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알게 모르게 플로라는 이미 여명 기사단 내에서 유명인사였다.
폐하를 하루 종일 곁에서 지켜야 하는 이들이다 보니, 시몬이 플로라를 얼마나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당연히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녀의 실력도 감탄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그녀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많이 본 사람들은 아니지만, 대장인 에르네와 플로라가 대련할 때 보았던 이들은 모두 인정했다.
게다가 아직 마력을 쓰지는 못하지만, 발전의 기회가 무궁무진한 사람인데다 기초도 탄탄했으니 여명 기사단의 일원들은 플로라의 영입은 시기만 늦춰질 뿐 당연한 수순처럼 생각했다.
플로라와 에르네가 대련 준비를 하자, 기사들은 자리를 지켰다.
예전처럼 진검 대련도 아니었지만 에르네와 다시 마주 서자, 다시금 죽음의 위협이 턱 밑까지 차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알면 알수록 좋은 사람인 건 확실한데 첫인상 때문인지, 에르네를 향한 어쩔 수 없는 두려움과 의문 같은 것들은 여전히 마음 한편에 자리한 채 사라지지 않았다.
기사들의 이목이 집중되어 좀 부담스럽기는 했다. 영입 테스트를 다시 받는 느낌이 든달까. 하지만 누구도 플로라를 의심하거나 적대하지 않았다. 모두가 이 상황이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일 뿐이었다.
적어도 이곳은 스카웃으로만 영입될 수 있는 곳이니 플로라가 낙하산이니 뭐니 손가락질 받을 일은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은 편안했다.
에르네와 서로 인사를 나누고 훈련용 목검을 겨누자 세상에 대장과 자신 둘만 남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집중력을 깨지 않으려 애쓴 채, 플로라는 에르네를 향해 공격했다.
검을 뻗어 현재 가장 약점으로 느껴졌던 왼쪽 팔 부분을 공격하려 하자, 에르네가 가볍게 몸을 틀어 피하며 반격했다.
탁탁. 진검이 아닌 둔탁한 소리가 훈련장 안을 메웠지만, 기사들은 눈을 떼지 못하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사실 대장과의 대련을 이리 오래 버틸 수 있는 신입은 없었다.
이젠 대부분이 경험과 오랜 훈련으로 실력도 상승했지만, 모두 신입이었던 시절에는 에르네에게 된통 얻어맞기만 했다. 플로라가 엄청 뛰어난 검술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갑자기 나타난 ‘신입’이라는 점에서 모두가 놀라고 인정할 만했다.
게다가 백기사단에서도 제대로 훈련을 하고 검을 배운 모양인지, 미흡했던 부분까지도 차츰 완벽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변해 있었다.
전에는 상대를 죽이겠다, 악을 쓴다는 느낌으로 검을 휘두르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자신의 약점을 알고, 그 약점을 숨기거나 이용할 줄 알았다. 또한 몸짓은 날쌔지만 하고자 하는 공격이 정확하지 않았다면, 지금은 날렵하고 검을 휘두르는 모습 하나하나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까딱하면 어디 한 군데 베여 치명상을 입을 것 같았다.
대장의 표정은 진지했지만, 그 역시 만족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기사단원들은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검을 맞추는 것은 시간이 좀 더 길어졌다.
플로라는 계속해서 공격했다. 에르네의 행동과 약점을 간파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제 행동을 먼저 읽고 검을 맞춰주는 모습에 좀 더 자신감을 얻었다. 이기고자 하는 대련이 아니라, 또 다른 훈련을 시작한 느낌이었기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았다.
플로라의 모든 공격이 끝난 듯하자, 이제 대장의 시작이었다. 진검을 든 것도 아닌데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위협적인 공기가 살갗을 스쳐 지나갔다.
플로라는 겨우 그 공격들을 피했지만, 결국 마지막에 집중력을 잃어 팔을 얻어맞고 말았다. 한 대를 허락하니 그 뒤로는 정신이 얼얼할 정도로 얻어맞고, 목검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플로라가 그래도 이렇게까지 때릴 건 아니지 않느냐는 얼굴로 에르네를 바라보자, 그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픽 웃었다.
저도 모르게 균형을 잃고 넘어졌던 플로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툭툭 털어냈다.
그리고 에르네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대장님. 많이 배웠습니다.”
<저녁 먹고 다시 단장실로 와.>
에르네는 목검을 곁에 있는 다른 기사에게 넘기고 손을 휘휘 저었다.
대련의 끝이었다.
