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그렇게 위험을 감수해서까지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하는 건 잘 알겠다.
아이든이 날뛸수록 플로라의 마음에도 분노와 증오가 쌓여 간다는 걸 알아야 할 텐데.
플로라는 다시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실험에 한 번 성공했으니, 계속해서 그런 돌연변이를 만들어낼 겁니다.”
“이제야 좀 실감이 되긴 해. 그 쥐새끼들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건지.”
시몬이 차갑게 눈을 빛냈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전부터 그의 얼굴에 근심이 많아 보였다.
괜히 마음이 쓰이는 탓에 플로라가 시몬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그의 상태를 살폈다.
“그가 어떤 힘을 쓸 수 있는지 보았나? 마수처럼 모습을 바꾸기라도 해?”
“아직 거기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칼을 맞부딪칠 때의 힘은 엄청났어요.”
무력으로만 부딪쳤다면 플로라의 몸은 이미 두 동강이 났을지도 모른다.
아직 가시지 않은 전투의 잔상을 떠올리며 플로라가 설핏 몸을 떨었다.
“일단 에르네는 사냥 대회로 돌아가서 상황을 살피도록 해.”
<그럼 다른 근위대 기사를…….>
“플로라가 있어 주겠지. 상태를 보니 좀 쉬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에르네는 시몬의 명령에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는 방을 빠져나가기 전 플로라에게 명령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경이 폐하를 지켜라.>
폐하를…… 지키라고.
그것이 그녀에게 내린 첫 번째 임무라는 것도 모른 채, 플로라는 그저 눈을 크게 뜨고 놀란 듯 에르네를 올려다보았다.
대답을 들으려고 한 말은 아닌 모양인지 에르네는 방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폐하를 지키는 것은 플로라의 사명이었으나, 어쩐지 진짜 단둘이 이 공간에서 그를 호위한다는 생각을 하니 괜스레 가슴에 돌덩이를 얹은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여전히 삐딱하게 앉은 채 사색에 잠겨 있던 시몬이 플로라를 보았다.
“에르네가 뭐라 했든 오늘은 편히 쉬어. 그러라고 붙잡아두는 거니까.”
“폐하. 저는 괜찮…….”
“많이 다쳤어.”
시몬은 심드렁히 대꾸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반사적으로 플로라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시몬을 따르려 하자, 그가 걸음을 멈추고 몸을 틀었다.
“앉아 있어. 옆에서 옷 갈아입고 오려는 거니까.”
“……아, 네.”
플로라는 결국 자리로 되돌아가 앉았다.
시간이 지나고, 시몬은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채 플로라가 있는 곳에 나타났다.
“갑갑해 죽는 줄 알았네. 보기엔 예뻐도 엄청 불편해.”
본인도 예쁜 걸 아는 모양인지, 그리 말하며 자리에 앉는 모습이 퍽 고고했다.
플로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은 좀 진정됐어?”
“폐하 덕분에요.”
“누워서 좀 쉴래?”
“아, 괜찮습니다.”
플로라가 기겁하며 고개를 가로젓자, 시몬이 픽 웃었다.
방에 침묵이 감돌자, 괜한 긴장감이 들었다.
센칸의 습격과 아이든의 기이한 실험이 성공했다는 충격에서 벗어나고 보니, 시몬이 자신을 끌어안았던 일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때도 심장이 거칠게 뛰긴 했지만 이성적인 감정으로는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가만히 시몬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속에서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정말 제대로 걸렸구나.
플로라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기사단에서 소문을 듣다 보면, 별별 이야기가 다 들려오곤 한다.
여자들을 닥치는 대로 꾀고 여지를 주면서 정작 연애는 하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여자들은 안 될 걸 알면서도 그 남자를 좋아하게 된다고 했던가.
지금 플로라가 딱 그 짝이 된 것 같았다.
“이든과는 어떤 사이지?”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을 때, 시몬의 말이 들려왔다.
이 무거운 침묵이 깨진 것은 좋으나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에 플로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음…… 어떤 관계라고 정의해야 한다면 친구인 쪽이 가까울 것 같아요.”
“이제는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모양이군.”
플로라는 예전에 시몬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어렴풋이 웃었다.
그때는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 있어서 누군가를 제멋대로 ‘친구’라고 말하지 못했었다.
시몬 덕분에 용기도 생기고, 점점 타인을 향해 마음을 다시 열게 되었던 것 같다.
플로라의 어렴풋한 웃음을 본 시몬은 괜히 심통이 나기 시작했다.
저를 향한 고마움이 담긴 미소인 줄도 모르고, 그저 이든을 떠올리며 웃는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카신과는……?”
카신에게는 선물도 주고. 이든에게는 선물도 받고.
