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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70)화 (70/154)

70.

“그런 죄책감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

“저로 인해 시작된 일 아닙니까. 그러니 제가 끝내는 게…….”

“혼자 모든 걸 감당할 필요는 없어. 플로라.”

“폐하.”

“널 제국에 들였고, 믿기로 선택한 건 나다. 그 선택을 했을 때 이미 함께 감당하기로 한 일이이야.”

플로라는 시몬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 한결 확고한 의지가 들어찬 것처럼 보였다.

시선을 빤히 마주하던 플로라는 이내 옅게 웃었다. 지금은 그의 얼굴을 다시 한번 볼 수 있음에 감사하기로 했다. 시몬은 또다시 자신을 구해주었다. 그것만 생각해야지.

“감사합니다, 폐하.”

플로라의 웃음 때문인지 두려움에 휩쓸려 딱딱하게 굳은 시몬의 표정도 한결 부드럽게 변했다.

“걸을 수 있겠어?”

그의 다정한 말에 플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한 부상은 없습니다.”

“얼른 성으로 돌아가자.”

“그런데 에르네 님이…….”

“에르네는 걱정할 것 없다.”

하지만 찜찜한 마음을 거둘 수 없었다. 파르베는 그냥 단순한 센칸의 ‘첩자’가 아니었다. 그 동공과 이질적으로 변해버린 피부까지…… 모든 것이 이상했다.

“하지만…….”

플로라는 절뚝거리며 천천히 시몬을 따라가다가, 역시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걸음을 멈췄다. 

에르네가 위험할지도 모른다. 그는 폐하를 지켜야 할 사람인데…… 어째서…….

“역시 안 되겠습니다. 폐하. 그를 죽여야 해요. 아니면 에르네 님이…….”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시몬의 걱정은 좋으나, 이건 자신이 해결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모두가 그저 자신 때문에 이 일에 휘말렸다는 죄책감을 내려놓기가 힘들었다.

“그놈을 죽이는 것에는 동의한다만, 그게 지금은 아니다.”

“…….”

“에르네는 괜찮을 거야. 플로라. 우선 네 상태부터. 응?”

플로라는 확고한 시몬의 말에 다시 끌려가듯 걸음을 옮겼다.

한 번도 가깝다고 생각한 적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무사했으면…….

플로라는 파르베의 말을 떠올렸다.

소중한 것들은 모두 죽이겠다는 말…….

아마 시몬이 이곳에 있다는 것도 보았겠지. 그렇다면 그의 타깃에 정말 ‘황제’가 포함될지도 모른다.

오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자, 머릿속이 패닉 상태가 되어 하얬다.

아아. 시몬만큼은 지켜야 하는데…….

시몬을 건드릴 순 없어. 그 누구든. 절대.

“플로라.”

플로라가 반쯤은 정신을 잃은 채, 비틀거리며 걸어오던 사이 어느새 성에 도착해 있었다. 수도에는 지역마다 설치되어 있는 텔레포트를 타고 넘어온 것 같기도 했다.

허벅지가 욱신거리고, 등이 뻐근했다.

익숙한 성의 모습을 보자 그제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사냥 대회는…….”

“계속되고 있을 거야. 우린 최소의 인원으로만 왔고.”

플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파르베의 목적은 자신에게 있었으니, 나중에 저를 죽이기 위해서라도 무모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광기에 휩싸인 눈빛이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플로라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시몬과 황제의 성으로 돌아왔다.

시몬이 오자마자 부른 이든은 금방 황제의 방에 도착했다. 그는 조금 놀란 얼굴로 피와 땀으로 범벅되어 몰골이 엉망인 플로라를 보며 우뚝 걸음을 멈춰 섰다.

“레이디, 이게 무슨…….”

“사냥 대회에서 일이 있었다. 일단 치유를 좀 해주겠나?”

“폐하께서도……!”

“난 괜찮다. 멀쩡해.”

시몬은 그러니 얼른 플로라부터 치유하라는 뜻으로, 이든을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이든이 재깍 플로라에게 다가가 다친 곳을 묻고 치유를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미안해요. 이든. 또 귀찮게 했네요.”

“레이디! 이런 건 전혀 귀찮지 않습니다.”

이것저것 대회 준비를 한다고 폴을 보러 가지 못해, 이든의 얼굴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지난 습격 사건 이후 플로라에 이어 폴까지 치유를 하게 되어 그는 굉장히 피로해 보였다. 자신이 그의 치유력을 괜히 소모하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심한 부상은 아니라 다행입니다. 이틀만 움직일 때 조심하시면 상처는 금방 아물 거예요.”

“피곤해 보여요. 이든.”

상처에 집중하고 있던 이든이 고개를 들어 플로라와 시선을 맞췄다.

조금 감동한 듯한 모습에 괜히 멋쩍어졌다.

“아, 요새 일이 좀 많았으니까요. 조금 쉬면 괜찮아질 겁니다. 치유력은 휴식으로 회복되니까요.”

