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사랑도 모르는 이 불쌍한 사람을 어쩌면 좋을까.
혼자 누군가를 마음에 품고 열렬히 사랑한다는 것은 아프기도 하지만,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기도 한다. 괴한에게 부하들이 습격받았던 이후, 그가 한층 더 바빠졌다는 건 네이라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평소보다 더 고독해 보일 것까진 없잖아.
이게 다 마음에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마음 편히 기댈 곳이나 여유를 챙길 만한 시간 또한 없는 거라고 네이라는 생각했다.
하지만 무조건 카신을 탓하기도 어려운 노릇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가주 자리를 물려받아, 가문을 지키느라 저 자신을 살피거나 돌아볼 틈도 없이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이니까.
어렸을 때부터 그를 알아 온 건 아니었지만,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 가장 먼저 친구가 된 것이 카신이었기에 웬만한 사정은 속속히 아는 편이었다.
게다가 가문과 고귀한 혈통을 위해 사랑이 없어도 결혼하는 일은 흔했기 때문에 카신의 사고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저 아쉬울 뿐이었다. 자신이 아끼고, 좋아하는 친구가 타인을 사랑할 때 느껴지는 평온함과 행복을 모른다는 것이.
“정말 한 명도 없었어?”
“뭐가.”
“살면서 이성적인 마음으로 상대를 좋아해 본 적.”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라…….
카신은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네이라의 질문에 응하듯 제 기억 속을 헤집어 보았다.
“딱 좋아한다, 라고 말할 순 없지만…….”
“…….”
“마음에 계속 남는 사람은 있었지.”
“오, 오! 그게 누군데? 어디서 만난 사람인데? 그런 마음에서 발전이 될 수도 있잖아!”
“지금은 없다.”
“응?”
“지금은 이 하네칸에 없다고. 생사조차 불분명한 사람이고.”
“……아.”
“그래서 더 마음에 남는 건지도 모르겠어.”
무슨 사정인지는 깊이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 카신의 표정이 굉장히 어두워졌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네이라는 카신의 얼굴을 못 본 체하며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였다. 괜한 기대였던 모양이다.
카신은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 손에 들린 작은 선물 상자는 좀 더 세게 힘을 주어 쥔 채였다.
비슷한 사람을 만난 요즘은, 그 아이의 생각이 좀 더 자주 났다.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었는데 그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은 것일까.
어렸을 때 느꼈던 미묘한 감정은 이제 지워진 지 오래였으나, 잔재하는 기억들은 수시로 튀어나와 카신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아쉽네.”
“……별로.”
“이든은 신께 마음을 다 바쳤으니 그렇다고 치고, 에르네와 너만 남았다고. 둘 다 냉혈한 아니랄까 봐.”
“그놈과 날 동일선상에 두지 마.”
“둘이 티격태격 잘하는 건 아는데, 엄청 비슷하거든?”
네이라가 까르르 웃으며 오만상을 하고 있는 카신을 돌아보았다.
“……근데 폐하는 왜 제외해? 칸나와의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는데.”
“아…… 뭐.”
네이라가 카신의 물음에 말을 아낀 채 슬쩍 눈을 굴렸다.
대답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 표정이 수상해서 카신은 네이라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네가 내게 비밀도 만들고, 세월이 많이 변하긴 했어.”
“폐하의 일이니까. 어차피 곧 알게 될 텐데, 뭐. 그때 충격받지 마.”
뉘앙스를 봐서는 시몬에게도 정인이 생긴 모양이었다.
네이라의 정보는 대부분 맞았으니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폐하와 관련된 쓸데없는 소문은 무성했으니, 새로 생긴 가십일지도 몰랐다.
만약 사실이라면.
……아, 이게 왠지 모를 배신감이 느껴진단 말이지.
만찬에서 미처 다하지 못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마탑 앞이었다.
“고마워. 다음 약속 때 보자.”
“건강 좀 챙기면서 일해. 아카데미 때보다 더 마른 것 같으니.”
“너도 마찬가지거든?”
네이라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가 피식 웃곤 다음을 기약했다.
카신도 그녀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황제의 성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시몬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들어왔던 소식을 보고받고, 카신과 약속한 대로 응접실로 향했다.
카신은 자리에 앉아 아까 슬쩍 보았던 선물 상자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폐하.”
문이 열린 것을 확인하고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난 카신이 시몬을 향해 인사했다.