도대체 어느 쪽이 더 가까운 사이라는 거야?
시몬은 답답함을 내리누르고, 겨우 플로라에게 물었다.
플로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민하는 듯하다 대답했다.
“대장으로 모시고 있는 존경하는 기사님과 부하 사이죠.”
카신과는 정말 ‘친구’는 아니었으니. 플로라의 대답에 시몬은 점점 답답함만 쌓여 갔다.
“그뿐만은 아닌 것 같던데.”
“……어떤 면을 보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에게 선물을 줬잖아.”
“아, 네?”
말끝을 흐렸던 플로라가 ‘폐하가 그걸 어떻게 아세요?’ 하는 얼굴로 묻자, 시몬이 눈을 피하며 대답했다.
“저번에 봤어. 네가 준 선물이라고 어떤 상자를 들고 다니더라고.”
“아, 아…… 그거요. 대장님과 내기를 해서 나눈 선물입니다. 대장님께서는 제게 이 활을 주셨고요.”
플로라는 자신의 옆에 놓인 활을 매만지며 웃었다.
시몬이 물끄러미 활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제 질문의 의도를 전혀 모르는 것 같아 속이 꽉 막혔다.
알아주길 바란다고 더 표현해봤자 괜히 이상한 사람만 될 것 같고, 플로라의 마음이 자신과 같은 마음일 거라고 확신할 수 없으니 조심스러웠다.
막상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말을 하기 망설여지니, 시몬은 스스로에게 화도 났다.
플로라와 이런 친한 사이조차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녀가 부담을 느낀다면?
시몬은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기에 플로라에게 먼저 다가가기가 어려웠다.
언제 마음을 인정하게 되었는가. 그렇게 정의하면 잘 모르겠다.
이제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 또한 그의 마음을 알 정도로 커져 버렸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전에는 혼란스러워하면서도 꼭꼭 숨길 수 있는 처지였는데. 이젠 그게 버거웠다.
감정을 숨기는 훈련은 아카데미에서부터 착실히 받아왔고, 지금도 훌륭히 해낸다고 생각했는데 플로라의 일과 관련되면 무용지물이 되었다.
시몬은 사냥 대회 때를 떠올렸다.
저도 모르게 말보다 몸이 먼저 튀어 나가던 때.
플로라를 미끼로 삼아, 출전시키리라 마음먹었었는데.
결국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견딜 수 없는 불안감에 직접 몸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보기 불편해.”
시몬은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내뱉었다.
“마음이. 불편해.”
그 말에 분위기가 살짝 가라앉았다. 플로라의 눈은 둥그렇게 뜨여 있었다.
자신이 무얼 잘못한 건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아…… 저…….”
불안한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시몬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플로라는 실제로 황제가 ‘불편’하다고 한 말에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중이었다.
무엇이 불편하다는 걸까?
‘카신과 선물을 주고받은 일이? 아니면 그냥 지금 내가 보기 불편하시다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명확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불편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왜 마음이 불편한 건지는 묻지 않아?”
이어진 시몬의 물음에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되물어주길 바라는 마음에 한 말일까?
그에게 어떤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두려웠다. 플로라가 꾹꾹 참아낸 질문만 해도 벌써 수없이 많았다.
허튼 질문을 하고, 마음을 내비쳤다가 괜히 사이가 소원해지면 마음 다치는 건 그녀 자신이었으니까.
솔직히 그가 ‘불편’하다고 했을 때, 카신과 이든 그리고 자신의 사이가 불편한 거라면? 그건 이성적인 감정 때문일까? 하고 살짝 기대를 품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건 헛된 망상이었다. 자신을 거둬준 황제에게 실수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앞에선 겁쟁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시몬의 말과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그가 하는 모든 말의 의미를 궁금해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자신이 실수할까 봐, 그래서 시몬과 멀어질까 봐 참는 것뿐이었다.
혼자 끙끙 앓더라도 되도록 오래 시몬의 곁에 머물고 싶었다.
“이든이나 카신과 네가 같이 있는 걸 보면 마음이 불편해. 플로라.”
쐐기를 박듯 이어지는 말은 어쩐지 짓궂게 들렸다.
왜 불편하세요? 하고 물어봐 주길 바라는 마음을 노골적으로 내비치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채고 시험하려는 것은 아닐까?
플로라는 고민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그리고 머뭇거리다 입을 열기 위해 밭은 숨을 내뱉었던 찰나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정적이 깨졌다. 어쩐지 뜨겁게 느껴졌던 시몬의 시선 또한 거둬졌다.
플로라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자, 밖에 있던 근위대 기사가 작은 편지를 한 통 건넸다.
“마르웰 가의 칸나 영애께서 보내신 서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