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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61)화 (61/154)

61.

“갑자기 생긴 딸 때문에, 나는 내 친구를 잃는 느낌이 들었어.”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잊히지 않는 이야기인 듯 시몬의 말은 막힘없이 이어졌다.

그의 마음을 오랫동안 어지럽혔던 일이라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목소리에 회한이 뚝뚝 묻어났다.

“그래서 그날은 스승님을 붙잡았어.”

“…….”

“황태자의 명령인 탓도 있지만, 그 역시 외로워하는 나를 안쓰럽게 생각했다는 걸 알아. 내 청을 거절할 수 없었겠지.”

괴로운 듯 깊은 곳에서부터 한숨을 내쉬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플로라는 시선을 가볍게 내렸다. 어린 나이에 죄책감을 가질 만도 했던 일이 분명했다.

“사실…… 난 처음에는 잘 됐다고 생각했어.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내게 걸림돌이 되었다고 생각했던 애가 없어지니 앞으로는 리비에르와 실컷 놀 수 있겠다고 생각했거든.”

감히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둔 일을, 섣불리 괜찮다고,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위로하는 것은 몹쓸 짓이었다.

플로라 역시 그런 일이 있고, 단순한 위로의 말로는 조금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기에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리비에르가 제국을 떠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알았지.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죄책감은 한순간에 밀려왔어. 외면하려고 했던 현실을 마주했고, 그래서 더는 내 힘으로 그 감정을 지워낼 수 없었지.”

그날 리비에르가 제시간에 저택으로 돌아갔더라면.

나 때문이야. 내가 리비에르를 붙잡아서…… 그 애를 잃었어.

내가 마음을 곱게 쓰지 않아서 그 애가 사라진 거야.

그래서 결국 난…… 리비에르를 아프게 했어.

어두운 죄책감은 끝도 없이 시몬을 수렁에서 빠져나갈 수 없게끔 만들었다.

“그가 제때 집으로 돌아갔더라면 적어도 눈 뜨고 코 베이는 일은 없었을 거야. 딸의 행방에 대한 실마리 정도는 붙잡을 수 있었겠지.”

“…….”

“그래서, 리비에르가 여전히 희망을 가지고 있다면 나 역시 뭐라도 해주고 싶어. 그 사람의 오랜 쓸쓸함을 덜어줄 수 있다면. 뭐든.”

시몬이 옅게 웃었다.

플로라는 이번에는 완전히 그를 향해 손을 뻗고 말았다.

그의 어깨를 가볍게 말아 쥔 뒤에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플로라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서는 황급히 손을 내렸다.

“송구합니다. 폐하. 제가…….”

“시몬이라고 불러야지. 플로라.”

“……시몬.”

머리 위로 따뜻한 손길이 닿는다.

익숙한 손길에 요동치던 심장이 조금은 차분해지고, 간질거렸다.

“우리 둘만 있을 때는. 뭐든 괜찮아. 네 마음 가는 대로 해도 돼.”

시몬의 말에 잠시 침묵했던 플로라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가는 대로…….

플로라는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저, 저도…… 마력을 되찾는 훈련을 열심히 해서 시몬과 리비에르 님의 죄책감을 조금 덜어드리고 싶어요. 열심히 할게요.”

“그래도, 지금은 네가 더 중요해. 플로라.”

플로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몬을 봤다.

살짝 놀란 듯한 플로라의 표정을 바라보던 시몬이 눈을 깜빡이다가, 마른침을 삼키곤 횡설수설했다.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네 안전이 더 중요하다고. 나와 리비에르를 위해서 네가 무리할 필요는 없단 소리야.”

“아, 네. 명심하겠습니다.”

플로라는 절대 다른 소리로 착각하지 않았다는 듯, 당연한 말이라는 듯 과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알게 모르게 마력 소모가 심해질 거야. 힘들다 싶으면 바로 리비에르나 내게 이야기해. 우리 마음의 짐을 덜자고 너를 이용하고 싶지 않아.”

“그런 이유만은 아닌 거 아시잖아요. 저도 제 마력이 궁금하고, 또 잃어버린 기억 또한 되찾고 싶어요.”

“그래. 그 마음이 중점이 되어야 해.”

“……명심하겠습니다.”

“리비에르에게 매일 보고 받을 거야. 그리고 내가 직접 네 상태도 확인할 거고. 문제가 생기면 그만두라고 명령할 수도 있어.”

“…….”

“네가 다치는 건 싫어.”

괜히 목덜미가 뜨거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늘 아래 앉아 있는 것도 피어오르는 열기를 식혀주지 못했다.

플로라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다치는 게 싫다니. 기사단에 소속된 플로라에게는 허무맹랑한 소리였지만, 자신을 생각해주는 따뜻한 마음 때문인지 심장이 고장 난 듯 뛰어댔다.

