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이곳에서 보니 반갑다. 플로라 경.”
따뜻한 목소리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기분이 몽글몽글 풀어지는 것 같았다.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말에, 그제야 플로라가 일어나 시몬을 마주했다. 햇살이 없어도 눈이 부시도록 반짝이는 사람이었다.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듯한 감정에 플로라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씰룩였다.
“오늘이 첫 근무겠군.”
“네. 그렇습니다. 폐하.”
“앞으로 잘 부탁해.”
눈을 접어 웃는 모습에 플로라도 웃고 말았다.
“에르네 경과 대화해야 할 것 같으니 난 이만 빠지지.”
시몬은 플로라에게 다시 한번 웃어주고는 뒤돌아섰다.
에르네를 제외한 다른 기사들이 황제의 뒤를 따랐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계단에서 사라질 때까지 에르네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플로라 역시 멍하니 그가 사라지는 걸 바라보았다가, 에르네를 쳐다보았다.
오늘부터 자신을 이끌어 줄 대장이 된 에르네의 모습이 사뭇 다르게 보였다.
플로라가 몸에 힘을 주고, 정중하게 에르네에게 인사하자 그의 목소리가 머리에 울리기 시작했다.
<방으로 올라가서 얘기하지.>
플로라는 에르네를 따라 방으로 향했다.
처음 영입 제안을 받았던 그 방에 도착해 소파에 마주 보고 앉으니 느낌이 새로웠다. 에르네와 함께 있는 것은 처음도 그렇고 지금도, 여전히 알게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에르네가 빤히 플로라를 바라보다 말했다.
<숙소에 짐은 가져다 뒀나? 방은 불편한 점 없고?>
“네. 그렇습니다.”
다른 기사단과 마찬가지로 여명 기사단 역시 성별로 층을 나뉘어 방을 배정받았다.
플로라가 불편할 일은 없었다.
에르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단에 온 걸 환영한다. 아직 입단 시험을 제대로 치르지는 않았지만. 나와 대련한 적이 있으니…… 그걸로 대체하지.>
플로라는 에르네와의 대련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를 두려워하고, 싫어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존경하고 동경했다.
“여전히 부족함이 많으니 많이 가르쳐주십시오. 대련을 하다 제게 상처가 난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그렇게 하겠다.>
에르네의 말에 플로라가 옅게 웃었다.
이후로는 간단히 그녀가 해야 할 일에 대해 들었다.
신입이라고 하더라도 여명 기사단은 훈련에 집중하기보다는 실무에 집중하고 있었다.
정해진 훈련은 제국의 행사가 있을 때를 대비한 주기적인 단체 훈련과 오전, 오후로 나뉜 훈련뿐이었다. 그마저도 신입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근무 중인 기사단원들을 제외하고 모두 모인다고 했다.
여명 기사단에 들어와 새로운 일정을 전달받으니 계속해서 심장 한구석이 콩닥 뛰었다.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 느끼는 설렘 같은 것이었다.
<아, 그리고 경은 이 시간에 리비에르 님과 마력 훈련을 진행한다.>
에르네가 가리킨 일정표의 시간은 오찬이 끝난 직후였다.
<리비에르 님과도 상의를 마친 시각이야. 경이 마탑으로 가게 된다면 이목이 집중될 수 있으니, 리비에르 님께서 직접 방문하시기로 했다. 훈련은 우리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 방에서 진행될 거야.>
잠시 잊고 있었던 ‘마력’에 대해 상기하자 플로라는 막연한 두려움에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자신도 원하는 일이고, 기억을 찾는 것이 리비에르와 시몬에게도 도움이 될 일이라는 걸 알기에 플로라는 마음을 다잡았다.
시몬이 지난번 해주었던 이야기가 떠오른 탓이었다.
‘그가 제때 집으로 돌아갔더라면 적어도 눈 뜨고 코 베이는 일은 없었을 거야. 딸의 행방에 대한 실마리 정도는 붙잡을 수 있었겠지. 그래서 리비에르가 여전히 희망을 가지고 있다면, 나 역시 뭐라도 해주고 싶어. 그 사람의 오랜 쓸쓸함을 덜어줄 수 있다면. 뭐든.’
잔잔하던 마음 한구석에 파동이 일었다.
* * *
“고결하고 지혜로우신 제국의 대마법사 리비에르 님을 뵙습니다. 여명 기사단 소속 기사 플로라입니다.”
“이렇게 보니 새롭군. 플로라 경.”
“……오랜만에 뵙습니다.”
플로라가 방으로 들어온 리비에르를 향해 인사했다.
리비에르도 그녀를 바라보며 옅게 웃었다. 그녀의 은빛 머리칼을 보자 잠깐 심장 한구석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리비에르는 플로라와 눈이 마주치자, 천천히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 플로라도 마주 앉은 뒤에야 리비에르가 입을 열었다.
