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플로라 경과 그새 많이 친해진 모양이야.”
“어렵게 영입한 수재라서요. 곁에 두고 계속 가르쳐보고 싶더군요.”
시몬은 카신을 물끄러미 보았다. 카신도 피하지 않고, 그 시선을 받아들였다.
“보내기 아쉬울 만도 하겠어.”
“마음을 헤아려주신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자, 멀거니 자리에 앉아 있던 에르네는 설핏 미간을 구긴 채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감정에 미숙한 에르네도 이 상황은 빠삭하게 알 것 같았다.
한 여자를 두고 두 남자가 소리 없이 싸우고 있다.
폐하 쪽은 진작 눈치챘기 때문에 그렇다고 쳐도, 카신은 뭐지?
플로라의 실력은 신입으로 치면 분명 뛰어나긴 했지만, 근거리 검술에 대해선 백기사단에 소속된 다른 기사들보다 잘한다고 딱 잘라 말할 순 없었다. 활을 쏘는 능력 때문에 욕심이 생긴 건가? 그게 아니라면?
……설마, 카신도?
에르네가 혼자만의 생각을 깨고 놀란 듯 카신을 바라보았다.
강렬한 시선에 카신은 에르네에게로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뭐?’ 하는 표정을 짓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르네가 말했다.
<플로라 경에게 이성적인 관심이 있나?>
카신에게만 보내는 말이었다.
가끔은 자신의 능력이 유용하다 생각될 때가 있는데, 바로 지금 같은 경우였다.
카신은 한쪽 눈썹을 구겼으나, 이내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다시 시몬을 바라보았다.
대답은 없었지만, 순간 무너진 그의 표정에서 이미 대답을 들은 것 같았다.
* * *
플로라의 연습은 늦은 시간까지 계속되었다. 무거운 검을 들고,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검술 동작을 구사하는 것은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활을 쏠 때가 가장 기분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하네칸에 와서는 검을 쓰는 일도 재미있게만 느껴졌다.
“호흡이 흐트러졌어. 그러니 몸의 균형이 무너지는 거야.”
그때 사르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플로라는 땀을 닦아내며 바짝 긴장한 얼굴로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거진 수풀을 헤치고 나온 사르트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땅에 주저앉았다.
나무 기둥에 몸을 기댄 채, 비스듬히 플로라를 올려다보는 사르트의 모습은 어딘지 나른해 보였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아, 아닙니다…… 개인적인 일이에요.”
“말할 수 없는 사정인가 보군.”
“…….”
“집중이 흐트러지니 검술에서 그대로 드러나는데.”
“노력하겠습니다.”
“감정에 휘둘리면 안 돼.”
“네.”
사르트는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고, 가볍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두세 번을 더 같은 동작을 연습하고 나서야, 플로라는 잠시 검을 내릴 수 있었다.
그녀의 연습이 끝나길 기다렸다는 듯이, 사르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이리 와서 좀 쉬어.”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치는 손길에 플로라가 성큼 다가가 앉았다.
등이 뻐근한 듯 가볍게 기지개를 쭉 켠 사르트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처음 훈련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단시간에 완벽에 가까운 검술을 구사하는 그녀의 노력에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마음껏 칭찬하기도 어쩐지 부끄럽고, 또 굉장히 피곤한 상태라 말은 아꼈지만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듯하던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사르트 경.”
“앉아서 서류만 들여다보고 있자니, 죽을 맛이야. 단장님은 이걸 어떻게 견디시는지.”
“조금 진전은 있습니까?”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 많아.”
“…….”
“내가 푸념을 좀 할 테니 들어주겠나?”
“네.”
사르트는 옅게 씩 웃었다가 다시 나무에 등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백작령에서 연락이 왔어. 우리와 함께 마굴 토벌을 떠나고 돌아온 이후, 갑자기 사라진 사람이 있다더군.”
“…….”
“우리와 같은 조를 이뤘던 병사 중 하나였어.”
같은 조를 이뤘던 병사……?
그의 말에 토벌을 떠났을 때 함께했던 이들의 얼굴이 찬찬히 떠올랐다.
누구도 전혀 첩자 같은 기색은 보이지 않았었다. 하기야, 누가 자신이 첩자라고 드러내고 다니겠냐마는.
“그자를 의심 중이야.”
“……이름이 무엇입니까?”
“파르베라고 하더군. 주민들도 그가 언제, 어디서 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해.”
“정황상 가장 유력하긴 하네요.”
“백작령에 제출한 서류로 보면 지방의 이름 없는 용병단 출신이라고 하는데, 의심스럽지.”