“이, 이번 사냥 대회 준비는 잘 되어 가나? 입단 후 처음 열리는 행사일 텐데.”

플로라가 끝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은빛 머리칼을 매만지던 손을 내린 시몬이 화제를 돌렸다.

“네. 준비할 건 따로 없지만, 열심히…… 해야죠.”

“이번 사냥 대회에는 여명 기사단도 참가한다. 그래서 나도, 응원을 갈 예정이고…….”

시몬이 기사단의 사냥 대회에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아마도 즉위한 이후에는 처음일 것이었다. 황태자 시절에는 종종 함께 사냥 대회에 참가하기도 했었지만 시간이 맞지 않았던 탓도 있고, 공식적인 행사에 괜한 위험을 안고 움직여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어떤 이유가 생겼으므로, 그는 사냥 대회에 참석해 기사단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기로 결심했다.

에르네의 반발이 심했지만, 결국 그도 시몬의 황소고집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지.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에르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아…… 그럼 더 열심히 할게요. 시몬을 위해서.”

플로라가 말간 웃음을 지었다.

시몬을 위해서.

진심인지, 빈말인지 모르는 말에도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진다. 시몬도 그녀를 마주 보며 옅게 웃었다.

* * *

“에르네.”

<……예. 폐하.>

“건국제가 있기 전까지는 카신 단장과 얘기를 끝내볼까 하는데, 네 생각은 어때?”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에르네는 시몬을 바라보았다.

플로라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무언가 마음이 조급해진 듯한 얼굴이었다.

카신과 플로라가 함께 다정하게 훈련장을 떠나던 모습을 떠올린 에르네는, 혹 그 일 때문인가 싶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성적인 감정은 역시 사치야.

에르네는 자신의 인생에 그런 감정은 더 이상 없을 거라고, 다시 한번 굳게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데도 아스라이 떠오르는 어떤 이의 잔상에 미간을 좁힐 수밖에 없었다.

전부 쓸데없는 감정이야.

“카신에게도 곧 있을 모임에 대해 전달했지?”

시몬의 말이 다시 들려온 뒤에야, 에르네는 사색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네. 하필 바쁜 시기에 이런 걸 한다며 불만이 많긴 했지만, 참석하겠다고 답장은 왔습니다.>

시몬이 초대장을 읽으며 표정을 구겼을 카신을 떠올리곤 짧게 웃었다.

“나머지는 다 참석할 거고. 그럼 됐네. 모처럼 재미있겠어.”

약속했던 시간이 다가오는 듯하자, 시몬의 발걸음은 좀 더 가벼워졌다.

* * *

리비에르가 성으로 출근하긴 하나, 마법부의 마법사들 외에 다른 이들과 만날 일은 적었다. 리비에르를 만나보겠다고 마탑까지 찾아오는 귀족들이 많은데, 그들과 마주치는 게 귀찮기도 하고, 소피에게 시달리고 있기도 해서 밖을 나온 적이 없었다.

오늘은 모처럼 출근한 뒤 외출 시간을 가진 날이었다. 이어지는 야근에 피곤하다고 하니, 소피는 이런 생활을 얼마나 했는지 모르겠다며 또 구박을 했기에 군말 없이 슬그머니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대마법사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힘을 소비하고, 또 하네칸 제국을 위해 열심히 일했는지 리비에르는 모두 알고 있었다.

“참 대단해.”

그였다면 벌써 말라비틀어졌거나 아마 대마법사를 사직하지 않았을까.

어쨌든 힘써준 소피에게 고마웠고, 그녀가 존경스러웠다.

벌써부터 이렇게 피곤한 것을 어떻게 견딘 것일까.

리비에르는 말간 하늘을 올려다보다, 인적이 드문 길을 따라 걸었다.

종종 성의 고용인이나 기사들과 부딪치긴 했지만, 다행히 귀족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매일 세상을 떠돌며 여행하다 서류로 발 디딜 틈 없고, 불완전한 결계 때문에 매일 사건 사고가 터지는 마탑에 갇혀 있으려니 답답한 마음은 들었다.

이 또한 이제 견뎌내야 하는 것인가.

리비에르는 순간 플로라를 떠올렸다. 모든 것이 불편해도, 이곳에 남아 있을 가치는 충분했다. 헛된 희망을 가지면 안 된다는 걸 마음으로 알고 있어도 불쑥 가슴 한구석이 두근거리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이레나 베일리스.

이제 너무 오래되어 빛바랜 그 이름이 머릿속을 메웠다.

자신의 의심이 사실이 되길 바랐다.

“……리비에르 님?”

그렇게 한적한 숲을 찾아 거닐던 리비에르를 누군가 불렀다.

리비에르가 묵직한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자, 낯선 이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리비에르는 그가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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