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나는 좀 이따 먹을 테니, 경은 먼저 가서 먹어. 한가하게 성 밖으로 나갈 시간까진 없어.”
“그럼 기사단 식당으로 같이 가요. 단장님.”
이쯤 하면 비 맞은 고양이처럼 축 늘어져서 돌아가곤 하던 이브니에가 오늘은 꽤 큰 결심을 하고 온 것 같았다.
카신은 똑바로 이브니에의 얼굴을 마주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아직 다 정리된 건 아니었지만 그도 더 일을 방해하는 것은 더 이상 봐줄 수 없었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이야. 경.”
“…….”
“나는 이번 임무에서 돌아오면 같이 식사해주겠다고 약속한 적이 없어. 그저 경이 돌아오면 같이 식사하자고 하고, 대답을 듣기도 전에 가버린 거지.”
이브니에는 ‘내가 그랬나?’ 하는 얼굴로 눈을 굴리다가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멜키르는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흉흉한 기세에 끼어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남녀 간의 연애 문제란 정말 이리 복잡한 것인가.
볼일을 보고 온다거나, 배가 고파서 참을 수 없다는 핑계라도 대고 이 자리를 떠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서류를 보는 척하면서도 단장실 안의 무거운 공기에 압도당한 멜키르는 어떤 말을 해야 의심받지 않고, 여길 떠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이브니에도 평소처럼 웃으며 장난으로 넘어가거나 풀이 죽어 있지만은 않았다. 단장의 요즘 생활을 생각해보면 이브니에의 걱정이 틀린 것도 아니긴 했다.
멜키르도 카신에게 몇 번 식사라도 하고 와서 일하시는 게 어떻겠느냐 권유했지만 며칠째 혼자 먹고 오라는 소리만 들었다. 그 뒤로도 그는 식사하지 않았다.
몇 번 자리를 떠나 한참 돌아오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식당을 다녀온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고 여기서 이브니에의 편을 들자니, 상관에게 들들 볶일 것에 눈치가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침묵이 답이었다.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멜키르도, 이브니에도 사색에서 깨어나 놀란 듯 어깨를 들썩였다.
카신이 문을 열어주는 것을 허락하자 곧 문이 열렸다.
“저어…… 들어가도 되는 겁니까?”
열린 문틈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반가운 얼굴, 플로라였다.
참. 오늘 복귀한다고 했지.
멜키르는 지금 이 분위기를 깨트려준 누구에게라도 반가움을 느꼈을 테지만, 플로라의 멀쩡한 모습을 보니 유독 더 반가웠다.
그녀의 병문안을 자주 다녔던 멜리아가 미주알고주알 플로라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어 상태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그도 빠삭하게 알았다.
심한 부상이었다고 했는데, 어디 하나 크게 잘못된 것 없이 멀쩡히 다시 돌아온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플로라는 단장실 안에 무거운 기세를 느낀 것인지, 섣불리 들어오지 못하고 이브니에와 카신, 그리고 멜키르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들어와.”
카신의 허락에 주춤 단장실 안으로 완전히 들어서자, 문이 닫혔다. 카신은 잠시 플로라를 보았다가, 다시 제 앞에 서 있는 이브니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브니에 경. 더 할 말 없으면 이만 나가주겠나.”
무어라 반박하려던 이브니에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어깨까지 살짝 내려간 것이 드디어 고집을 꺾을 모양인 듯했다.
“식사는 꼭 하세요. 단장님.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이브니에가 정중하게 인사하고 돌아섰다. 구석에 멀뚱히 서 있는 플로라와 눈이 마주쳤다.
플로라가 가볍게 묵례했지만, 이브니에는 본 체도 하지 않으며 단장실을 빠져나갔다.
* * *
“이제 복귀한 건가.”
이브니에가 단장실을 떠나고, 그 빈자리를 플로라가 채웠다.
“네. 숙소에 짐을 두고 바로 내려왔습니다. 단장님께 복귀 보고를 하기 위해 들렀습니다. 그동안 살펴주신 덕분에 잘 나았습니다. 걱정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다 나았다면 다행이고. 식사는 했나?”
“아직 먹지 않았습니다.”
“그럼 식사한 뒤 일정부터 복귀하는 거로 해. 불편한 부분이 아직 있으면 상관에게 꼭 말하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플로라의 볼 일은 간단했다. 그녀는 카신과 짧게 인사를 나누곤 단장실 밖을 나섰다.
식당에 들어서자, 아직 그녀가 복귀했다는 것을 몰랐던 동료들이 깜짝 선물을 받은 것처럼 좋아했다.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플로라는 첫날이라고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제 언제든 죽음의 위협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단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잘 알았다. 그렇기에 하루빨리 복귀하고 싶었다.
