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범위가 넓어 야생 동물들을 찾기가 쉽지는 않았다. 플로라가 찾은 사냥감은 멧돼지였다. 슬그머니 그 뒤를 쫓는 사이 깊숙한 곳으로 들어왔다. 스산한 산의 기운이 알게 모르게 등줄기에 식은땀을 흐르게 했다.
어느새 가만히 멈춰서 방향을 잃은 사람처럼 사위를 두리번거리는 멧돼지를 바라보다가, 플로라는 조심스레 화살을 장전했다. 휙, 빠르게 날아간 화살이 멧돼지에게 명중했다. 그리고 도망치는 사냥감을 뒤쫓던 찰나였다.
“황제도 이곳에 와있다면서요?”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나 혼자 제국의 마스터들을 다 죽이고 황제까지 처리하기엔 무리가 있겠죠? 아쉽단 말이죠.”
익숙하지 않은 불길한 목소리에 플로라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딘가에 숨어 있는 모양인지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플로라는 천천히 눈을 굴리며 방금 전까지도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여명 기사단에 대해 떠올렸다.
“아, 그들을 죽이지는 않았어요. 잠깐 기절만 시켰죠. 선배를 감시하는 것 같기에.”
플로라의 의도를 알아챘는지 남자가 쿡쿡 웃었다.
이 자가 사르트가 말한 그 ‘파르베’인 모양이었다.
그럼 며칠 전 스벤타 남작의 고용인이 보았다던 그 짐승 같은 남자도 이 괴한인 걸까.
플로라는 미간을 구긴 채, 주변을 훑었다.
빼곡하게 이어진 커다란 나무들 때문에 적의 위치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는 상대의 움직임을 혼란스럽게끔 했다. 다수의 적일 때는 쉽게 알아챌 수 있지만, 소수의 적은 미리 어느 위치로 숨는지 보지 않았다면 알아채기가 어려웠다.
“……명령이 떨어졌어요. 선배를 죽이래요.”
“내가 왜 당신의 선배지?”
“센칸의 자랑스러운 영웅이셨으니 선배는 선배죠. 비록 지금은 변절자가 되어 적국의 기사로서 이용당하고 계시지만요.”
“…….”
“아이든 님께서는 선배를 꼭 살리고 싶어 하셨는데. 이제는 죽여도 된다고 하시네요. 왜일까요?”
그딴 건 궁금하지 않았다.
그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플로라는 말을 아꼈다.
“사르트인가, 그 기사도 이곳에 있나요? 아이든 님의 명령은 아니었지만, 그놈은 꼭 죽이고 싶어서 묻는 거예요.”
뻔뻔함에 플로라가 입술을 짓씹었다. 말이 들려오는 소리의 방향을 유심히 살피자, 언뜻 숨어 있는 괴한의 모습이 보인 것도 같았다.
플로라가 빠르게 화살을 장전해 쐈다. 장전부터 겨냥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빠른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정확성은 떨어지는 겨냥에 화살은 나무에 박혔다.
파르베가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렸다.
“숨어 있지 말고 나와.”
“음, 선배의 활은 백발백중이라던데요. 그거 내가 너무 불리한 싸움이잖아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단도가 얼굴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잠시 신경을 분산한 사이에 더 이상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파르베에게서 말도 이어지지 않았다.
플로라는 겨우 집중하며 주변을 다시 훑기 시작했다.
몸이 날쌘 파르베는 화살을 쏘는 족족 잘 피해냈다. 확실히 장애물이 많은 탓에 숨기도 쉬운 모양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원거리로 대적할 수 없을 거리까지 파르베가 다가왔다고 느꼈을 때, 플로라는 활을 바닥에 버렸다.
그리고 늘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검을 꺼내 들었던 찰나였다.
뒤에서 느껴지는 강한 살기에 검을 휘둘렀고,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플로라는 눈을 크게 떴다.
“아이든이…….”
충격과 공포가 전신을 뒤흔들었다.
“네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이를 악물었다. 눈앞에 있는 파르베의 모습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목까지 피부가 보랏빛으로 물든 채였다.
또한 흰자위보다 동공이 더 커졌고, 깊은 심연을 내다보고 있는 것처럼 검었다. 말로만 들었던 1급의 고위 마족을 만난다면, 이런 느낌이겠구나 싶은 생각이 딱 들 정도였다.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것 같은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
“짓이라니요. 그분께서는 뜻을 이루셨습니다.”
파르베는 마치 자신이 구원받은 사람처럼 황홀한 얼굴을 했다가 이내 다시 플로라를 향해 살기를 뿜었다.
“그분께서 내게 힘을 주었어요.”
모습이 변해 그런지 익숙한 얼굴은 아니었다. 함께 조를 이뤄 마수를 토벌하러 다녔다는 데도, 전혀 떠오르지 않는 사람이었다. 플로라는 미간을 좁혔다.
