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센칸의 야심한 밤. 스산한 공기가 메린 성 내부에 휘몰아쳤다. 보초를 서는 기사들은 별이 촘촘하게 떠 있는 짙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길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평화로운 꼴이 없는 메린 성에서 유일하게 마음이 고요해지는 때다.
성의 지하에서는 여전히 낮처럼 활발한 연구와 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다. 진짜 미치광이들은 낮보다 밤을 더 선호했다. 대부분의 밤이 이리 광기로 얼룩져 있었다.
오늘 실험은 특별했다. 실험실의 긴 의자에는 파르베가 누워 있었다. 하네칸 제국의 마스터, 사르트 알펜네에게 당했던 그의 상처는 완전히 회복된 상태였다. 이제 실험을 진행할 수 있었기에 곧장 실험대에 올랐다.
아이든은 모처럼 경직된 눈으로 검은 액체를 주사기에 담았다.
“준비됐나? 파르베 경.”
아이든이 파르베를 바라보며 물었다.
파르베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이든 님.”
이윽고 아이든은 손에 들린 주사기를 내려다보았다.
마법석에서 딱 이 마력만 빼내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마지막 실험. 플로라가 눈이 돌아 성을 뒤집고 나가기 직전에 있었던 실험에서 실마리를 얻었다.
비록 그 일로 플로라를 잃었지만, 이 연구를 통해 그는 다시 라비우의 신임을 회복할 수 있었다. 플로라와 견주어도 손색없을 만큼 가치 있는 일이었다.
긴 시간 동안 많은 연구를 거쳤고, 아직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불안정한 마력이나마 다룰 수 있게 됐다. 마법석 자체가 소모 아이템이라, 시간의 제한도 있고 부작용도 있긴 했지만 여기까지 진전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동안 쏟아부은 시간들을 생각하면 큰 의미였다.
“시작하겠습니다.”
실험실은 너무도 고요해서 단둘뿐인 것 같지만, 사실 주변에는 많은 학자들과 연구원, 그리고 라비우까지 모여 있었다. 기사단 소속의 기사에게 주사를 놓는 것은 파르베가 처음이었다.
여기서 성공한다면, 당장 플로라가 하네칸에 붙어 어떤 폭탄을 터트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대비책을 마련하기 한결 쉬워지리라.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춘 라비우가 얼른 시작하라는 듯 고갯짓하자, 아이든은 파르베의 팔에 주사를 놓았다.
일정 시간이 지나자 주사를 놓은 팔에 검붉은 핏줄이 툭툭 돋기 시작하면서 파르베의 발작이 시작됐다.
“……으, 으윽.”
이미 몸을 단단히 고정시켜뒀기 때문에 의자가 덜컹거리긴 해도 굴러떨어지진 않았다.
센칸의 완연한 기사로 성장한 파르베는, 플로라에 버금가는 인재로 주목받고 있는 중이었다. 이 마력까지 얻게 된다면 플로라의 명성을 뛰어넘는 기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파르베는 욕심이 많았고, 그래서 센칸에서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자리까지 오르고 싶어 했다. 어차피 자의가 아니긴 했지만 만약 실험을 희망하는 사람을 뽑았다 하더라도 그는 신청했을 터였다.
그도 마력을 가지고 싶었다. 플로라가 명성을 얻은 이유 중에는 ‘마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 또한 큰 몫을 했으니 말이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녀는 마력을 쓰지 못했는데도, 아이든과 라비우에게 큰 신임을 얻었다.
처음에는 굉장히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소문처럼 두 남자가 그녀를 마음에 담아 이리 집착하는 줄 알았는데, 이성적인 감정이 있긴 있어 보여도 확실히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마력. 마력이 무엇이기에.
파르베는 잠시 자신이 하네칸의 병사로 위장해 마굴 토벌을 나섰던 기억을 떠올렸다. 사르트 알펜네가 마수를 상대로 검에 담았던 엄청난 힘이 순간, 산전수전 다 겪으며 살아남은 그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치게 했었다.
그 힘을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감내할 수 있었다.
파르베는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 * *
그리 평화로운 일상은 아니었지만 요즘은 더더욱 제국 내의 소문이 거세져 시몬의 피곤이 늘어만 갔다. 다른 무엇보다 칸나 영애가 며칠 전 서쪽 대륙 에비레니아에서 돌아왔고, 그 일로 다시금 제국 내에 드디어 황제가 혼인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예전에 플로라를 성에 들이는 일을 빌미로 혼인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적당한 영애들을 골라 보고서를 올리라는 말에 최근, 진짜로 그 서류가 시몬의 손에 들렸다. 거기에는 칸나의 이름 또한 적혀 있었다.