“앉지. 늦은 시간까지 붙잡아두어 미안하군.”
어느새 친구에서 다시 군신 관계로 돌아온 이들이었지만 거리낌은 없었다.
시몬의 권유대로 카신은 소파에 앉았다. 이어 시몬은 에르네에게도 앉길 명했다.
모두가 자리에 착석하고 나자, 알 수 없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일단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차근차근 말해볼 테니 들어주게.”
침묵 끝에 시몬이 입을 열었다.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듯한 시몬의 모습에 카신은 묘한 긴장을 느꼈다.
그가 알겠다는 대답을 건네자, 그제야 이야기의 본론에 들어섰다.
방금까지 카신이 시몬을 기다리며 혼자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던 그녀, 플로라에 관한 이야기였다.
카신은 시몬의 측 중 한 명으로, 비밀에 대해 숨길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그녀가 어디에서 왔는지, 센칸은 어떤 곳인지, 또 지금 마력을 왜 쓰지 못하는지.
카신은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벙찐 표정으로 가만히 에르네와 시몬을 바라보기만 했다. 엄청난 사실들이었다.
그로써 카신이 현재 기사단에서 수사하고 있는 사건은 기사단 내부에 있는 센칸의 첩자를 밝혀내고, 또 그들을 조사하는 임무로 그 의미가 변했다.
“이해는 했지만…… 갑작스럽네요.”
시몬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완전히 플로라 경을 신뢰할 수 없었어. 그래서 지켜보고자 다른 사람들에겐 괜한 말을 하지 않았고. 하지만 플로라가 직접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일들을 털어놓았으니, 이해할 수 있게 됐어. 미리 말 못 한 건 미안하군.”
그래서 시몬이 기사단 입단 시험 때 왔었던 것일까.
그의 기운을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하키라도 그렇고, 자신도 그렇고. 모른 척했을 뿐이었다.
그 이면에 이런 일이 감춰져 있었으니 어디 하나 고장 난 사람처럼 무얼 말하고, 무얼 생각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졌다.
플로라가 시몬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그래서 그녀를 여명 기사단으로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왜 이리 충격으로 다가오는 건지 모르겠다.
잠시 미동도 없이 앉아 생각을 정리하던 카신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알겠습니다. 그럼 플로라는 여명 기사단으로 발령하면 되는 겁니까?”
“……그게 좋겠지. 아무래도. 여기서 자유롭게 센칸에 대해 조사하는 것이 나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 입장에서도 그녀를 보호해줘야 할 것 같고. 또한 봉인된 마력과 기억을 되찾으려면 시간도 비교적 자유로워야 할 듯하고.”
카신은 굉장히 못마땅하다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사정을 듣고 나니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플로라 경은 정예 기사인 사르트 경을 상관으로 결정했습니다. 사르트 역시 그 습격 사건에서 중요한 목격자여서 수사 임무를 맡겼습니다. 저희 기사단에 두고, 사르트 경과 함께 그 일을 조사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어떻게든 플로라를 타 기사단으로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장 컸다.
이건 진짜 눈 뜨고 코 베이는 것 아닌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의 말이니 고분고분 따라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플로라를 보내기엔 아쉬웠다.
문득 솟아오르는 묘한 감정 때문도 있었지만, 실력 면에서도 놓치고 싶지 않은 인재였으니까. 카신이 이를 악물고, 시몬의 대답을 기다렸다.
한참 고민하던 시몬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하지. 갑자기 부하 기사를 다른 기사단으로 보내라고 명령하는 것도 못 할 짓이니까.”
“…….”
“플로라 경에게 선택을 맡기자.”
이상한 의욕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카신의 마음에서도, 시몬의 마음에서도.
카신은 대답 대신 물끄러미 시몬의 얼굴을 살폈다.
실례인 줄 알면서도 사색에 잠겨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아까 들었던 네이라의 말이 지금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표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묘한 기시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지요. 폐하.”
“일단 사냥 대회와 격투 대회를 앞두고 있으니, 행사가 끝나고 다시 얘기하도록 하자.”
“……예.”
“그리고. 이제 다른 얘길 해볼까?”
카신이 뭔가 의심하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시몬이 눈을 굴리며 말했다.
“무슨…….”
“그 선물은 플로라 경이 준 것인가?”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네. 그렇습니다.”
카신은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