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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60)화 (60/154)

60.

플로라는 최대한 감정을 추스르며 폴을 바라보았다. 폴은 자신을 걱정해주어 고맙다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아직 초점이 흐릿하긴 했으나 그저 눈을 마주치는 것으로도 그의 감정이 전달되는 것 같았다.

몇 분을 더 카신과 함께 폴의 곁에서 머물던 플로라는 아쉬운 발걸음을 겨우 돌렸다.

“깨어나서 다행이야.”

“……네.”

카신과 기사단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성의 바닥을 축축하게 적시던 피가 눈앞에 선연했다. 폴이 의식을 잃은 채 백작성에 왔던 사건은 마치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 * *

카신이 주었던 활은 언제 부러졌었냐는 듯 멀쩡히 돌아왔다. 플로라는 활을 쏘는 연습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팔이 뻐근해질 정도로 연습해도 실력이 한참 부족한 것 같았다.

그때 곁에 누군가 다가왔다. 다른 사람이 온 것은 오랜만이라 그 기척에 신경이 예민해졌다. 하지만 곧 플로라의 집중이 흐트러졌다.

익숙한 체향이 바람결에 실려 왔다.

바쁘게 삶을 살더라도 언제나 머릿속에 남아 있는 사람.

“폐하.”

시몬이 여긴 무슨 일일까.

플로라는 활을 내리고, 자신의 곁에 선 이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이라 그의 얼굴을 보고 싶으면서도, 감히 올려다볼 수가 없었다.

가깝다고 느껴졌던 사람이 한 발 멀어진 듯했다. 오르지 못할 나무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몬과 자신 사이에 벌어진 거리만큼 공허가 가득했다.

“플로라.”

함께 제도에 나가, 그녀의 상황에 대해 듣고 난 뒤 처음으로 만났다.

종종 시몬은 플로라를 보러 오긴 했지만, 건국제 문제로 처리해야 할 사안들이 많아 이리 말을 걸 틈은 별로 없었다.

제국민의 안전을 위해서도, 또 자신이 믿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도, 시몬은 황제로서의 책무를 다해야 했다. 섣불리 어리석은 행동을 했다간 어떤 화를 입게 될지 몰랐기에, 그저 센칸의 공격에 대비하고 또 대비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황제씩이나 되었어도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에 무력감을 느끼면서도, 시몬은 결코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이 제국을,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내기 위한 간절한 마음 하나로 그동안 외면하고 살았던 모든 것들을 직면하기 시작했다.

플로라와 시몬은 자리를 옮겼다. 아무리 인적이 드문 훈련장이라고는 하나, 오픈되어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말을 주고받기가 어려웠다.

지난번에도 함께 대화했던 커다란 나무 기둥 밑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시몬은 플로라에게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그녀를 보면 늘 고민이 앞섰다.

오랜만에 하는 대화라 그런지 더 떨렸다. 자신이 보고받은 것 외에 별일은 없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도 됐다.

표정으로는 플로라란 사람을 완전히 알 수 없었기에, 더욱 알고 싶은 감정이 커졌다.

“리비에르가 성으로 복귀했어.”

“……네, 들었습니다.”

“업무에 적응하고 나면, 네게 기별을 주겠다는군.”

너무 오랜만인 것일까.

어쩐지 전보다 플로라가 멀어진 것만 같아 걱정되고, 눈치도 보였다. 그녀를 향한 감정이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것 같아 여러모로 심란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시몬은 멍하니 플로라를 보았다. 알 수 없는 벽이 생겨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굉장히 거슬렸다. 금방이라도 도망가 버릴 것 같다. 어떻게든 곁에 붙잡아두고 싶었다.

이런 감정은 생소하고 낯설고, 가끔 제멋대로 굴어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완전히 지우고 싶진 않았다.

“플로라. 너는 네 뿌리를 찾고 싶다는 생각해본 적 없어?”

시몬은 나무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제야 고개를 든 플로라가 잠시 시몬을 바라보았다.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어요. 하지만 해야 할 일이 많아 미루다 보니, 자연스레 잊히더라고요.”

“가족이 아직 남아 있을 수도 있잖아.”

“글쎄요. 거기까지는 생각을 안 해봤네요. 살아 계신다고, 절 기억이나 할까요?”

플로라는 애초에 가족에 대한 애틋함이 없었다.

기억하는 무언가라도 남아 있으면 그리운 감정이라도 안고 있었을 텐데, 아예 기억이 없으니 호기심 그 이상, 이하의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플로라의 말에 시몬은 ‘흠…….’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곧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리비에르는 있잖아.”

“…….”

“여전히 생사조차 모르는 자신의 수양딸을 찾으러 다니고 있어.”

