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에르네의 말을 듣자마자 시몬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황제는 이곳에 있을 것이 아니라, 성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오늘 전달받은 소식도 아닐 것인데.
플로라가 조금 불만스러운 얼굴로 에르네를 올려다보았다.
자신도 그에게 은밀하게 말을 전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플로라가 하려고 했던 말을 알아챈 것인지, 에르네가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말을 전달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일정을 취소하고 싶었으나, 폐하께서 완고하셨다.>
“왜…….”
<그런 이유가 있으시겠지.>
자신에게 닿는 빤한 시선이 어쩐지 불편했다. 그의 서린 동공 속에 어떤 의중이 담겨 있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그들이 만에 하나 이 사냥 대회를 노려서 수작을 부리고 있다면, 경이 제일 위험해지겠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센칸의 원초적인 목표는 자신이다.
그녀가 비밀을 누설해 들은 사람들도 모조리 죽이고 싶겠지만, 일단 먼저 자신을 죽이려 들리라는 걸 알았다.
아이든은 그녀를 자신의 창조물 정도로 여기며, 제 손을 떠나면 자비 없이 죽이거나 ‘회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위인이었으니까.
게다가 센칸에 있던 시절부터 느낀 그의 광적인 집착을 생각해봐도 당연했다.
가장 먼저 노리는 건 시몬이 아니라, 플로라일 거다.
플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해. 경에게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생기면…… 그 뒤는 나도 감당이 안 될 것 같으니.>
음산하게 울려 퍼지는 머릿속의 말에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에르네의 말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되묻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듣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단 직감이었다.
뭐든 별로 좋은 영향을 끼치는 말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플로라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니! 단장님?”
그때 누군가 에르네에게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플로라가 눈만 슬그머니 돌려 상대를 확인하고 반색했다. 루가르였다.
아까 여명 기사단이 등장할 때 그녀가 있는 것을 확인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루가르도 곧 플로라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다.
“아! 플로라 님? 두 분, 여기서 뭐 하세요?”
“아…….”
“단장님 설마, 플로라 님을 괴롭히고 계셨던 건 아니겠죠?”
루가르의 말에 에르네가 설핏 미간을 좁힌 채 그녀를 노려봤다.
그도 그럴 게 루가르가 알기로 두 사람은 대화도 제대로 나눌 수 없고, 에르네가 플로라를 싫어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당연히 할 수밖에 없는 오해였다.
플로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플로라가 그런 거 아니었다고, 단장님과 대화 나눌 것이 있어 계약을 진행했다는 말을 조심스레 했다. 그제야 루가르의 표정이 한결 풀어진 듯했다.
에르네는 되게 무서운 사람 같았는데…… 그게 아닌 것 같고, 루가르는 엄청 소심한 줄 알았는데 보면 볼수록 대담한 면이 있었다.
에르네도 약간은 루가르의 눈치를 살피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쩐지 잘 어울리는 모습에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플로라는 이내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무슨 대화를 하는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투덕거리고 있었다.
예전에도 느꼈지만 루가르의 표정은 훤히 드러나서, 감정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었다.
에르네를 바라보는 눈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다.
* * *
어느새 집결지로 하나둘 환복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시몬은 여명 기사단의 곁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있었다.
플로라가 힐끗 시몬을 바라보았다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남의 속도 모르고 예쁘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쿵쿵, 재빨리 고개를 돌리지 않았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
휴. 어쩐지 이제 다신 시몬이 있는 쪽으로 눈을 돌리지 못할 것 같았다.
심장에 무척 해롭다.
그런데 그는 어쩌자고 이렇게 위험한 곳에 온 걸까.
에르네도 막을 수 없었던 걸까.
아니면 시몬을 지켜낼 수 있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는 것일까.
센칸이 무언가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자, 다시 불안감이 덮쳐 왔다.
“플로라 경. 잠시 얘기 좀 하지.”
초조한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때 카신이 그녀를 불렀다. 사색에서 벗어난 플로라가 카신의 뒤를 따랐다.
“첫 번째 팀으로 출전한다고.”
단장의 막사까지 들어가서야 그가 대회에 대해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조심하고.”
“알겠습니다.”
카신은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더 할 말이 있으시면 편히 하십시오. 단장님.”
“출전을 포기할 생각은 없나?”
“……네?”
플로라는 갑작스러운 말에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냐는 듯 단장을 올려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여명 기사단의 단장에게 전달받았다. 경이 위험한 상황이라고.”
“…….”
