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이젤은 근무 시간에는 자리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마침 근무교대를 하러 떠나는 기사를 붙잡아 말을 전하기로 결심했다. 황제의 성 앞을 지키는 근무 중인 이젤이 부릴 수 있는 오지랖의 마지노선이었다.
시간을 미리 앞당기는 것뿐, 어차피 이젤이 해야 할 일 중 하나였다.
황제의 성 앞에 수상한 사람이나 손님이 왔다 가면, 기록하고 보고하는 것.
그의 오지랖을 받아줄지 말지는 대장이 결정할 것이었다.
이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해 겨우 눈을 돌렸다.
그리고 같은 시각, 카신은 황제와의 이야기를 끝마치고 성 밖을 나서는 중이었다.
자신을 알아보고 인사하는 근위대 기사들에게 함께 묵례를 해준 뒤, 백기사단의 본부로 돌아가려는 길이었다. 어느새 친구들과의 만찬은 끝이 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되돌아간 느낌은 지워진 지 오래였다. 아직 밤공기는 스산할 때였다. 며칠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제대로 자지 않았으니 술이 조금 들어갔다는 이유로 몸이 노곤해지고 눈이 뻑뻑했다. 오늘은 얼른 자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재촉하던 무렵이었다.
눈앞으로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걸을 때마다 살랑거리는 머리칼이 카신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 성 내에서 저리 눈부신 은발 머리를 가진 기사는 한 명뿐이었다.
게다가 백기사단의 훈련 단복을 입고 있으니, 그가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이 시간에 그녀는 왜 이곳에 와있는 것일까.
카신은 플로라를 부르려다 말고, 잠시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잠자코 그녀의 뒤를 따랐다. 시선에 들어찬 것만으로도 머리가 단숨에 복잡해졌기 때문이었다.
방금 전 시몬에게 전달받았던 이야기들이 떠올라 그런지 더 심장이 뛰었다.
센칸이라는 나라에서 험한 삶을 살다 도망친 그녀의 유독 뒷모습이 쓸쓸하게만 보였다.
그녀의 삶을 이해하고 나니 알 수 없는 감정들이 파도처럼 밀려든다.
이게 어떤 마음인지는 그 역시도 잘 몰랐다.
처음에는 그녀의 능력이 눈에 띄었고, 보다 보니 자신이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뒀던 사람과 비슷한 부분이 많이 보여 괜스레 눈길이 닿았다.
한데 그런 시간들이 겹치면서 생긴 이 감정은 무엇이라 정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과거를 추억하게 만드는 아릿한 감정인가, 아니면 잘 키워보고 싶은 기특한 부하일까.
그도 아니라면…….
‘플로라 경에게 이성적인 관심이 있나?’
거기까지는 모르겠다. 아니겠지. 그냥 에르네의 개소리였다.
괜한 소리를 들은 것뿐이다. 에르네의 말에 마음만 더 심란해진 느낌이었다.
예전부터 도움 하나 안 되는 날다람쥐 같은 자식이었지.
카신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젓고, 생각을 지운 채 가벼운 목소리로 플로라를 불렀다.
느릿하게 걸어가던 플로라가 카신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말간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을 때,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묵직한 돌덩이가 가슴을 짓눌렀다. 심장은 살기 위해 빠른 속도로 쿵쿵, 움직이는 것 같았다.
불유쾌한 감각이었다. 그에게 허락되지 않은.
카신은 숨을 참으며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여긴 어쩐…… 일인가.”
플로라는 이곳에서 카신을 만날 줄 몰랐다는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단장님은 왜 카신의 성 주변에 계신 것일까.
이브니에 경과 데이트라도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아, 저…… 산책을 하다 보니…….”
변명 거리가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완전한 거짓은 아니었다.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고, 그래서 도착한 게 황제의 성 주변이었다.
대책 없이 무작정 찾아가긴 했지만 일개 신입 기사가 황제를 만날 방법은 없었다. 정말 대책이 없어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는 자신을 질책하며 기사단 본부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렇군.”
다행히 카신은 더 깊게 물어보지 않았다.
플로라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허무맹랑한 변명이었음에도.
“정신 차리고 다녀. 이곳은 황제 폐하께서 기거하시는 성이다. 여명 기사단에게 잘못 걸리면 처벌받을 수도 있어.”
“……아, 네. 명심하겠습니다.”
“같이 돌아가지.”
“네.”
플로라는 자신을 지나쳐 걷는 카신을 따랐다.
“단장님께서는 폐하를 알현하고 오시는 길이십니까? 데이트라도 가시는 줄 알았는데요.”
아까 만났던 이브니에 경의 표정을 떠올리며 플로라가 살짝 입술을 떨었다.
그 표정 정말 살벌했는데.
연인 앞에서 눈치 없이 선물을 건넨 예의 없는 사람이 된 줄 알고, 나중에 이브니에 경에게 자초지종을 설명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던 참이었다.
“무슨 데이트?”
카신이 확 미간을 좁히며 플로라를 봤다.
“아, 아까 이브니에 경과 함께 계셨잖아요. 단복도 입지 않으시고…….”
“아. 그거.”
카신이 무슨 말도 안 되냐는 소리냐는 듯 픽, 웃음을 흘렸다.