생사조차 모르는 딸…….

리비에르의 눈빛에 비치던 쓸쓸한 감정이 다시금 보이는 것 같았다.

“그대를 낳아준 분들이 살아 있다면 분명 아직 그대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

“그게 부모라는 거거든.”

문득 르네가 떠올랐다. 원치 않은 임신을 했지만, 그 아이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제 목숨을 다 바쳤던 사람이었다. 그때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스스로에게 대입해 생각해보니 마음이 조금은 흔들리는 듯했다.

시몬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가족을 되찾아주고 싶은 걸까?

플로라에게는 허황된 꿈이고, 생각도 해보지 않았던 일이라 갑작스러웠다.

플로라의 삶에 부모는 없었지만 자신을 ‘신’이라 칭하는 사람은 있었다. 낳진 않았어도, 만들어낸 ‘창조주’라고 했지. 삶을 구원해준 자신에게 경배해야 한다고 세뇌했다.

그리고 센칸의 기사들은 모두 아이든을 진짜 ‘신’처럼 여겼다. 자신의 진짜 부모가 누군지도 모른 채, 정말 자신이 아이든의 손에 의해 태어났다고 맹신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기억을 잃고, 혼란스러워하는 아이일수록 그런 신념이 강해졌다.

부모 또한 그런 비슷한 사이비 종교 같은 것이리라 막연한 생각이 들었었는데, 르네를 봐도 그렇고 리비에르를 봐도 거기까진 아닌 것 같았다.

자신의 품 안에서 태어난 생명. 그리고 그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

그곳은 아직 플로라가 범접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었다.

단순히 소중하게 생각하는 시몬을, 온 마음 다해 지키고 싶은 것과 비슷한 감정일까?

“……가족을 찾게 된다면 어떨까요. 잘 모르겠어요.”

마력을 되찾으면 잃어버렸던 기억까지 자연스레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어떤 충격을 받게 될지 겁이 나기도 하고, 또 시몬이 말했던 가족이 존재한다면 자신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건, 참 쓸쓸한 일이야.”

시몬은 자신의 아버지, 선대 황제를 떠올리는 것 같았다.

주홍빛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는 것을 보며 플로라는 저도 모르게 그를 향해 손을 뻗을 뻔했다. 마지막 순간에 정신을 차리지 않았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

“지킬 것이 많아지면 삶이 더 위험해진다고만 생각했습니다.”

“…….”

“제게 위로가 되거나, 든든할 거란 생각은 못 했어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플로라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깨달으며 옅게 웃었다.

“너는 내 편인가?”

시몬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플로라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시선을 맞추자, 애써 억누르고 있는 감정들이 다시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아아. 이래서 그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했던 거였지.

왜 이리도 슬픈 표정일까. 왜 이리 쓸쓸해 보일까.

플로라는 잠시 대답할 말을 잃은 채 이를 악물었다.

“언제나 폐하의 편입니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인 것 같았다. 그를 떠날 수 없었다. 허락해준다면 언제고 그의 편에 서 있고 싶었다.

플로라의 대답이 만족스러운 듯 시몬이 옅게 웃었다.

“고마워. 플로라.”

다친 상처에 새 살이 돋아나듯 간질간질한 감각이 마음을 뒤흔들었다.

플로라는 헛기침을 겨우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리비에르 님께서도 얼른 딸의 행방을 찾을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분은 너무 쓸쓸해 보이셨어요.”

이야기의 방향을 돌리려 했던 말에 분위기가 급격하게 가라앉는 것 같았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돌린 플로라가 축 가라앉은 듯한 시몬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도 마찬가지야. 리비에르의 딸이 실종된 사건에는 내 탓도 있을 테니.”

“……네?”

플로라는 눈을 깜빡였다.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난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직전까지 성에서 혼자 지냈어. 친구도 없었고. 모두가 황태자로서의 품위와 예의에 대해 가르침을 줄 때, 유일하게 날 격식 없이 대했던 사람이 리비에르였어. 그는 참 재미있었어. 마법을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아니, 어린 나는 그를 신기해했지.”

“…….”

“그때까지만 해도 리비에르에게는 수양딸이 없었어. 베일리스 공작가의 가주가 전쟁에 출전했다 죽고 난 후, 그 딸을 입양했어. 리비에르는 베일리스 공작가와 친분이 깊었거든. 네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공녀만 남은 공작가였으니, 친척들이 그 재산을 탐하려 득실거렸지. 리비에르는 그 공녀를 지키려 그런 선택을 한 거야.”

플로라가 알지 못했던 사건의 이면이었다.

물에 젖은 듯 축 가라앉은 시몬의 목소리가 마음 끝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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