아마 그 일로 다시 제국에 불려왔을 것이 분명했다.
“칸나와는 연락이 닿았나?”
시몬의 물음에 에르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한 날을 알려주시면 곧 성으로 들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시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다 된 것 같군. 이만 나가지.”
에르네가 그 뒤를 따랐다. 집무실을 나선 시몬은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응접실로 향했다. 이미 황제의 일정대로 앞을 지키던 기사들이 경의를 표하곤 커다란 문을 열어 주었다.
응접실 안에 있는 사람은 리비에르였다. 두 번째 소문의 근원이었다.
리비에르가 하네칸으로 다시 돌아왔다느니, 이제 대마법사의 자리가 채워진다느니. 사람들의 말은 빠르게 퍼졌다. 어쩌면 칸나와 시몬이 혼인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소문보다 더 제국 내에 이슈로 돌고 있을지 모르는 소문이었다.
워낙 오래 제국을 비운 자이니, 귀족들도 확신하지 못해 몇 번 회의에서 리비에르에 대해 언급했었다. 그때마다 시몬은 논의 중이나 정해진 바가 없다고 대답했다. 이제 공식적으로 리비에르가 성에 왔으니, 또다시 이야기는 발 빠르게 퍼질 것이고 소문이 기정사실화되었다는 걸 알 터였다.
금수가 놓인 폭신한 소파에 앉아있던 리비에르는 황제의 등장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략 일주일 전에 만났던 때와는 행색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하네칸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오랜만에 대마법사의 복장을 입고, 덥수룩하게 났던 수염도 자르고 나니 시몬이 어릴 때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기는 했지만 예전보다 더 건강해 보였다.
선천적으로 약한 체력을 극복하고 잃어버린 딸을 위해 대륙 곳곳을 오랜 시간 쉬지 않고 돌아다녔을 테니 살집이 조금은 붙은 모양이었다.
그의 사정을 잘 아는 시몬으로서는 지금 리비에르의 모습이 보기 좋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안쓰러웠다.
“이만 앉게. 리비에르.”
시몬이 소파에 앉자 그제야 리비에르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리 성에서 보니 감회가 새로워. 마지막으로 봤을 땐 내가 그대에게 스승님이라고 부르며 가지 말라고 매달렸었지.”
“……그렇네요. 하지만 바뀐 것이 거의 없어 놀랐습니다.”
“뭐, 바뀔 것이 있나.”
두 사람이 소소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과거를 회상하던 사이, 시종이 차를 내어왔다.
“얼굴이 좋아 보여.”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와 편히 쉬었습니다.”
“……제국에 남겠다고 해서 솔직히 놀랐어.”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폐하의 곁을 너무 오래 비웠으니까요. 돌아오겠다고 약속드렸지 않습니까.”
과거의 일이었다. 어린 시몬은 스승을 잘 따랐고, 그래서 제국을 떠난 그를 울며 붙잡았다.
아니, 사실 떼쓰고 명령하고 화내지도 못했지.
어린 나이에도 리비에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잘 알았고, 그 일이 자신 때문이라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를 떠올리자 독한 약초를 한 움큼 씹어 넘긴 것처럼 속이 썼다.
“플로라는 그곳에 있던 아이들을 전부 본 것이 아니라더군. 그래서 그대에게 도움을 주지 못할 수도 있어.”
괜스레 말을 돌리자, 리비에르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들어 가볍게 입술을 적신 후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붙잡을 수 있어요. 그리고…….”
“…….”
리비에르의 눈빛이 조금 짙어졌다.
시몬이 고개를 갸웃하곤 그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플로라 경 말입니다. 반짝거리는 머리칼을 보니 옛날 생각이 나더군요. 그 애도 비슷한 머리 색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플로라의 머리 색…….
시몬이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서였나. 이곳에 남기로 한 것이.
“리비에르. 무슨 생각인 거지? 플로라는…….”
시몬은 말을 멈췄다. 플로라는 센칸에서 왔지만, 진짜 뿌리는 어쩌면 센칸이 아닐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럼 가능성은 언제든 열려 있는 것이 아닌가.
이상하게 피가 거꾸로 역류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제가 업무에 적응하고 나면 바로 플로라 경의 마력이 돌아오는 것을 돕겠습니다. 어차피 시간을 두고 천천히 길게 봐야 하는 일이니, 저도 여유가 있을 때 돕고 싶어서요.”
“……좋아. 그렇게 해.”
잃어버린 딸이 어쩌면 플로라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으나, 의외로 같은 의심을 하는 듯한 리비에르는 굉장히 침착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