플로라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무엇이 이해되지 않는 겁니까?”
“일단 그자가 경과 폴 경 만을 타깃으로 삼아 노렸다는 점. 그리고 경의 활을 부러뜨린 사람과 파르베와의 관계.”
“…….”
“혹시 경이 내게 숨기는 것이 있나?”
사르트의 콕 집어 묻는 말에 플로라는 잠시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어떤 면을 보고 숨기는 것이 있느냐고 질문한 걸까.
“그게 무슨…….”
“경은 황제 폐하와 어떻게 아는 사이지?”
시몬과…….
플로라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눈빛에 사르트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번에 마수 토벌 원정에서 경이 다쳐 돌아왔을 때, 폐하와 마주쳤어.”
“……아. 그렇습니까.”
“처음엔 너무 당황해서, 폐하가 묻는 말에만 대답하고 끝났는데. 생각해보니 경과 안면이 있는 사이니 직접 오신 건 아닌가 싶더군.”
“…….”
“내내 묻고 싶었는데 경에게 실례가 되는 말일까 봐 참았어.”
“아…….”
“그런데 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계속 그 생각이 나. 혹시 경은 뭔가를 알고 있지 않을까. 사실은 폐하가 심어둔 사람이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제국의 황제인 시몬과는 전혀 안면이 없어야 정상인 것을.
플로라는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답하기 위해 노력했다.
“폐하와 인연이 있는 사람은 맞습니다. 딱 거기까지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만의 의지로 폐하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없으니까요.”
플로라의 말에 사르트는 한숨을 내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믿고 싶지는 않지만, 기사단 내부에 첩자가 있는 것 같기도 하더군.”
“…….”
“그래서 그것 때문에 경이 이쪽에 온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했어. 꼬리가 잡히질 않으니 그냥 답답한 마음에 푸념한 거야. 단장에게도 말할 생각 없으니 걱정하지 말고.”
“감사합니다.”
정말 푸념에 그쳤던 것인지 사르트는 그저 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돌아가야겠군. 아직 일이 많이 남아서 말이야. 경도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 그 복잡한 마음으로는 될 연습도 안 될 것 같군.”
“……제가 말씀드릴 수 있을 때, 경께도 꼭 말할게요.”
“그래, 그래.”
별로 기대하지 않는 얼굴로 심드렁히 대답한 사르트는 손을 흔들곤 먼저 자리를 떠났다.
복잡한 마음.
하루 종일 검을 휘둘러도 그 마음이 정돈되지는 않았다.
마음도 검으로 잘라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플로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남의 속도 모르고 빛나는 밤하늘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폐하가 칸나 영애를 만찬에 초대했다는 말을 들은 뒤로, 쭉 이 상태였다.
“……정말 웃겨.”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심란해하는 것도 불경을 저지르는 것임을 알면서도 왜, 막지 못하는 것일까.
플로라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천천히 걸었다.
그녀의 걸음이 인도한 곳은 황제가 기거하는 성의 주변이었다.
성의 정원을 지키는 여명 기사단이 그녀를 발견하고 잠시 놀란 듯 눈을 떴다. 일전에 시몬이 직접 훈련장에 데려온 적이 있었으니, 얼굴은 익히 알고 있었고 또한 그녀에 대한 소문도 기사단 내에서는 암암리에 퍼지고 있었다.
시몬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기사들이다 보니, 폐하의 변화는 빠르게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폐하를 만나러 온 것일까.
하지만 플로라는 일정 거리에서 더 이상 발을 디디지 않았다.
자신이 넘지 못할 선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처럼.
성 밖의 보초를 서는 임무를 맡은 이젤 또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카신 단장과의 약속이 잡혀 있어 응접실에 든 지 오래였다.
이곳에 있어도 폐하를 만나진 못할 텐데.
괜히 자신이 비련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이젤은 마음이 아득해졌다.
플로라와 시몬의 사정을 정확히 알진 못해도, 여자의 마음 정도는 잘 헤아렸다.
아무리 사실이 아니어도, 성 내에 떠도는 소문을 플로라 경도 들었겠지.
게다가 오늘 칸나 영애를 만찬에 초대하기까지 하셨고.
이젤이 알기로 폐하께서 근래 일정이 바빠 플로라를 만나러 간 일이 거의 없으니, 아마 그녀는 오해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런, 오지랖.
이젤은 목석처럼 단단히 선 채였지만, 머릿속은 플로라를 발견한 뒤 한층 더 복잡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