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리비에르 키의 반 정도 되었던 소년은 어느새 훌쩍 자라 완연한 성인 남자가 되어 있었다. 키도 자신을 훌쩍 뛰어넘고, 체격도 다부진 모습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오랜만입니다. 리비에르 님.”
“반갑습니다. 카신 공작님.”
리비에르도 격식을 차려 인사하자, 카신이 옅게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어색합니다. 말은 편하게 해주세요.”
“아닙니다. 이제 어엿한 공작가의 가주가 되셨으니 격식은 차려야지요.”
“……복귀하셨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요새 사건이 많아 찾아뵐 시간이 나지 않았네요.”
“괜찮습니다. 저도 복귀한 이후 내내 업무에 시달리다 약간 휴식을 가지려 나온 것이거든요.”
그래도 카신은 조만간 리비에르를 찾을 생각이었다.
플로라의 마력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연찮게 만나 갑자기 이야기를 꺼내긴 경우가 없는 것 같아,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
어렸을 적 리비에르와는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 엄밀히 따지자면 진심으로 서로를 싫어한 건 아니고, 한 아이를 두고 질투를 하는 사이였다.
철없던 시절의 생각이 나 카신이 쓴웃음을 지었다.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걸 보면, 역시 그 아이는 찾지 못한 거겠지.
자신보다도 더, 그 아이에게 진심이었던 것을 알기에 감히 물어볼 수 없었다.
“조만간 찾아뵙겠습니다. 리비에르 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미리 연락을 주시면 시간을 비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리비에르는 카신과 가볍게 묵례를 주고받곤,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훌륭한 기사가 되겠다고 하더니, 정말 그 약속을 지킨 것 같아 괜히 자신이 키운 아들처럼 마음이 뿌듯해졌다.
* * *
“만찬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초대에 응해줘서 고맙네. 칸나 영애.”
칸나와의 만남은 실로 오랜만인 일이었다. 세월이 흐른 만큼, 그녀의 모습은 시몬만큼이나 성숙해져 있었다. 백옥처럼 반짝이는 피부와 금발의 머리칼은 화려하고, 고왔다.
보라색 드레스는 몸에 착 달라붙어 굴곡진 몸매가 훤히 드러났고, 붉게 칠한 도톰한 입술은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주렁주렁 달고 있는 값비싼 보석들은 뜯어보면 화려해 보이나, 그녀의 아름다움보단 훨씬 덜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아카데미 동료들과 함께하는 만찬을 앞두고, 간단하게 칸나와 먼저 티타임을 가지기로 했다.
시몬도 평소보다 좀 더 화려하게 치장했다. 칸나는 오랜만에 보아도 여전히, 아니, 더 멋있어진 황제의 모습에 잠시 넋을 놓았다.
시몬은 칸나에게 의자를 빼준 뒤, 그녀가 앉고 나서야 자신도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티를 준비해온 시녀들이, 두 사람 앞에 놓인 찻잔에 정성껏 따라 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물러났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공기가 살짝 가벼워진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칸나와 시몬은 아카데미 시절부터 유명했다.
시몬은 황족이고, 칸나는 고위 귀족의 외동딸이니 당연히 두 사람 사이에 소문이 많이 돌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선황제 폐하와 마르웰 가의 공작 사이에 두 사람의 약혼 이야기가 오고 가기도 했었다.
선황제 폐하는 비록 전쟁광이었으나, 시몬에게는 인자하고 다정한 아버지였다.
그는 시몬의 혼인을 급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그래서 시몬에게 ‘제안’을 하긴 했지만 강압은 없었다.
시몬은 귀족들의 눈을 피하고 싶었다.
칸나 역시 아버지가 숨통을 조여오는 듯한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거짓으로 만남을 시작했다.
물론 후에 가서야 칸나의 마음이 진심으로 변해버렸지만, 보기 좋게 차였었지.
그런 부끄러운 과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두 사람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염문이 돌았다.
즉위하자마자 혼인에 대한 안건부터 들이미는 귀족들 덕분에 시몬은 평소보다 더 멍청하고 문란한 척 지내야 했다. 게다가 코르티잔 출신의 여인에게 빠졌다는 소문까지 냈다.
그 덕에 마르웰 가도 잠시 꼬리를 내렸었지만, 이제는 진짜 서로의 혼기가 꽉 찬 만큼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한 모양인지 칸나를 불러들였다.
칸나는 타 제국으로 유학을 떠나있었다고 했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러고 싶을 정도로.
간략하게 그녀에게 근황을 전해 듣고, 시몬은 칸나와 또다시 시작된 ‘혼인’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그것이 칸나를 다른 이들보다 좀 더 일찍 만난 이유였으니까.
