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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63)화 (63/154)

63.

언제부터였을까. 그를 마음에 품게 된 것은.

카신 르벨로티아. 그는 이브니에의 상관이었다.

카신은 단장이 아닌 정예 기사였던 시절에도 다른 기사들에게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본인이 인기가 많다는 것도, 심지어는 잘생긴 것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한 남자는 어느 날 갑자기 이브니에의 마음을 훅 치고 들어왔다.

카신은 다른 기사들보다 밑에 둔 부하가 많았다.

위대한 가문의 이름값도 있겠지만, 카신은 제국의 마스터인 데다 실력이 출중하고 백기사단의 차기 단장이라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에 주변에 사람이 몰릴 수밖에 없었다.

정예 기사는 다른 지역으로 발령받는 일이 많아, 신입 기사를 많이 둘 수 없다고 설명해도 그 좁은 자리의 경쟁률은 치열했다.

이브니에는 쟁쟁한 가문을 가진 기사들이 그의 직속 부하가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제국의 마스터에게 검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고자 그의 직속 기사가 되는 것을 지원했다.

수도의 기사단에 합격했을 때처럼 또 한 번의 기적을 바라면서.

그리고 그 기적은 실제로 다시 이브니에의 편을 들어 주었다.

카신은 직접 이브니에를 뽑았다.

단순히 그의 배경에 붙어먹으려는 사람이 아닌, 검술에 욕심이 있고 기사로서의 긍지를 가진 이들을 고른 것이라고, 뽑은 이유를 말해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브니에는 기사가 되어 제 앞가림을 잘하는 것에 급급해 있었다.

할 수 있는 게 검을 쥐는 일밖에 없었고, 그래서 선택한 길이었다.

그 이면에 착잡한 비밀이 숨겨져 있기는 해도, 수도의 기사가 되었다는 것에 긍지를 느꼈고 더 높이 올라가는 것만이 삶의 목표였다.

다른 신입 기사들은 타 지역으로 발령받아 떠나곤 하는 카신을 자주 보지 못했지만, 그의 직속 부하들은 달랐다.

어렵지 않은 임무에는 종종 하급 기사들을 데려가는 경우도 있었고, 임무에서 돌아와도 쉬지 않고 자신의 기사들을 챙겼다.

실력은 제국의 마스터니 더 말할 것도 없었지만, 왜 차기 단장으로 거론되고 있는지 알 것 같은 면모였다. 차가운 듯하면서도 다정하고, 알면 알수록 따뜻한 사람이었다.

하루는 카신을 쫓아 마수 토벌 임무로 향한 적이 있었다. 험준한 산을 오르고, 마수와 싸우다 이브니에는 부상을 당했다.

어깨가 완전히 나갈 뻔한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빠른 처치로 재생이 가능한 상태가 됐다. 겁을 먹은 이브니에를 카신은 살뜰히 살펴 주었다.

매일 밤, 낮으로 꼬박꼬박 들러 그녀의 상태를 확인해주고 위로해줬다.

두려움에 떨지 않도록 이런저런 말들을 속삭여주는 목소리가 마약 같았다.

차갑다고 생각했던 눈빛에 서린 다정함과 따뜻함을 보았다.

죽을까 봐 두려웠고, 검을 다시는 쥘 수 없어 신세를 망치게 될까 두려웠다.

작위에만 기대어 고고하게 살다 죽을 운명을 지닌 가난한 영애로 돌아가게 될까 무서웠다. 부상을 당해 몸도 성치 않으면 혼인도 할 수 없고, 그럼 어디 늙은 귀족의 첩으로 팔려가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이브니에는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처지를 잊은 채, 부상 한 번으로 정예 기사 같은 건 되고 싶지 않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생각이 바뀌었다.

누군가와 맺은 계약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마수를 처치하고 싶어진 거다.

“나도 마수를 상대하는 건 가끔 두려워. 특히 내 한계를 깨달았을 때.”

“…….”

“하지만 이브니에 경. 우리는 제국을 지켜야 할 기사다. 내가 처치하지 못한 마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내 목숨 정도는 별거 아닌 것처럼 여겨지더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자신의 상관이 멋있었다.

자신은 그저 먹고살기 위해 살아남는 것에 급급했는데, 카신은 매 순간 결의를 다짐하고 있었다. 그를 곁에서 지켜보며 그녀도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할 수 있다면, 카신의 곁에서 그를 도우며 긍지를 가진 기사로 살아가고 싶었다.

* * *

“왔군. 카신.”

“하네칸 제국의 태양을…….”

카신은 미리 언질 받았던 약속 장소인 황제의 정원에 도착하자마자 시몬을 만났다.

카신이 그를 발견하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려 하자, 시몬이 설핏 미간을 구긴 채 그를 만류했다.

“어어, 오늘은 친구로서 부른 거라고. 예전처럼 편하게 놀자. 그래서 말인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 이름을 부르는 게 어떻겠어?”

시몬의 말에 카신이 눈을 깜빡이다가 소신껏 대답했다.

“저는 아카데미에 다닐 때도 폐하께는 황태자 전하라는 호칭을 꼭 사용했습니다만.”

“그래. 그랬지. 그래서 융통성 없다고 계속 말했지.”

