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바라는 게 없다면서 자꾸 욕심내고, 이런 거로 상처받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몰라도, 외사랑 주제에 너무 주제넘은 생각을 하고 있다.
플로라는 응접실 너머에서 이따금 들려오는 칸나의 구슬처럼 청아한 목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렇게 그녀 스스로에게만 억겁의 시간이 지났다.
문이 열리고 시몬과 칸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플로라는 곧장 눈을 내려 그들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어떤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은 눈으로 보지 않아도 그녀의 기분을 척척하게 만들었다.
시몬은 칸나를 황제의 성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그 길을 따르며 플로라는 어쩐지 시몬이 하염없이 멀게만 느껴져서, 어떤 말도 먼저 걸 수가 없어졌다.
이 잠깐 사이에 다시금 벌어진 그와의 거리가 이제는 절대 좁힐 수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사람이었지.
제국의 황제였지.
알고 있었으면서도 몰랐던 것처럼 마음에 먹구름이 가득했다.
칸나가 떠날 때까지 기다렸던 시몬이 플로라와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정원에 들렀다 가자. 플로라 경만 따르도록.”
“……예. 폐하.”
플로라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정신을 차리곤, 재빨리 그 뒤를 따랐다.
이미 와본 적 있긴 했지만 그와 함께일 때는 여전히 색다르게만 느껴졌다.
꽃은 거의 지고, 싱그러운 잎사귀만 남은 채였지만 그래도 곳곳에 남아 있는 알록달록한 빛의 꽃잎이 마음을 달큼하게 적셔 주었다.
“꽃이 다 져버렸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시몬이 플로라를 돌아보았다.
“플로라.”
“……네. 시몬.”
“서쪽 지방에 여름이 되면 만개하는 예쁜 꽃들이 있어. 거긴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정말 예뻐.”
플로라는 본 적 없는 광경이었지만, 잠시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 보았다.
“그렇겠네요.”
알록달록하고 풍성한 꽃들로 물든 여름이라니, 꽤 멋졌다.
“그곳은 만개한 꽃들 덕분에 여름에 축제도 많아.”
“…….”
“그 계절에, 그곳에서 너와 함께하고 싶어.”
플로라는 자신이 무얼 들은 건지 잠시 의심하다가 숨을 삼켰다.
왜? 왜 제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빠르게 뛰던 심장이 일순 멈췄다가 거대한 종을 치듯 둥, 둥 울렸다.
“건국제 일정이 끝나면 나랑 같이 꽃 보러 갈래?”
“……네?”
“아직 멀긴 했지만, 그때가 되면 여유가 생길 것 같아서.”
플로라는 멍했다.
심장이 아플 정도로 뛰고, 그래서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던 플로라는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를 냈다.
“좋아요.”
늘 그렇듯 이번에도 대답뿐이었다. 왜 함께 꽃을 보자고 했는지, 왜 그 계절을 함께 보내고 싶다고 한 건지 저의는 묻지 않았다.
“약속한 거야. 잊으면 안 돼.”
“……그럴게요.”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떨리는 마음을 억지로 감추느라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왜, 이런 말을 제게…… 싶으면서도 두려워서 묻고 싶지 않았다.
플로라는 그저 아무것도 모른 채, 그 계절을 기다리며 설레고만 싶었다.
* * *
어둠이 내려앉은 밤, 술에 잔뜩 취한 남자가 비틀거리며 길을 걸었다.
그의 손에는 반쯤 채워져 넘실거리는 술병이 들려 있었는데, 만취한 채로도 술이 모자란다는 듯 그것을 벌컥벌컥 마시며 목적지를 향해 앞만 보고 걸었다.
자박자박. 돌멩이와 흙이 뒤섞여 밟히는 소리가 공중을 가득 메웠다. 자신이 걷는 소리에 묻힌 것인지, 아니면 취한 상태라 주변 소리에 민감하지 않은 것인지, 누군가 뒤따라오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였다.
사삭. 따라붙은 이가 한 뼘 거리까지 와서야,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남자가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괴한이 무언가를 휘둘렀다. 남자는 간신히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던져 막는 듯했지만, 상대의 힘에 결국 균형을 잃고 바닥에 넘어졌다.
“뭐…… 뭐야? 너!”
사위가 어두운 데다 로브까지 쓰고 있어 괴한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말을 더듬으며 큰소리를 냈다. 누군가 들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지만, 길가엔 아무도 없었다.
“수도는 어느 방향이지?”