“백작령에서도 네 짓인가?”
플로라는 한 발 뒤로 물러서 다시 공격 자세를 취했다.
파르베가 여유롭게 웃으며 고개를 까딱했다.
“당신이 아끼는 건 모두 죽일 거예요. 배신자니까. 내가 찌른 그 사람, 사경을 헤매고 있다죠?”
“…….”
“선배의 마음이 많이 아팠겠어요. 저런.”
플로라는 입술을 짓씹었다.
도발에 넘어가면 안 되는데, 피투성이가 되었던 폴의 모습을 떠올리니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누군가를 이토록 죽이고 싶단 생각이 드는 건 오랜만이었다. 아이든 말고는 그래도, 이렇게까지 살기를 품지는 않았었는데.
오히려 아이든에게 실험을 당해 기억을 잃고, 첩자가 된 것이 자신의 숙명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을 불쌍하게 여기곤 했다. 파르베도 명령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플로라가 먼저 발을 뗐다. 파르베도 그녀의 검에 응수했다.
칼을 맞부딪치고, 바닥을 뒹굴고, 어디에 상처가 나는지 모를 정도로 이성을 잃은 채 폭주했다. 그를 죽이지 않으면 이곳을 떠나지 못할 것 같았다.
아스라이 이어진 기억의 저편에서, 다치지 말라고 했던 단장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았지만 살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근접은 좀 약하다던데. 확실히 그러네요?”
파르베가 빈정거리며 강하게 플로라를 내리쳤다.
어떤 실험을 당했는지는 몰라도 그의 기운이 남다르다는 것쯤은 가까이서 보니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설마…… 실험을 성공한 걸까.
마스터가 되어버린 걸까.
맞부딪치는 검을 제대로 지탱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에서 몸을 움직이자니, 쉽게 지치기 시작했다. 그래도 플로라는 자신이 지켜야 할 사람을 떠올리며 이 순간을 이겨내야 할 이유를 만들어냈다. 그게 큰 힘이 되었다.
“……플로라!”
그래서 환청이 들린 줄 알았다.
이곳에서 들리지 말아야 할 목소리가 분명한데…… 왜.
시몬이…….
* * *
다른 사람들이 온 이상, 플로라를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는지 파르베는 급하게 몸을 숨겼다. 플로라는 바닥에 떨어진 활을 챙겨 아까보다 움직임이 둔해진 파르베를 향해 화살을 쐈다. 다리에 화살을 맞은 듯했지만, 그는 더 이상 플로라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만.>
플로라가 그를 뒤쫓으려는 것을 저지한 사람은 에르네였다.
<내가 쫓겠다. 넌 움직일 상태가 아니야.>
에르네는 플로라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파르베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뛰었다.
그를 바라보던 플로라가 몸을 휘청거렸다.
참았던 숨들이 터져 나오며 피가 역류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 손으로 죽여야 하는데…….’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애써 쥐고 있던 활을 떨군 플로라에게로 시몬이 달려왔다.
플로라가 인기척이 나는 방향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파도처럼 코앞까지 덮쳐온 시몬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따뜻하고 달큼한 그의 체향이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자신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깨달았다.
“……플로라.”
평소와는 다르게 화를 억누르는 듯한 말투였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머리칼을 쓰다듬어주는 손길은 다정했다. 플로라는 누군가 이런 모습을 보고 오해할까 금세 몸을 뒤틀었지만, 시몬이 놓아주지 않았다.
“폐하.”
더 강하게 자신을 끌어안는 손길에 플로라가 그를 밀어내던 손을 힘없이 내렸다.
“괜찮아. 가만히 있어.”
“…….”
“조금만…….”
그의 말의 의미를 안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황제를 따라나선 여명 기사단이 바리케이드처럼 진을 치고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도록, 주변을 막아주고 있었다.
그의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는 것이 선연하게 느껴졌다.
“내가…… 너무 안일했다.”
얼마나 따뜻한 품속인지 그대로 정신을 놓아버릴 것만 같았다.
그에게서 받은 힘으로 다시 파르베와 싸울 수 있을 듯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
“다 알고 있었어. 네게 이런 위험이 닥칠 거라는 거. 그런데도 널 사지로 내몰았잖아. 내가…….”
시몬의 목소리 끝이 떨렸다.
플로라는 겨우 그의 품에서 벗어나 고개를 들었다. 눈물을 보이지는 않았으나,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애처로운 표정을 보자 마음 한구석이 아릿해졌다.
시몬이 그런 생각을 할 필요는 전혀 없다.
이건 자신이 해결해야 할 일이니까.
그를 지키다 목숨을 다한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죽음이었다.
근데 왜…….
플로라는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어떤 이유에서건 그가 이런 표정을 짓는 건, 덩달아 제 마음까지 아프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