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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73)화 (73/154)

73.

시몬은 침실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식사도, 티타임도, 업무도 모두 침실에서 해결했다.

시종이 가져다준 업무는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와 하루 종일 함께 있다 보니, 얼마나 바쁜 사람인지 격하게 체감되었다.

금테로 된 안경을 쓴 채, 오랜 시간 미동도 없이 앉아서 서류를 읽어 내리는 시몬의 미간은 좀체 올곧게 펴질 줄 몰랐다. 

이러다 사람이 망부석이 되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오랜 시간 글자에만 집중하고 있던 시몬이 고개를 든 것은 칸나 영애와의 약속 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무렵이었다.

아무 말 없이 고요한 방에 장시간 있으려니, 심심하기도 하고 쓸데없는 사색에 잠기기도 했지만, 혹여 불시에 위협이 찾아올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며 정신을 바짝 죄려 노력했다. 

잠시뿐이지만 황제의 침실에서 그를 호위하는 일을 맡게 된 건 영광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기회였다.

시몬의 안전을 가까이서 살필 수 있다는 점은 그녀의 마음에 큰 평안을 주었다. 할 수 있다면 언제 어디서든 그의 안위를 가장 먼저 알 수 있는, 이 여명 기사단에 들어오고 싶단 생각만 늘어가는 시간이었다.

“이만 갈까?”

“……예.”

시종들과 외출 채비를 하고 나온 시몬을 물끄러미 보았다가, 작게 대답했다.

잔뜩 흐트러진 듯 보였던 모습은 어느새 말끔해져 있었다. 타오르는 주홍빛 눈동자가 조금 더 반짝이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플로라는 앞서 걷는 시몬의 뒤를 따랐다.

여명 기사단 역시 최소 인원을 제외하고는 사냥 대회에 나가 있는 데다, 황제의 노출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기사는 플로라를 포함한 세 명이 전부였다. 다른 여명 기사단들과 함께 그의 뒤를 따르자 가슴 한구석이 웅장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리는 걷기에 불편하지 않나?”

“괜찮습니다.”

응접실에 들어가기 전, 시몬이 멈칫하며 플로라에게 걱정 어린 질문을 건넸다. 이든의 치유를 받아 그런지는 몰라도 미약한 통증만 남아 있을 뿐 움직이는 데에 지장은 없었다.

시몬은 고개를 끄덕이곤, 앞에서 대기하란 명령을 했다. 응접실 안까지 따라 들어가야 하는 것인가 생각했던 플로라는 왠지 모를 아쉬움을 느꼈다.

“하지만 폐하…….”

“누군가 있으면 칸나가 대화를 불편해할 거야. 앞에서 대기해.”

다른 기사가 나서서 시몬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려 했지만, 시몬은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거절했다. 다정한 목소리로 다른 여인의 이름을 부르고, 또 그녀를 생각해주는 모습에 속이 가시에 찔린 것처럼 따끔거렸다. 그러나 플로라는 내색하지 않으며 그저 굳은 표정으로 시몬을 향해 정중히 인사했다.

그렇게 고개를 들었을 때, 활짝 열렸다가 도로 닫히는 문 사이로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주점에서 시몬에게 안겼던 여인과는 또 다르게 생긴 미인이었다. 저 영애는 태생이 고귀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다.

스치듯 잠깐 보았음에도, 뇌리에 박혀 문이 완전히 닫히고 나서도 생생하게 눈앞에 그 자태가 그려졌다. 고개를 숙일 때 찰랑거리는 금발의 머리칼과 시몬을 향해 환히 웃는 미소, 우아한 손짓과 화려한 치장, 그 어떤 봄의 빛깔보다도 싱그러워 보이는 연두색의 선한 눈동자까지.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플로라는 자신과 칸나 영애와의 거리를 완벽히 느꼈다.

* * *

“그래서…… 갑자기 찾아온 이유가 뭐야? 황성의 요리를 먹고 싶었던 건 아닐 테고.”

간단히 만찬을 끝내고 난 뒤, 티타임이 시작되고 나서야 시몬이 물었다. 재잘재잘 일상적인 얘기나 과거 이야기만 늘어놓던 칸나도 그제야 사뭇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지난번 나눴던 이야기에 대해 재차 확인받으려고요. 폐하.”

“무슨 확인이 필요하지?”

“정말 마음에 두신 여인이 있는 건가요?”

“……그렇다고 했잖아.”

시몬은 또랑또랑하게 묻는 칸나의 말에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드러낸다는 건 좀 어색하기도 하고, 수줍기도 했다. 특히 이런 이성적인 이야기에 관해서는 더더욱. 시몬의 표정을 살피던 칸나가 짓궂게 웃었다.

“그럼 정말 혼인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거겠죠? 저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갑자기 뒤통수를 치신다거나…….”

“그럴 일 없어. 맹세하지. 서약서라도 써줄까?”

“아니요. 거기까지는…….”

“네게도 이미 정인이 있다면서. 누구 인생을 망치려고.”