옛 기억이 되살아난 듯 시몬이 확 얼굴을 구기자, 카신이 픽 웃었다.

“그런데 다른 친구들은 아직……?”

“응. 칸나만 미리 와서 나와 티타임을 가졌어. 네이라와 이든은 아직이네. 두 사람 모두 요새 바쁘니까. 좀 늦을 모양이야.”

“근데 폐하께서는 왜 나와 계십니까?”

“아, 네게 할 말이 있어서.”

“……무슨?”

“이 만찬이 끝나고 할 얘기가 있으니 남아주었으면 해. 응접실에 가 있으면, 나도 마무리만 하고 뒤따라갈게.”

시몬의 말에 카신은 더 묻지 않고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가 더 할 말이 남은 것 같은 눈치여서 카신은 잠자코 다음 말을 기다렸다.

곧 그의 예상대로 시몬의 말이 들려왔다.

“요새 별일은 없지? 카신.”

“네.”

뭔가 중요한 얘기를 할 것 같았는데, 그저 일상적인 안부였다.

오늘 모임의 목적상 공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는 것일까.

“피곤해 보여. 밥은 제때 먹고 있는 건가?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잘 챙겨 먹어.”

그래도 자신을 걱정해주는 말을 해주니 고마웠다.

카신이 옅게 웃다, 문득 생각난 다른 이의 얼굴에 설핏 미간을 좁혔다.

……이브니에.

자신을 걱정하던 그 눈빛이 떠올라 버렸다.

“알겠습니다.”

카신은 겨우 생각을 지워내며 느릿하게 대답했다.

“근데 그건 뭐야? 칸나를 위한 선물인가?”

“……예? 아, 아니요. 저희 신입 기사에게 받은 선물입니다. 물론 정당하게 내기를 통해 얻어낸 것이니 오해는 말아주세요.”

시몬이 잠시 표정을 굳혔다.

신입 기사가 플로라 한 명은 아닌 것을 아는데도, 왜 이렇게 찝찝한 기분이 드는 건지.

“오, 오해는 안 했어. 난 또. 칸나와 오랜만에 만나니 선물을 준비한 줄 알았지. 그럼 먼저 들어가 봐. 칸나 혼자 있으니 적적할 거야.”

“네. 그럼 먼저 가 있겠습니다.”

시몬은 카신을 보내고 잠시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카신을 마주하고 나니 그와 플로라가 다정한 모습으로 떠나던 뒷모습이 떠올라 속이 뜨거워졌다.

저 선물도 플로라가 준 걸까? 아니겠지.

“……별 게 다 신경 쓰이네.”

시몬이 짜증스럽게 이를 악물었다가, 겨우 몸을 틀었다.

속이 복잡했다.

* * *

밤까지 이어진 만찬은 즐거웠다.

시몬과 에르네, 칸나와 이든, 그리고 카신까지. 서로의 지위를 잊고, 오래전 아카데미에 다니던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편안하게 대했다.

“앞으로도 종종 이렇게 만남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마지막 건배를 하며 네이라가 중얼거렸다.

그동안은 서로의 꿈을 위해 달려오는 시간이었다.

어느 정도는 자신의 꿈을 이룬 지금은 이렇게 가끔 여유를 부릴 시간도 있었다.

지나온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고 나니, 그간 쌓였던 스트레스도 어느 정도 풀리는 기분이었다.

모두 같은 기분을 느낀 것인지, 어느 정도 동의했다.

“그럼 다음 모임도 정해서 연락을 넣어주지.”

네이라는 시몬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새 자주 그의 얼굴을 보는 것 같아 내심 기분이 좋았다.

또한 칸나와의 소문에 대해서도 말이 나왔는데, 사실이 아니라고 둘 다 딱 잡아떼었으니 그것 역시 네이라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데에 한 몫을 단단히 했다.

그렇다고 시몬에게 정인이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지만…….

네이라는 마지막 잔을 쭉 들이켜고, 모두와 인사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신이 그런 그녀를 뒤따랐다.

“뭐 이렇게 많이 마셨어?”

“아, 카신! 다들 오랜만에 만나니 기분이 좋아서!”

“마탑으로 가는 건가?”

“그래야지.”

“데려다줄게.”

네이라는 마다하지 않았다.

“네 마음은 여전한 것 같아. 예전이나 지금이나.”

카신이 툭 던지는 말에 네이라가 배시시 웃었다.

“내가 그럼 그렇지, 뭐. 너는? 너는 만나는 사람 없어?”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런 거라니. 소문을 듣자 하니 인기는 많은 것 같던데. 영애들한테 연서도 온다며?”

“내 사생활까지 어떻게 아는 거야. 대체.”

“마탑에 있으면 별 소문이 다 들리더라. 듣기 싫은 것도 다 알아.”

네이라가 픽 웃으며 그를 돌아봤다.

“카신, 너도 얼른 좋은 사람 찾아야 할 텐데.”

“……글쎄. 그런 게 꼭 필요한가. 가문의 후계자는 필요하니 혼인은 해야 할 테지만…… 그 이상은.”

“너무 무드없어.”

네이라가 정색하고 한숨을 폭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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