남자가 앉은 채로 뒷걸음질 치자, 그를 빤히 보던 괴한이 물었다.
“……뭐?”
“하네칸의 수도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냐고 물었어.”
“수, 수도는 여기서 먼데.”
“방향은?”
“이, 이쪽 길을 따라가다 보면…….”
남자가 반사적으로 수도로 가는 방향을 가리키며 마른침을 삼켰다. 괴한이 고개를 돌린 틈을 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는 죽기 살기로 도망쳤다.
올라왔던 취기가 사라지고 점점 정신이 또렷해지는 것 같았지만, 몸은 그렇지 않은 모양인지 마음만큼 따라주지 않았다.
“헉, 헉…… 으, 으악!”
그래도 꽤 멀어졌다고 생각했는데, 힐끗 뒤를 돌아본 순간 남자는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로브를 입은 남자가 엄청난 속도로 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체구는 자신보다 훨씬 작으면서, 달리는 속도와 힘은 월등했다. 꼭 인간이 아닌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설마, 마수라도 되는 걸까. 마수가 하네칸에 침입한 것일까!
괴한에게 이번에 붙들리면 목숨을 잃을 거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남자의 생존본능이 뜀박질을 멈출 수 없게끔 했다.
두려움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심장이 터질 듯 뛰어 다시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가면 집이야. 마을이 나오니, 소리를 지르면 사람들이 나올 수도 있어. 조금만 더…….
“으아! 악!”
그러나 남자의 간절함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먹이를 보고 질주하는 산짐승에게서 도망칠 재간은 없었다.
뒤에서부터 덮쳐오는 묵직한 체구에 남자는 다시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팔과 다리를 허우적거리며 있는 힘껏 반항했지만, 싸움이라곤 어릴 적 친구들과 해본 것이 전부인 남자가 흉기를 든 괴한을 이길 수는 없었다.
퍼억. 둔탁한 몽둥이가 어깨를 가격하자, 으스러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밀려드는 고통에 남자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재빨리 남자의 위로 올라탄 괴한이 그의 입을 틀어막아 소리를 차단했다.
남자는 괴한의 얼굴을 그제야 마주할 수 있었다.
짐승도, 마수도 아닌 사람이었다. 꼬불거리는 금발에 광채가 이는 파란색 눈동자.
뭐가 즐거운지 그는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이런 기괴한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호감형으로 보였을 외모가 섬뜩하게만 느껴졌다.
“하아. 이번…… 밤은 새롭군.”
그의 붉은 입술 사이로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다, 당신…… 뭐, 윽, 뭐야.”
남자는 잘 듣지 못해 눈살을 찌푸리고 다시 귀를 기울였다가 두려움에 덜덜 떨며 물었다.
“나는 그대들의 신. 모든 이의 신.”
괴한이 여유롭게 답하며 씩 웃었다.
퍼억. 퍽.
이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게끔, 턱뼈가 으스러질 것처럼 강한 힘으로 입을 틀어막은 괴한이 무자비하게 흉기를 휘둘렀다. 남자는 무차별적 공격에 맥없이 늘어졌다.
잔인한 소리가 폭풍처럼 지나가고, 괴한이 몸을 비틀비틀 일으켰다. 그 역시 체구가 큰 남자를 처리하는 데에 많은 힘을 썼다는 듯 거친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
곧 축 늘어진 시체의 발을 붙든 괴한은 그것을 질질 끌며 왼편으로 나 있는 산길로 향했다.
“공기가 좋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입으로 휘파람 소리를 내면서.
“좋은 곳에 있구나. 플로라.”
그렇게 이슥한 밤이 흐르고 있었다.
* * *
기사들은 때맞춰 돌아왔다. 별 탈 없이 무사히 귀환한 에르네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플로라의 마음도 안정되었다. 그에게서 별말이 없다는 것은, 다른 기사단의 기사들도 무사하다는 뜻일 테니 말이다.
플로라는 이제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녀는 여명 기사단이 아니니까.
<플로라 경은 가기 전에 잠깐 나 좀 보지.>
플로라는 에르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시몬을 보았다.
“잠시나마 폐하를 모실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또 봐. 플로라.”
시몬은 언제 오늘 저녁에 폭탄선언을 했냐는 듯, 생글 웃으며 플로라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다음을 기약해도 아쉬운 것은 자신뿐인 것 같아 어쩐지 마음이 아릿했다.
그래도 겨우 감정을 숨긴 채, 그녀는 에르네를 따라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