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67)화 (67/154)

67.

각자의 단복을 차려입은 기사단이 웅장하게 등장했다.

가장 먼저 도착해있던 백기사단은 그들이 하나둘 집결지로 모이는 모습을 구경했다.

기사단끼리 거의 겹칠 일이 없기 때문에 해마다 있는 이 행사가 서로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사냥 대회와 곧 있을 격투 대회가 전부다.

먼저 도착한 쪽은 흑기사단의 하키라 단장과 기사들이었다. 대열을 잘 맞춰 걸어오자, 그 위엄이 크게 다가왔다. 하키라 단장이 플로라를 발견하고 방긋 웃으며 손만 흔들지 않았더라도 아마 그 분위기는 계속되었을 것이었다.

옆에서 기사들이 단장님의 발랄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 가볍게 콕콕 그를 건드려본다든지 귓속말을 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하키라 단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플로라와 카신을 향해 맑게 웃으며 방방 뛰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백기사단만 이곳에 있다는 거였다.

그래도 상급 기사들은 마수 토벌 임무로 하키라 단장이나 흑기사단과 마주칠 일이 꽤 많았기 때문에 서로의 성향 정도는 잘 아는 편이어서, 신입 몇 빼고는 그리 놀라워하지도 않는 기색이었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정돈되자, 곧이어 성기사단도 대열을 맞춰 등장했다. 그들은 집결지에 모이자마자 먼저 도착한 기사들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리고 마지막이 여명 기사단이었다. 황제 시몬을 중심으로 적색과 흑색이 절묘하게 섞인 단복을 맞춰 입은 에르네와 그 부하들이 나타났다.

“하네칸의 태양을 뵙습니다!”

황제의 모습이 보이자, 기사단의 기사들은 전부 하던 일을 멈추고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르트 경과 에리카 경의 옆에 서 있던 플로라 역시 무릎을 꿇었다.

이 많은 인원이 그를 향해 무릎을 꿇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자신이 모시고, 또 존경하는 폐하가 다른 이들에게도 경배받는 모습을 보는 것은 몹시 흥분되는 일이었다.

그를 향한 사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심장이 뛰고, 피가 거꾸로 역류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앞머리까지 말끔하게 밀어 올린 검은 머리칼과 검은색 제복, 황금색 견장에 이어진 빨간색 망토 차림을 한 시몬의 모습을 슬쩍 곁눈질로 엿본 플로라가 마른 침을 삼켰다.

‘나의 황제…….’

거리는 멀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황제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전장에서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의 격려를 받는 일이 얼마나 사기를 증진시키는지,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시몬의 등장으로 더욱 잘 알 것 같았다.

긍정적인 힘이었다.

상금 때문이 아니라 시몬을 위해서라도 왠지 일등을 하고 싶어졌다.

* * *

“역시, 폐하…….”

폐하를 가까이서 처음 알현한다는 에리카는 시몬이 백기사단의 막사에 방문해 격려의 말을 전한 뒤로부터 넋이 나간 사람처럼 굴었다.

플로라도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그의 눈길이 은근히 닿을 때마다 온몸에 열이 풀풀 나는 것 같았는데, 자신만 그런 기분을 느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리라.

사냥하기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플로라는 카신이 주었던 활을 메었다. 두 동강 났던 곳을 이어 붙인 터라 자국은 좀 남았지만 황성 대장장이 실력이 좋아 처음 받았던 때처럼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에리카가 먼저 채비를 마치고 막사를 나갔고, 혼자 남은 플로라도 마지막 확인을 끝내고 나섰다. 백기사단의 막사를 빠져나가 집결지로 다시 향하던 와중, 익숙한 사람을 만났다.

“에르네 단장님?”

플로라는 그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먼저 인사를 했다. 에르네도 환복한 모양인지 아까와는 다른 차림새였다.

늘 그랬듯 이번에도 무시하고 그냥 지나갈 줄 알았던 에르네가 플로라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녀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

플로라가 당황한 얼굴로 에르네를 올려보았다.

‘뭐하시는 건가요?’

말은 차마 못 하고, 그저 뻣뻣하게 굳은 채로 그를 올려다보자 뭔가 달라는 듯 손바닥을 짤막하게 흔들었다. 그래도 못 알아듣자, 에르네가 주변을 돌아보더니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손을 잡는다고요? 갑자기?’

플로라가 눈을 크게 뜨고 에르네를 올려다보며 손을 꼼지락거리자, 그가 짧게 플로라를 노려보았다.

에르네라면…… 무슨 이유가 있겠다 싶어 잠자코 기다리자 그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단도를 꺼내 들었다.

“……아, 아니. 단장님!”

놀란 플로라가 주먹을 꼭 쥐었다.

“단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그때 푸른 머리칼을 휘날리며 이젤이 나타났다. 플로라가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애처로운 얼굴로 이젤을 올려다보았다.