“잘 지냈나? 단복이 잘 어울리는군.”
“……네. 잘 지냈습니다.”
리비에르의 첫인상은 차갑고, 공허하고, 쓸쓸하고, 음울해 보였다. 입매는 꾹 다물려서 절대 웃지 않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그때보다는 훨씬 표정도 밝아진 듯 보였다.
“다시 봐도 신기하군.”
“무엇이 말입니까?”
“마력이 강한 사람은 선천적으로 체력이 약해. 하지만 경은 동시에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잖아.”
네이라에게도 들었던 적이 있었다.
플로라는 옅게 웃었다.
“그러게요.”
사실 지금의 플로라는 만들어진 존재였다. 처음부터 체력이 이리 강했던 건 아니었다. 어린 시절의 일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었다.
“뭐. 드물기는 해도 예외는 언제나 존재하는 법이니까. 제국의 마스터들도 그렇지 않은가.”
“…….”
“구사할 수 있는 마법이 있는가?”
구사할 수 있는 마법이라.
“아…… 배운 건 있는데 잘하지는 못해서.”
“괜찮네. 경에게 마법을 가르치려는 건 아니니. 잘하고 못하는 건 중요하지 않아.”
“손끝에 불을 피우는 걸 배운 적 있었어요.”
플로라가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 마법에 별로 좋은 기억은 없었다.
불신만 가득 차서 끝났지.
“한 번 해볼까?”
“……제어가 되지 않아요. 제대로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지난번 네이라 님 앞에서도 해보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어요.”
자신이 없었다.
“괜찮아. 날 믿고 다시 한번 해보자. 경이 불을 피운다고 해도, 이 방을 태워 먹는 일은 없게 할 테니.”
리비에르는 플로라가 두려워한다는 것을 깨닫고 달래주듯 재차 요구했다.
잠시 고민하던 플로라가 리비에르의 장난스러운 말에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이라가 말했던 대로 자신에게 마법을 가르쳐줬던 돌팔이 마법사가 사실은 유능했다면, 리비에르는 더 유능한 사람일 테니 충분히 믿을 수 있었다.
플로라가 그때처럼 마음을 평온하게 가다듬고, 온몸에 흐르고 있는 어떤 마력에 집중해보려 애썼다.
그렇게 손끝으로 무언가 뿜어져 나간다는 생각이 들 때였다.
“……아!”
화르륵, 하고 커다란 불씨가 피어올랐지만 이내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하지만 마법을 썼다는 것보다 자신 때문에 리비에르가 다칠 뻔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애초에 마법을 쓰지 못할 줄 알았기 때문에 거리가 가깝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리비에르 님! 괜찮으세요?”
하마터면 그의 손을 다치게 할 뻔했기에 플로라가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몸을 뒤로 빼고 있던 리비에르가 곧 플로라를 멍하니 올려봤다.
“마력이 굉장히 강하군. 응?”
그러더니 이내 씩 웃어 보인다. 플로라는 여전히 놀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그가 웃고 있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 괜찮아. 플로라 경.”
리비에르가 진정하라는 듯 손짓했고, 플로라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다시 소파에 앉으며 잔뜩 죄책감 어린 눈을 가지고 그를 살폈다.
“정말 괜찮아. 다친 곳 하나도 없어.”
“…….”
“그러니까 다시 해볼래?”
플로라가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못하겠어요.”
자신의 손에서 불이 뿜어져 나갔다. 그 일로 무고한 사람이 다칠 뻔했고.
해낼 줄 몰라서 시작한 일에 성공하자, 두려움이 물밀 듯 밀려들었다.
“할 수 있어. 플로라 경. 그리고 난 절대 다치지 않아.”
그의 지속된 요구에 플로라는 하는 수 없이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집중해봐.”
플로라는 리비에르의 말을 들으며 방금 전처럼 집중하려 했지만, 점점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만 핑 돌 뿐, 다시 마법이 발현되지는 않았다.
플로라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안 될 것 같아요.”
마력이 사라지기라도 한 걸까?
공허한 마음이 들었다.
리비에르는 주눅 든 플로라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방금 전 날 다치게 할 뻔했다는 두려움이 조금 남아 있는 것 같군. 내가 보기엔 집중을 하지 않았어.”
“……죄송합니다.”
“경이 죄송할 일은 아니지.”
플로라는 그럼에도 고개를 숙였다. 왠지 모를 죄책감이 밀려왔다.
“플로라 경. 이것 봐.”
곧 리비에르의 따뜻한 목소리가 들렸다.
플로라가 간신히 고개를 들고, 리비에르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