뒷정리를 마치고, 여명 기사단의 선배들과 거의 인사를 나눈 플로라는 거의 녹초가 되어 있었다. 점심 이후부터 리비에르와 마력 훈련을 하느라 정신력을 다 쏟아부은 것 같은데, 저녁을 먹기 전 짧은 훈련까지 하자 혼까지 쏙 나간 듯했다.
“플로라 님! 괜찮으세요?”
“네. 배가 고파서 그래요.”
“……같이 밥 먹으러 가요!”
안 그래도 이제 곧 식사 시간이라며, 루가르는 플로라를 데리고 여명 기사단의 식당으로 향했다. 값을 지불하고, 다른 사람들과 섞여 밥을 먹었다.
기사단 생활은 즐거웠다. 플로라를 신입이라고 어떻게든 부려 먹으려는 사람도 없었고, 말이 없이 조용조용한 편들이기는 해도 이따금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눌 때는 웃을 줄도 알고, 화나는 일에는 공감해서 화내줄 줄도 아는 사람들이어서 금세 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카신에게도 같은 기수의 동료들에게도, 또 자신의 상관이었던 사르트에게도 미안한 말이지만 꼭 이곳이 자신의 원래 집인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온 듯한 기분. 이곳에서는 제 뜻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을 것 같은 믿음. 기사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명예로운 일을 해내는, 이 돈독해 보이는 사람들 틈에 자신이 끼어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게만 느껴졌다.
“저녁 먹고, 본부 구경 가요. 우리! 제가 소개해 드릴게요.”
“아…… 대장님께서 저녁 먹고 단장실에 오라 하셨어요.”
“음? 그래요? 그럼 일 마치고 여유 되면 오세요. 오늘 아니면 내일 가면 되니까요!”
루가르는 플로라를 챙겨주는 것에 진심인 것처럼 보였다.
플로라는 그런 루가르에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 * *
식사를 마친 플로라는 단복으로 갈아입은 후에야 단장실로 향했다.
늘 폐하 곁에만 붙어 있는 줄 알았는데 에르네 역시도 서류를 살피고 업무를 보기도 하는지, 그는 소파에 앉아 어떤 서류들을 읽으며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에르네는 잠시 그것에 집중하다 서명을 하고 난 뒤에야 플로라를 향해 소파에 앉으라고 권유했다.
플로라가 쭈뼛거리며 그의 맞은편에 앉자, 그가 준비해둔 서류를 플로라에게 내밀었다.
슬쩍 눈을 내려 서류를 읽자, 비밀 유지 각서라고 쓰여있는 문구가 보였다.
“서명하면 되는 건가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없었다.
폐하를 보좌하며 생기는 일, 그리고 그녀가 이 성에서 보고 듣는 모든 것들은 절대 타인에게 누설해서는 안 된다는 각서였다.
<근위대는 좀 더 특별한 서명을 한다. 피로써 계약할 거야.>
간단한 서명으로 끝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긴 했다.
이 대제국 하네칸은 플로라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점이 많았으니까.
일단 마법이 있다고 생각하면 모든 점이 센칸과 다르다고 해도 이해가 되었다.
플로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의 단복에서 단도를 꺼내었다.
가볍게 상처를 내고 주먹을 말아 쥐어 피를 떨어트리자, 종이에 새겨진 글자가 은은히 빛났다가 사라졌다. 각서를 거둬간 에르네가 내민 것은 작은 연고였다.
<제때 바르지 않으면 덧날 거야.>
“감사합니다.”
<입단을 축하한다. 플로라 경. 그리고 아까 대련 말이야.>
“…….”
<실력이 많이 늘었어.>
“감사합니다.”
플로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르네에게서 칭찬을 받는 일은 아직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플로라의 마음속 에르네의 이미지는 살기가 가득하고, 톡 건드리기만 해도 폭주할 것 같은 인물이었으니.
에르네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는 듯, 한쪽 눈썹을 구겼다가 말했다.
<잘하는 일에는 칭찬해줄 줄 안다.>
“제 속마음을 읽으시는 모양입니다.”
<처음엔 감정을 잘 숨기더니, 요새는 편해진 모양인지 그대로 드러내잖아. 경이.>
“……아, 그렇습니까?”
<그래.>
한결 편해진 대화에 플로라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이 기사단에서 무엇이든 잘 해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대장님. 감사합니다.”
<기대하고 있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뿐이야. 폐하와 황실을 지키는 것. 경은 그것만 가슴에 품고 살아가면 된다.>
“……알겠습니다.”
<이만 나가봐.>
플로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에르네를 향해 인사하고 밖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