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에르네를 따라간 곳은 어제 플로라가 묵었던 옆방 침실이었다.
소파에 나란히 마주 앉은 후에야 에르네가 입을 열었다.
<어제 폐하께서 외출을 하셨나?>
아, 그동안 폐하가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신 거구나.
기사들이 돌아온 건 늦은 시각이고, 며칠 신경이 곤두서 있었을 터라 피곤할 것인데.
플로라는 에르네는 뼛속까지 근위대 같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반짝였다.
“어제 칸나 영애와 만찬을 즐기시고 나서, 잠시 정원에 들리셨습니다. 그 외에 외출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폐하를 본 사람은?>
“없었습니다.”
에르네가 플로라의 대답에 만족스럽다는 듯 설핏 풀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민한 야생의 늑대 같은 얼굴이 풀어질 때도 있다니.
그가 뿜어내는 살기 때문에 온몸에 소름이 돋던 때가 엊그제 일 같았는데,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신기했다.
여전히 그에게서 느껴지는 살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렴풋이 들었던 그의 삶과 태생을 생각해보면 이해하지 못할 것은 없었다.
반마족.
마수는 인간 세계를 정복하려 했지만 처참히 실패하고, 그의 우두머리까지 굴복당해 인간을 지키는 사역마로 전락해버렸으니. 인간을 향한 증오와 악감정이 클 터였다.
지금 역시도 끊임없이 마수와의 차원의 결계가 생기고 있는 걸 보면, 언제든 인간 세계로 침범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을 것이었다.
태생부터 인간을 증오하던 존재와 인간이 만나 길러진 아이.
그리고 인간에게도 버림받고, 마족에게도 환대받지 못한 사람.
매일 같이 마주하는 사람들을 경계하고, 의심하고, 살기를 내뿜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거기에서부터 오지 않았을까.
에르네의 삶을 이해하고 나니, 오히려 그의 살기가 두렵지 않고 안쓰럽기까지 했다.
<내게 무슨 할 말이 있나?>
그의 과거는 어땠을까 생각하며 측은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에르네가 불쾌하다는 듯 얼굴을 찡그린 채 물었다.
“아, 아닙니다.”
<날 무슨 길에서 주워 온 짐승처럼 바라보고 있었는데.>
“……다른 생각을 좀 하고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플로라가 가볍게 묵례하며 사과하자, 에르네가 흐음, 하고 숨을 길게 내쉬다가 이내 다른 주제로 말을 돌렸다.
<경은 만약 근위대로 올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나?>
“……네? 정말입니까?”
<질문한 거야.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냐고.>
플로라가 자신이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반색하자 에르네가 그녀를 꾸짖었다.
그럼에도 플로라는 주눅 들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꿈꿔왔던 일이었다. 이 하네칸의 성에 발을 들여, 시몬에게 거둬졌을 때부터 염원하던 것이었다.
“저는 하네칸의 기사입니다. 충성을 맹세한 군주 곁을 지키는 일은 제 삶의 가장 큰 영광이 될 것입니다. 그럴 기회가 있다면, 마다하지 않을 거고요.”
<나는 여전히 경을 다 믿지 않아.>
“…….”
<하지만 폐하께서도 센칸의 일로 경을 걱정하시고, 또 경도 그럴 것 같아서 말이야. 경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폐하께서 자책하실 것 같거든.>
심장이 쿵쿵 뛰었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눈만 굴리며 마른 침을 삼켰다.
<그렇다고 근위대들을 보내 기사인 경을 계속해서 호위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눈에 보이는 곳에 가까이 두면 위험이 좀 덜할 거라 생각한다.>
“…….”
<경이 해야 할 일들도 근위대에선 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것 같군.>
“에르네 님, 그 말은…….”
<경을 근위대로 영입하고 싶다.>
에르네는 플로라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귀찮은 듯한 얼굴이었지만, 눈빛은 한없이 진지하기만 했다.
플로라는 멍하니 그 눈을 마주하다가 짧게 심호흡했다.
바라왔던 일이 현실에 닥치니 눈앞이 새하얘진 탓이었다.
“일단…… 카신 단장님과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독단적으로 판단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카신 단장에게는 얼추 이야기 해두었는데.>
“…….”
<경에게 아무 말 않던가?>
“네…….”
<뭐. 기사 대회가 끝날 기점에 얘기해보자고 했으니, 모른 척하고 있었을 수도 있겠군.>
카신이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다 안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에게 그때 이런 말도 했던 것일까.