전달받았다, 고. 잠깐 그의 말에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기분이 들었다.
“단장님. 설마…… 다 알고 계십니까?”
에르네가 그 이야기를 카신에게 할 정도라면, 앞선 자초지종 정도도 다 말했을 터였다.
설마 그런 것일까.
플로라는 문득 심장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 알고 있어. 경이 어디에서 왔는지, 지금 어떤 상황인지.”
“…….”
“얼마 전에 들었다. 폐하와 만찬을 함께 했던 날.”
“……아.”
“내가 경의 상관이니, 언젠가 꼭 들었어야 할 말이다.”
“알고 있습니다.”
플로라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카신이 병실에 찾아와 습격 사건에 대해 물었지만, 제대로 대답해주지 못했던 때가 떠올랐다.
“서운한 마음이 없진 않지만, 내용을 들어보면 가볍게 들을 수 있는 말들은 아니더군. 경의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전달받았으니 됐고.”
“……죄송합니다.”
“또한 폐하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말할 수 없었겠지.”
“…….”
“그래, 그 일은 차치하고 본론으로 돌아가서. 내가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경을 이 대회에 출전시키고 싶지 않다.”
플로라는 이를 악물었다. 무어라 반박의 말을 건네야 할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부하가 처해 있는 위험에 대해 아는 상관이라면…… 그리고 그 부하를 아낀다면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많은 말을 섞어보지 않았어도, 카신이 자신을 좋게 봐주고 있다는 것쯤은 플로라도 알았다. 그래서 그 걱정이 달가우면서도, 어떻게 자신의 뜻을 전해야 할지 난감했다.
“제가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꼭 벌어질 거란 보장도 없고요.”
“왜 경이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
그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아니면, 이곳이라도 습격당할 거라고. 그러니 자신이 가야 하는 것뿐이라고 담담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제가 끌고 들어온 일입니다. 제가 직접 처리할 수 있다면 좋은 거고, 아니면 미끼라도 되어서…….”
“그런 생각은 갖지 마. 플로라 경.”
“단장님. 저 혼자 처리할 수 없다면, 꼭 도움을 요청할 겁니다. 저 살자고 폐하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순 없어요.”
카신은 잠시 아랫입술을 물었다.
답답한 마음에 떼를 써본 것이기도 했다.
어차피 그녀가 출전할 것을 알면서도.
“단장님은 이곳에서 폐하를 지켜주세요. 아직 상대가 어떤 생각인지 알지 못합니다.”
“…….”
“저를 노릴 수도 있고, 아님 그저 경고를 하려는 것일 수도 있고, 폐하까지 노리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생각이 있다면 제국의 마스터들이 많은 이곳을 마음대로 공격하진 못하겠죠. 저는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지만 방심할 순 없습니다.”
자신이 위험해질 걸 알면서도 간다는 이 여자를, 카신은 붙들고 싶었다.
그래서 떼를 쓴 거다.
하지만 무어라 명령할 말이 없었다.
“경은 지난번 다치지 말라는 명령을 어겼다. 이번에는 꼭 지켜.”
“……알겠습니다.”
플로라는 해사하게 웃었다.
* * *
사냥 대회는 그대로 진행되었지만, 확실히 플로라가 느끼기엔 분위기가 변했다.
덫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곳으로 들어가는 사냥감이 된 기분이다.
게다가 활을 챙겨 들고 숲속을 다니는 그녀의 주변으로 여명 기사단의 복장을 한 기사들이 있는 것을 보면 에르네가 무슨 손을 써 둔 것 같기도 했다.
대회는 뒷전이고 아무래도 자신을 감시하는 것 같았다.
기대했던 사냥 대회를 망친 것 같긴 했지만, 진짜 일이 벌어질 때까지 플로라는 자신의 일을 묵묵히 수행할 생각이었다.
기사단을 위해, 그리고 시몬을 위해서라도 일등을 하겠다고 하지 않았다.
대회의 첫 번째 팀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 시간이었다.
사냥의 범위가 넓어 주변에 다른 경쟁자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여명기사단까지 없었다면 혼자 사냥을 하러 산속에 나온 기분이 들 것 같았다.
플로라는 짧게 심호흡을 하며 활을 챙겨 들었다.
경계는 늦추지 않되, 당장 거기에만 집중하지는 말 것.
그녀의 머릿속에 시몬의 해사한 얼굴이 떠올랐다. 긴장으로 점철되어 있던 마음이 조금은 푸딩처럼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