칸나가 시몬의 대답이 만족스럽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근데 그자와는 어떻게 할 생각인데? 공작이 타국의 사람을 받아들일 리도 없고.”

“지금 절 걱정해주시는 건가요?”

“갑자기 감동받은 그런 표정은 뭐야? 그럼 걱정이 안 되겠어? 공작이 어떤 사람인지 뻔히 아는데. 널 어떻게 못살게 구는지도 알 것 같고…….”

“그 일 때문에 찾아온 것도 있어요.”

칸나가 눈을 부릅떴다. 싱그러운 연둣빛의 눈동자가 맑다.

괜한 스산함을 느낀 시몬이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네가 그런 표정 짓는 게 왜 이리 불안하지?”

“친구로서 편히 말 좀 해도 되겠습니까?”

시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편히 하라 했을 뿐인데, 의자에 앉은 자세까지 편히 바꾼 칸나가 숨통이 트인다는 듯 한숨을 폭 내쉬었다.

“둘이 있을 땐 그냥 편하게 말해도 된대도.”

“다른 애들도 다 그렇게 해?”

“……아니.”

“그 말 되게 불편하거든? 그래도 넌 우리 제국의 황제인데.”

“…….”

“설마, 네가 마음에 품었다는 그 여인에게도 그런 쉰 소리를 한 건 아니겠지.”

“하지만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게 듣기 좋던걸.”

“와, 그 여자는 네 이름을 부를 때마다 명줄이 깎이는 기분이 들겠다.”

칸나가 히죽거리다 제 뺨을 가볍게 내리쳤다.

“아, 대화가 또 산으로 갔네. 그게 아니라…….”

다시 결의에 찬 표정에 시몬은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싶어 잠자코 다음 말을 기다려주었다.

“나 도망갈까 봐.”

“……뭐?”

무어라 더 말해야 할 것 같은데 말문이 막혀 버렸다.

“뭐 이런 폭탄 발언을 나한테 해?”

“그럼 내가 너 말고 누구한테 해?”

“……진짜.”

기가 막힌다는 듯 시몬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렇게 좋은 거야?”

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서 어린 시절의 모습이 비쳐 보이는 듯했다. 자신을 좋아한다고 수줍게 말했을 때처럼 딱 사랑에 빠진 얼굴이었다.

칸나와의 혼인 이야기가 다시 수면 위로 떠 올랐을 때, 만에 하나 다시 그녀에게 상처를 주게 되면 어쩌나 했는데…… 마침 그녀에게도 정인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잘 된 한편으론, 친한 친구로서 그녀가 걱정되기도 했다.

타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다 만난 남자. 귀족인 것은 맞지만 칸나를 황후로 만들 계획을 꿈꾸고 있던 공작에게는 성에 차지 않을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날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사람이야. 놓치면 후회할 거야.”

“…….”

“더 이상 아버지에게 휘둘리고 싶지도 않고. 내가 황후가 된다면 평생 휘둘리며 살아야겠지…….”

공작은 칸나와 시몬의 약혼이 깨진 뒤, 등 떠밀 듯 그녀를 타국으로 내몰았지만 그건 몹시 잘못된 선택이었다. 하네칸의 새장에서 벗어난 칸나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세상을 더 넓게 보는 눈을 키웠다.

그녀라면 분명 좋은 사람을 선택했으리라, 그건 의심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도망’이라니.

공작이 그녀를 가만둘 리 없지 않은가.

“당분간은 너와 데이트를 착실히 할 생각이야. 아버지가 의심하지 않도록.”

누구 맘대로? 시몬은 미간을 좁힌 채 칸나를 바라보았다.

“예전에 네가 날 이용했듯, 이제 나도 그러고 싶어.”

“…….”

“날 도와주면 떠날 때 선물을 줄게. 네게 훌륭한 선물이 될 거야.”

“……그게 뭔데?”

“미리 말해주면 재미없잖아.”

“뭔지 알아야 그 연극에 좀 흥미가 생길 것 같은데.”

시몬이 물러서지 않자, 칸나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아버지의 약점.”

시몬은 칸나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결심이 얼마나 확고한 것인지 그 말 하나로도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약점이라면…….”

“네 마음대로 우리 가문을 무너뜨릴 수도, 손에 쥐고 흔들 수도 있을 거야.”

칸나의 목소리가 갈수록 진지해졌다.

약점을 이야기하자 그녀의 안색도 확연히 어두워진 듯 보였다. 시답지도 않은 소리는 아닌 것 같았기에 시몬도 흥미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도 되는 건가?”

“거래가 목적이 아니어도, 난 네게 이 얘길 해줬을 거야.”

“…….”

“나쁜 건 나쁜 거니까.”

칸나가 이를 악물었다. 시몬은 무어라 말을 더 붙이고 싶었지만, 조건을 내걸었으니 이 ‘약점’에 대해 듣기 위해서는 그녀의 손을 맞잡을 수밖에 없었다.

“어때? 좀 흥미가 생겼어?”

시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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