살려달라는 듯한 어린 양의 얼굴을 슬쩍 바라본 이젤이 단장의 말을 전해 듣고 플로라에게 설명했다.

“계약을 하시려 하는 모양입니다. 단장님께서 직접 플로라 경께 말을 전할 수 있도록요.”

“……말을 전한다고요.”

이해하기 힘든 생소한 말에 플로라는 둘이 한통속이 아니냐는 눈으로 에르네와 이젤을 번갈아 보았다. 이젤도 에르네와 번갈아 눈을 맞추며 무언가 신호를 주고받는 듯 보였다. 그리고 이젤이 무언가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플로라를 바라보았다.

“저, 플로라 경. 저희 단장님께서는 직접 말을 하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마력을 이용해 계약된 자와만 소통할 수 있어요.”

“……그게 무슨…….”

“에르네 단장님께서는…… 반은 인간이나, 반은 마수의 피를 이어받으셨습니다.”

중대한 비밀을 이야기하듯 이젤이 그녀의 귀에 대고 속닥거렸다.

“길게 이야기는 드리지 못하지만, 그래서 저희의 방식으로 대화를 나눌 수는 없어요.”

플로라는 숨을 들이켰다. 그동안 에르네를 만나 느꼈던 이상한 점들이 조금씩 퍼즐처럼 맞춰지는 것 같았다. 첫 대련에서도, 그리고 그 뒤로도 계속.

에르네는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다른 사람을 통해 말을 전했다. 그저 자신을 싫어해서 인사를 받아주지 않고, 직접 말을 섞어주지도 않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부 착각인 모양이었다.

반은 마족이라니…….

플로라가 살짝 경직된 얼굴로 에르네를 힐끗 보았다.

그는 미동 없이 여전히 서린 눈빛으로 플로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갑작스레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저희가 없었으니 말을 전달할 방법이 없었던 모양이에요. 단장님이 좀 막무가내인 면이 없지 않아 있어서…….”

이젤의 말에 에르네가 잠시 그를 노려보긴 했지만, 크게 혼나지는 않은 듯했다.

플로라는 어색하게 웃으며 결국 손을 폈다.

하지도 않던 짓을 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저 눈빛을 지금까지 계속 오해하고 있었으니, 자신을 드디어 찔러 죽이려는 구나!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에르네 단장이 마수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충격은 잠시였다.

가볍게 손끝을 베는 느낌이 났다. 워낙 날카롭게 갈린 칼이라 그런지 아프다는 느낌은 거의 없었다. 이어 자신의 손가락까지 가볍게 벤 에르네가 계약을 시작했다.

<미안하게 됐군.>

그리고 머릿속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신기한 듯 플로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에르네를 올려다보았다.

이런 거였구나.

입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는데, 상대에게 말을 전달한다니.

그동안 품었던 의구심들이 완전히 해소되었다. 플로라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자, 이젤이 계약을 끝냈다는 것을 눈치채고 이만 자리를 떠나겠다며 가버렸다.

그런데 에르네는 왜 갑자기 계약을 하겠다고 한 것일까.

“……에르네 님.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신 건가요?”

그동안 별로 대수롭지 않은 말은 플로라에게 아예 하지 않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을 시켜 전달했다. 그런데 이제 와 계약을 한다고?

은밀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말이 있어서가 아닐까. 플로라는 그렇게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 라벤더에게 연락이 왔다. 라벤더를 기억하나? 폐하와 함께 잠행을 나갔을 때, 들렀던 주점에서 만난 여인이다.>

모를 리가 없었다.

그녀가 폐하께 안기며 울먹거리던 얼굴은 여전히 생생했다.

플로라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소식이 하나 있었다. 최근 스벤타 남작의 저택 고용인이 휴가를 받아 제도를 떠났다고 해.>

“…….”

<그런데 그가 본가로 내려가던 와중, 이상한 것을 목격했다는군.>

플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중요한 말 같아 대답은 하지 않는 게 좋을 듯했다.

플로라와 에르네 둘 뿐인 것 같아도, 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이었으니.

<짐승처럼 빠르게 달리는 사람이었다고 해. 확실히 짐승은 아니었다는군. 그걸 목격한 고용인은 정신을 잃었고, 본가에 내려가지 못한 채 저택으로 돌아왔대. 뭔가 심상치 않은 것 같아서 네게 전해야 할 것 같았다.>

확실히. 이상했다.

짐승처럼 빠르게 달리는 것은 아이든에게서 많이 보던 일이었다.

미치광이의 얼굴을 떠올리자, 심장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 같았다.

아이든일까. 그가 온 것일까.

<마수일 수도 있겠지만 혹시나 해서. 네가 듣기엔 센칸과 연관된 일 같은가?>

플로라가 눈에 힘을 주고 에르네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에 가까운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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