<카신 단장은 경의 선택에 맡기겠다고 했다. 가서 얘기해보고, 대답이 정해지면 날 찾아와.>
“……알겠습니다.”
폭탄 발언에 머리가 얼얼할 지경이었다.
에르네와의 대화가 끝나고 기사단으로 돌아온 플로라는 곧장 카신을 먼저 찾았다.
늦은 시각이었는데도, 카신은 여전히 단장실을 지키고 있었다.
“플로라 경.”
피로와 예민으로 겹겹이 쌓인 듯한 표정이 플로라와 마주하자 버터처럼 사르르 녹아내렸다.
“안 그래도 내가 데리러 가야 하나 생각하던 참이었어.”
“……별일 없으셨습니까? 단장님.”
“그래. 사냥 대회에서 우리 기사단이 우승도 했는걸.”
“다행입니다.”
플로라는 피곤해 보이는 것만 빼면 모든 면에서 멀쩡해 보이는 카신의 모습에 안도했다.
“……경은 다쳤다고 들었다. 심한 부상인가? 지금은?”
“지금은 괜찮습니다.”
“다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면서, 또.”
카신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이란 걸 알면서도 했던 것뿐이었으니, 그걸로 깊게 질책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눈에 보이는 플로라의 모습이 꽤나 멀쩡한 것 같으니 다행이었다.
“앉아. 앉아서 얘기하자.”
카신은 플로라에게 소파에 앉길 권유하고, 자신도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항상 단장실 안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이 없으니 어쩐지 분위기가 달라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주변을 빙 둘러 훑어보다가, 카신을 바라보자 그가 자신을 꼼꼼히 살피고 있는 것이 보였다. 걱정이 담긴 눈이었다.
“단장님, 저 괜찮습니다.”
“……그렇겠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서도 괜찮다고 하는 녀석인데.”
카신이 불퉁하게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플로라가 머쓱해하며 옅게 웃자, 카신도 곧 덩달아 미소 지었다.
“며칠 전에 막사에 나눴던 얘기에 대해서 더 나누고 싶어요.”
플로라는 머뭇거리다가 먼저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에르네의 영입 소식도 있지만, 그와 이야기를 나눈 후부터 계속 미안하고 찝찝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꼭 나누게 될 대화였다.
플로라의 말에 카신이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그 일로 다른 감정을 품은 건 없다. 폐하의 명령이 있었으니 경은 지켜야 했을 뿐이야.”
“그래도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듣자 하니 쉽게 남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말이 아니더군. 괜찮아.”
“…….”
“에르네나 폐하께 혹시 얘길 들었어?”
“네?”
“경을 여명 기사단으로 데려가고 싶다는군.”
카신은 최대한 무던한 목소리로 말하려 애썼지만, 그 목소리 끝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표정 관리도 잘되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 플로라는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잠시 당황하며 눈을 굴리던 플로라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경은 어떤 대답을 했나?”
“단장님과 이야기해보겠다고 했습니다.”
“난 경의 생각이 중요하다.”
“왜 미리 말씀해주지 않으셨습니까?”
“그럴 시간이 없기도 했고.”
“…….”
“등 떠미는 것 같아서.”
카신의 중얼거림에 잠시 눈을 내리깔았던 플로라가, 다시 그를 보았다.
“네?”
그의 얼굴이 어딘지 씁쓸해 보였다.
“내가 먼저 말하면 이곳에서 내보낸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잖아.”
“…….”
“난 경을 보내고 싶지 않거든.”
자신의 손가락을 무의미하게 만지작거리던 카신은 슬쩍 플로라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과 말투, 목소리의 높낮이가 미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플로라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카신의 짧은 한숨이 이어졌다.
“에르네 단장의 제안이 끝났다면, 이제 내가 제안할 차례인가?”
“…….”
“여명 기사단으로 가지 말고 이곳에 남는 건 어떻겠나. 경의 편의와 안전을 위해 노력해보겠다. 여명 기사단 또는 폐하께서 경을 필요로 할 일이 있으면 보내주기도 할 거야. 다만 소속은 이 백기사단에 있는 거지.”
아쉬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플로라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인간에 대한 정과 기대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던 자신이 이제 감정 하나 때문에 대답을 망설이고 있다는 것이 참 신기했다.
카신에게는 미안하지만 플로라는 여명 기사단으로 가고 싶었다.
물론 여기가 싫어서는 아니었다. 이곳에 남는 것도 훌륭한 선택이겠지만, 시몬의 가까이서 그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