“티는 좀 입에 맞나?”
“네. 아주 맛있습니다.”
칸나는 눈을 내리깔며 조심스레 웃었다.
* * *
플로라는 사르트의 부탁으로 광장에 있는 무기 상점으로 향했다. 그의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미루고 미뤘던 카신의 선물도 샀다.
그가 연회를 얼마나 다닐지는 모르겠으나 플로라의 기억에는 카신이 기사단 정복을 차려입은 모습이 선연히 남아 있었기 때문에 연미복이나 정복을 입을 때 달면 좋겠다 싶어 사파이어가 박힌 검 모양의 은 브로치를 샀다.
크기는 작은 것이 값은 꽤 나가서 고민하긴 했으나, 카신이 선물한 무기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값이리란 걸 알기에 큰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성으로 되돌아가는 길이었다.
사람이 북적이는 광장을 빠져나가려던 플로라의 걸음이 일순 멈췄다.
“그거 들었어? 칸나 영애가 오늘 폐하께 만찬을 초대받아 성으로 가셨대.”
숙덕거리는 소리 중, 폐하와 칸나 영애에 관한 이야기가 섞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약혼이니, 혼인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모양이야. 그 일로 마르웰 가 놈들이 얼마나 우쭐대던지.”
“……내버려 둬. 원래도 콧대 높은 놈들이 자랑 하나 더 하는 것뿐이지, 뭐. 제 주인의 권력이 지들 것인 마냥 구는 게, 가문에 먹칠하는 일인지도 모르는 것들.”
플로라는 잠시 이를 악물었다.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었던 건가?
칸나 영애가, 성에 왔다고.
폐하께서…… 그녀를 만찬에 초대했다고?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온갖 나쁜 상상들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중심이 뒤흔들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플로라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성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기분이 가라앉은 것은 여전했다. 사르트가 의아한 얼굴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물었으나, 이런 마음을 누구에게 터놓을 수는 없기에 그저 피곤한 모양이라고 변명했다.
이리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일상이 뒤흔들리는 일은 처음이라,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플로라 경?”
기사단 본부로 향하던 플로라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아, 단장님?”
플로라가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옆에는 이브니에가 있었는데, 무언가 못마땅하다는 듯한 차가운 눈빛으로 플로라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플로라가 적의의 시선을 눈치챈다거나, 신경 쓸 정신은 아니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마침 단장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는데, 잘 됐다. 플로라가 가타부타 말도 없이 그저 작은 상자를 카신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지?”
“늦었지만 선물이에요. 저도 드리기로 했었는데…… 경황이 없어 잊고 있었네요.”
“아, 선물.”
카신은 기사단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
어디 파티라도 가는 모양인지 멀끔한 연무복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앞머리도 깔끔하게 밀어 올린 것이 높은 고위 귀족처럼 고고한 태가 흘렀다.
“아, 어디 가시는 길이십니까? 그럼 다음에…….”
상자를 건네다가, 도로 거두려 하자 재빨리 그것을 받아든 카신이 설핏 미간을 구겼다.
“줬다 뺏는 게 어디 있나.”
“불편하실까 해서요.”
“괜찮아. 오늘 성밖에 다녀온 모양이지?”
“아, 네. 사르트 경이 부탁한 일이 있어서요.”
이브니에와의 약속인 걸까.
계속 서늘한 시선이 닿자, 감각이 무뎌져 있던 플로라도 이제 슬슬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플로라가 얼른 돌아설 궁리를 하는 사이, 카신은 무슨 이야기를 더 하며 그녀를 눈앞에 붙잡아 둘지 고민했다.
그러나 결국은 타당한 이유가 없었다.
그는 약속에 가야 하기도 했고.
“그럼 저는 사르트 경이 시키신 훈련이 또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플로라는 기회를 틈타 묵례하고 쪼르르 자리를 떠났다.
그녀의 떠나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단장을 올려다보던 이브니에가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단장님?”
그의 시선을 어떻게든 잡아끌고 싶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단장의 시선을 몽땅 가로채버린 저 신입 기사가 싫었다.
그러나 이브니에의 속을 알 리 없는 카신은 끝끝내 그녀에겐 시선을 주지 않았다.
어딜 가는지도, 선물이 무언지도 보여주지 않았다.
플로라에게 받은 선물을 보여 달라고 떼쓸 권리도 없고, 어딜 가는지 대답을 요구할 위치도 못 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브니에 경. 할 말 없으면 이만 돌아가서 쉬어. 난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 한다.”
차가운 말은 언제나 비수처럼 마음에 꽂혔다.
괜찮다고 자기 위로를 해도, 아픈 것은 여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