

“같이 좀 걸어도 될까? 나도 잠이 오지 않아서 잠시 나온 건데.”

“좋습니다.”

플로라는 이젤과 함께 걸었다. 그와 여명 기사단, 그리고 루가르 경에 대한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는 것은 재미있었다. 사방은 고요하고,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사방을 메우는 느낌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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