“이브니에 경은 본부에서 나오다 우연히 마주쳐 이야기를 나눴던 거고.”
“…….”
“오늘은 폐하께 초대받아 만찬을 함께 했다.”
플로라가 카신의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오늘은 분명 칸나 영애를 만찬에 초대하셨다고 했는데.
설마 단장님과 함께 드신 건가?
차마 묻지는 못하고, 혼자 혼란스러워하던 와중 다시 카신이 말을 덧붙였다.
“별일은 아니고. 유학을 떠났던 옛 친구가 돌아왔거든. 오랜만에 아카데미 시절 붙어 다녔던 사람들끼리 다 함께 모였어.”
“……아.”
플로라는 몸이 바짝 긴장되는 것을 느끼며 바보처럼 눈을 깜빡였다.
말 그대로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다 함께 모였다는 말은 그중에 칸나 영애가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겠지.
칸나 영애도 시몬과 같은 아카데미를 나왔다는 소리를 여러 번 들은 적 있었다.
그랬던 거구나.
플로라는 좋은 내색을 할 수 없어 표정 관리를 하며 묵묵히 걸었다.
칸나 영애와 시몬 폐하가 혼인한다는 소문을 들은 마당에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닌데도 당장 오늘의 걱정은 해소된 기분에 휩싸여 한결 걸음이 가벼워졌다.
플로라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카신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 * *
빼곡하게 들어찬 나무들이 내리쬐는 태양을 가려주어 선선했다. 산에 올라오는 길에 흘렸던 땀을 닦아 내며 플로라가 사위를 둘러보았다. 후덥지근하고 턱 끝까지 막혔던 숨이 탁 트이며 긴장이 풀렸다.
어느덧 사냥 대회를 코앞에 앞두고 있었다. 대회를 앞두고 미리 답사를 나선 기사단은 플로라가 속한 백기사단이었다. 이번 해에는 폐하까지 참관하신다는 말이 비밀리에 기사단 내에 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신경 써서 준비해야 했다.
“저쪽에 막사를 세워! 제대로 고정해.”
“……아니, 아니. 그거 똑바로 들으라니까. 위험해.”
기사단은 위험한 요소를 파악하거나 어디서부터 어떻게 경비를 세워야 할지 결정해야 했다.
가파른 언덕이나 절벽이 어디에 있는지 파악해 지도에 체크하고, 만에 하나의 상황을 위해 대피해야 할 곳이나 황제의 막사를 두어야 할 위치 등 여러 가지에 대해 논의했다.
플로라도 상관들이 시키는 대로 재깍 일을 했다. 폐하를 오랜만에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기분이 들떠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
“플로라, 나는 사냥 대회가 너무 기대돼! 드디어 훈련에서 벗어나 첫 행사잖아. 이제야 내가 기사단에 입단했구나 하고 실감 나.”
멜리아는 이번 사냥 대회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듯했다.
“우리 기사단이 꼭 이겼으면 좋겠어! 상금이 어마어마하대.”
“……상금이 있었구나.”
“그래! 상금이 빠질 수 없지. 그래서 다들 눈에 불을 켜고 하는 거라고. 꼭 이기자, 플로라.”
그동안 훈련과 상관의 심부름에만 치여 의욕을 잃은 듯하던 멜리아가 모처럼 밝은 목소리를 내니, 플로라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듯했다.
“아 참, 그 소식 들었지? 이번 대회에는 폐하도 참관하신대. 그리고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인 여명 기사단도 모여. 여명 기사단 에르네 단장님에 대해서 알아?”
에르네 단장이 굉장히 남자답게 생겼다느니, 한때 마수들을 맨손으로도 때려잡던 무시무시한 실력자라느니. 에리카가 종알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플로라는 막사를 설치했다.
그러다 에리카의 상관에게 걸려 그만 떠들라고 혼쭐이 났지만 말이다.
분주히 대회 준비를 마쳤을 때는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었다.
산에서 해를 저무는 것을 바라보는 건, 플로라가 한때 즐겨하던 일이었다.
일을 멈추고, 산의 높은 곳에 멈춰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플로라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곳에서 막사를 설치하자니 별별 생각들이 다 들었다.
이제야 중구난방으로 머릿속에 퍼지던 기억의 퍼즐들이 하나로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고향에 돌아온 듯하다.
플로라는 이런 곳에서 숨어 살아가던 때도 있었다.
밤이면 마을에 내려가 쓸만한 생필품들을 주워오고, 사냥을 해서 끼니를 때웠다. 습격을 당할까 봐 잠을 제대로 자지도 못했었지. 그러던 어느 날 시몬을 만나 그녀의 인생이, 목표가, 완전히 변했다.
시몬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기도 싫은 가정이지만 아마 센칸에서 붙잡힌 채 여전히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 끔찍한 상상들이지만 지속적으로 그때 시몬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하고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가 지금의 평화에 도취되어 다짐한 것들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시몬과 처음 만났던 그날을 떠올리면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곤 했다. 냉정했던 그 시절로 잠시나마 돌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플로라 경?”
그의 눈동자 같은 주홍빛 석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사색에 잠겼던 와중,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건드렸다. 사르트 경이었다.
이제 그만 하산을 하자는 말에 플로라는 재깍 짐들을 챙겨 들고 상관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