“…….”

“돌아가면 아르제카 신께 기도를 더 올려야겠어요. 레이디만 너무 몰아서 부상당한다는 생각, 들지 않으시나요?”

“……아, 그건.”

괴한과 직접적으로 원한이 있는 관계니까.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멋쩍게 웃었지만, 이든의 얼굴은 심각하기만 했다.

“신께서 꼭 레이디를 죽여야겠다고 마음먹으신 것 같다니까요.”

“그런 불길한 소리 하지 마. 이든. 신전의 사제라는 녀석이…….”

창밖을 바라보며 잠자코 있던 시몬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이든이 입술을 삐죽였다.

“방금 한 말은 취소입니다. 그럼에도 레이디가 이리 꿋꿋하게 살아주시는 걸 보면, 어쩌면 아르제카 신께서 지켜주고 계시는 것일지도 몰라요.”

치유를 마친 이든이 물러났다.

“싸움에 대해서는 조금도 모르지만, 자잘한 상처들을 보니 잘못 몸을 움직였다면 목숨이 위태로웠겠단 생각이 듭니다. 레이디.”

상대는 아이든의 새로운 실험을 받았던 주인공인 데다, 실력까지도 대단했으니 플로라가 이길 거란 보장은 없는 싸움이었다.

파르베 역시도 센칸에서 주목하고 있는 기사였음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이든이 그에게만 이리 많은 실험과 지원을 할 리 없을 테니까.

그 역시 주목받기 전까지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며 치열하게 실험 받고 싸우고 살아왔을 테니, 속에 찬 악의 근성 또한 플로라 못지않을 것이다.

이든의 말대로 조금만 잘못 움직였어도 심한 부상을 당했을지 몰랐다.

“몸조심하세요. 레이디.”

이든은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 못할 말이 가슴 속에 맺혀 있는 그는, 웃어도 웃는 게 아니었다.

제 할 일을 마쳤으니, 방을 빠져나가야 하는데 차마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곧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곤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아, 그리고 이거…….”

플로라는 이든이 품에서 무언가 꺼내는 것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작은 십자가 모양이 달린 목걸이였다.

이든은 시몬이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플로라에게 다가섰다.

“레이디가 다치지 않으시길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제작했습니다.”

시몬의 시선이 그제야 창밖에서 떨어져,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플로라는 그 목걸이를 받아들며 눈을 깜빡였다.

“고마워요. 이든.”

갑작스럽긴 했지만, 이든의 마음은 여실히 잘 느껴졌다.

* * *

긴장과 걱정은 금세 녹아내렸다. 이든이 나가고, 시몬은 심신 안정에 도움이 되는 따뜻한 차를 준비해주었다. 마시는 동안 에르네 또한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마음의 혼란은 금방 잠재워질 수밖에 없었다.

플로라는 다 식어 별맛도 느껴지지 않는 차를 다시 호로록 마시며 저도 모르게 시몬의 눈치를 살폈다. 눈앞에 앉아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삐딱하게 고개를 돌린 채 생각에 잠긴 얼굴이 어딘지 굳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든이 나간 후부터 계속 이런 상태였다.

파르베에 대해 생각하시는 걸까, 싶었지만 사색을 깨트릴 수 없어 말을 걸기도 뭐 했다.

<폐하께 무슨 일이 있으셨나?>

에르네도 그 이상을 감지했는지, 플로라에게만 물었다.

소통이 된다는 게 이렇게 편한 일이구나.

플로라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럴 만한 일이 없어 설핏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르네가 의심스럽단 얼굴로 플로라를 빤히 보았다가, 다시 황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깐 사색에서 깨어났는지, 시몬이 에르네의 시선을 마주했다.

“하던 얘기마저 해. 듣고 있으니. 핏자국을 쫓아갔더니, 뭐?”

<갑자기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 것 같기도 하고요. 인근을 수색했지만 흔적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모습을 자세히 봤나?”

<워낙 달리기가 빨라 제대로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꼭 돌연변이 마수와 비슷하게 생겼더군요.>

“……그렇지?”

자신이 파르베와 싸우던 모습을 시몬과 에르네 역시도 보았을 테니 숨길 필요는 없었다. 이제 숨길 이유도 없었지만.

<경이 말해. 그를 가까이서 보지 않았던가?>

플로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센칸의 아이든이 그에게 실험을 한 것 같았습니다. 그분께서 내게 힘을 주었다, 고 말했거든요. 센칸의 메린 성에 사는 기사들은 아이든을 신처럼 받듭니다. 그분이라고 한다면 아이든 밖에 없을 거예요.”

“실험을 당해 몰골이 마수처럼 변했다……라. 끔찍한 일을 잘도 벌이는군.”

“그런 상태인 기사를 제게 보낸 걸 보면, 판단력이 많이 흐려진 상태일 겁니다. 실험의 성공에 도취되어 있거나, 저를 그만큼 죽이고 싶다는 의지 때문이겠지요.”

플로라는 이를 꽉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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