첫날은 수월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라 그런지, 다행히 그녀가 무얼 하든 시비를 걸거나 잡일을 시키려는 상관은 없었다. 플로라는 한결 편하게 몸을 풀고, 훈련에 적응할 약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정원을 가볍게 뛰고 난 후에는 곧장 원거리 훈련장으로 향했다. 훈련장에는 이미 누군가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사르트 경.”
사르트 역시 훈련을 하러 온 모양인지 활에 화살을 장전한 채로 표적을 노려보고 있었다.
플로라를 발견한 사르트는 장전하고 있던 활을 쏜 뒤, 그녀 쪽으로 몸을 틀었다.
“복귀했군.”
“네.”
어디 불편한 데는 없는지 가늠하듯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받아내며 플로라는 화살통을 어깨에 메고, 구비된 활을 챙겨 들었다. 그녀가 지정된 자리에 서자, 곧 사르트도 별말 없이 훈련에 집중했다.
기사단에 복귀하기 전, 두 동강 났던 활을 황실 대장간에 맡겼기 때문에 보급 무기를 써야 했다. 플로라도 활을 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팽팽한 감각에 기분이 짜릿해졌다.
표적 정 중앙을 아이든의 이마라고 생각하면 맞추기가 편했다.
그녀의 모습을 본 사르트가 툭 말을 던졌다.
“활은 손에 익지 않아 어렵군. 경을 보면 신기하단 말이지.”
그리고는 이제 활을 내리고, 대놓고 플로라를 구경했다. 다시 한번 활시위를 당겨 표적의 정 중앙을 맞춘 플로라가 어색하게 웃었다.
“지금도 충분하십니다.”
“놀리는 건가. 이거 사냥 대회에서도 못 쓸 것 같은데 말이지.”
“참, 오늘 복귀하면서 보는데 일정표에 사냥 대회가 있더라고요. 그것 때문에 준비하시는 겁니까? 사르트 경은 검으로도 충분하실 텐데요.”
“그때 참여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군. 일정이 있으면 어려울 것 같아서.”
플로라는 아, 하고 짧게 탄식했다. 그는 정예 기사이니 마굴 임무나 국경 외곽 지역으로 임무를 나가게 되면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날 사르트 경은 괜찮으셨습니까? 제가 경황이 없어 이제야 묻네요.”
그날이 언제인지 사르트는 바로 알았다.
마굴 토벌대 임무를 갔다 다친 폴 경을 데리고 오던 날을 말하는 것이리라.
사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았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폴 경과 플로라 경만 노렸어.”
“사르트 경이 다치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덕분에 폴이 성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근데…… 내가 어두워서 잘못 본 건지.”
사르트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아직 단장에게 보고하진 않았지만, 수상한 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는 오랫동안 고민했다. 자신이 본 것이 맞는지.
플로라와 폴을 공격하는 괴한을 처치하기 위해 검을 휘둘렀고, 결국 팔을 맞았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플로라를 향해 활을 쐈던 그 괴한은 도망쳤다.
사르트는 그를 처치할 생각으로 쫓았고, 산속으로 숨어든 그는 말에서 뛰어내린 채 달렸다.
그게 문제였다. 말을 타지 않았는데도, 짐승처럼 빨랐다는 점이. 자신이 어두워서 잘못 본 건지 아니면 사실인지 몰라 섣불리 말하지 못했다.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으니 마스터는 아닐 텐데.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사르트는 잠시 또 그날을 떠올리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좀 더 확실해지면 말해야겠단 생각으로.
* * *
에르네는 어제 플로라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센칸에 대해 좀 더 조사하기 시작했다. 시몬도 마찬가지겠지만, 에르네 역시 어제는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들을 정리하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 어떻게든 더 많은 정보를 얻어 봐야 했다. 플로라가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코앞에 쳐들어올 때까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 정도로 소문이 돌지 않는 곳에서 정보를 더 얻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건국제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더 전력을 파악해서 위험을 줄이는 방법들을 마련해야 했다.
각국의 귀빈을 초대해 제국의 건국 기념 축제를 즐기는 것은 하네칸의 전통이었다. 그중에는 분명 센칸도 섞여 있을 거고, 황제의 성정상 그들을 초대하지 않을 리도 없으니 그라도 철저히 준비하는 수밖에 없었다.
시몬의 하루도 달라졌다. 새벽부터 부지런히 움직여 회의에 참석하고, 집무실에 갔다. 빡빡한 일정이라도 조금도 군말 없이 따르며 성실하게 건국제 준비며 제국 내에서 일어나는 중대사들에 대한 보고서를 확인했다.
그 모습을 본 비서 카디오크는 무척 감동한 얼굴을 했지만 시몬은 애써 모른 체했다.
“곧 사냥대회가 있겠군.”
오찬을 끝내고 잠시 창밖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겼던 시몬이 중얼거렸다.
꽃이 지기 시작하는 시기부터는 언제나 제국 전체가 바빴다.
사냥 대회와 격투 대회가 그 시작이었다. 항상 틀에 박힌 따분한 일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올해는 새삼 느낌이 달라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