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잠자코 듣고 있던 에르네의 표정도 날카로워졌다.
예상했던 것에서 얼마 벗어나지 않은 반응이었다. 그런 모습에서 플로라는 위안을 얻었다.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위안.
더 강해지기 위해, 명성을 얻기 위해, 권력자들의 눈에 들기 위해 아이든에게 실험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던 날들이 떠올랐다.
괴로워하면서도 벗어날 생각은 하지 못했고, 잘못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외면했다.
‘……무엇을 위해 그랬지?’
르네와 그 아이가 죽기 전까지는 플로라 역시도 온 마음을 다해 센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하지만 이제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까지 독하게 살아야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명예를 얻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랬던가.
어쨌든 뒤늦게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고, 센칸에서 도망쳐 극적으로 살아났음에도 마음먹은 대로 살기는커녕 아이든에게 놀아나기만 했다.
아이든에게 쫓기는 하루를 견뎌내며 몹시 지쳤을 때는 결국 찾아올 종말을 기다린 적도 있었다. 또, 도망치기를 택한 스스로가 이상한 신념에 사로잡힌 것은 아닐지 의심이 들 때도 있었다.
아마 산에서 시몬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센칸으로 돌아갔더라면, 영원히 제 판단이 옳다는 확신을 가지지 못한 채 혼란 속에서 순응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이제는 물과 기름처럼 고루 섞이지 못했던 생각들이 확실히 정리된 것 같았다.
‘잘 도망쳤구나, 나. 내 선택이 옳았구나.’
“넌 어렸을 때부터 그곳에서 자랐다고 했던가.”
비워진 술잔을 만지다 플로라를 지긋이 바라본 시몬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에게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어 착잡했다.
군사로 이용할 아이들을 비밀리에 키우고 있다고 짐작은 했지만, 직접 들으니 치솟는 화를 참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실험이라니.
제국 내에서도 마력을 가지지 못한 인간을 연구하고자 하는 미치광이 마법사들은 많았다.
그들이 이용하던 밀실의 광경은 참혹했다. 지워지지 않는 피 냄새가 들끓고 인간의 것인지 짐승의 것인지 모를 살점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시몬이 보기에는 연구가 아니라 대학살에 가까운 광경일 뿐이었다.
밀실까지 직접 걸음을 해 본 적이 있었으므로, 플로라의 말을 현실적인 장면으로 상상할 수 있었다.
플로라가 당했을 일들도 못지않으리라.
“……네.”
그동안 얼마나 고통받아 온 것일까. 시몬은 끝내 상상하길 포기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이성적으로 먼저 그들의 병력이나 계획, 상황 같은 걸 알아내야 하는 것이 우선인데, 마음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어느 쥐새끼가 숨어서 몸집을 불리며 야금야금 제 것을 갉아먹으려 하는 걸 알았는데, 어이없는 것도 잠시뿐. 눈앞의 이 여인이 당해야 했던 고통들이 먼저 마음을 적셨다.
손을 뻗고 싶고, 얼마나 힘들었느냐고 묻고 싶다.
“…….”
플로라는 아랫입술을 잘게 떨며 고민에 잠긴 시몬의 얼굴을 보았다.
자신을 불쌍히 여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따뜻한 사람이니, 제 처지를 동정할 거라고 생각했다.
따뜻해진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폐하. 저를 너무 불쌍히 여기시진 않으셔도 됩니다.”
플로라는 옅게 웃으며 담담히 말했다.
동정을 사고, 단순히 황제의 신뢰를 얻고자 센칸이 저지르고 있는 일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혼자 위로받고, 무겁게 쌓인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싶지 않았다.
그러려고 도망친 게 아니다.
“끔찍한 실험에 이용당하긴 했으나, 저 역시 그들만큼이나 악하게 살아왔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선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죽이거나 약탈하는 것이 당연해지거든요.”
“…….”
“약자를 외면하고, 괴롭히는 것으로도 모자라 가진 것을 빼앗으며 버틴 삶입니다. 살기 위해, 환경이 저를 그렇게 만들었지만, 그런 이유만으로 제 행위들을 정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당한 실험들은 그 죗값으로도 부족한 고통일 겁니다.”
지나간 것은 차치하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대비해야 했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아이든이 더는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건드릴 수 없게끔 만들고, 나아가 그녀가 나고 자랐던 메린 성을 완전히 무너뜨려 버리는 것이 그녀의 꿈이었다.
허울뿐이던 소망이 조금씩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그땐 내가 널 죽일 거야. 반드시.’
반드시 그 말을 지킬 거야.
플로라는 자신의 바지 자락을 세게 말아 쥐었다.
시몬은 넋을 놓고 그녀를 보았다.
어떤 확신에 찬 검은 동공이, 앙다문 입술이 시선을 뗄 수 없게끔 만들었다.
이러니 계속 마음이 닿을 수밖에.
바람 한 점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유약한 나뭇가지 같다가도, 결의에 찬 눈빛을 바라볼 때면 어떤 상황에서도 부러지지 않을 기둥 같았다.
시몬이 미소를 흘렸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작은 불씨를 품은 눈빛이 일순 화르르 타올랐다.
“자, 그럼 좀 더 구체적인 얘기를 들어보지. 그래서 그 쥐새끼들의 실험은 성공했나?”
플로라의 눈빛에도 덩달아 생기가 돌았다.
진짜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 *
플로라는 아는 것을 모두 털어놓았다.
자신의 기억이 있을 때부터, 자라온 삶에 대하여. 그리고 메린 성이 어떤 곳인지. 그 성에서 자라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결국 어떤 일을 하게 되는지. 어떤 실험을 당하고, 어떤 훈련을 받는지.
하지만 그녀가 아는 것엔 한계가 있었다. 아이든과 라비우에게 신임을 얻는 플로라였지만, 어디까지나 그녀는 ‘기사’였다.
그들이 부리는 충성스러운 개. 사랑받는 개의 위치로는 연구나 센칸의 기밀에 깊이 접근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많은 것을 이야기하지 못했으나, 시몬은 아무렴 상관없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에게 깊은 기밀까진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참,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지. 언제나 가지지 못한 것을 갈망해.”
시몬의 목소리는 베일 것처럼 날카로웠다.
“그런 소문이 한 번도 바깥으로 새지 않았다니, 믿기 힘들 정도야.”
“메린 성에서 자란 기사들은 아이든과 라비우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뿐이고요.”
“……네가 쫓기듯이? 도망친 자들을 죽일 때까지 쫓는 건가.”
미묘하게 낮아진 음색은 그의 숨겨진 면모를 드러내는 것만 같았다.
“그렇습니다. 대부분은 이리 오래 버티지도 못하고 죽어 버리죠.”
“흐음. 결국 가장 숨기고 싶었던 내게 그 비밀을 들켰으니, 그들은 어떻게 나올까? 지난번에 숙소에서 네가 했던 말처럼 우릴 죽이려 들겠지?”
“……네.”
“기대되는군. 좀 새로운 신묘한 방식이길 바라는데.”
기대된다는 말과는 달리, 신경이 날카로워진 시몬의 미간은 한껏 좁혀져 있었다.
그는 플로라의 얼굴을 바라보며 안온함을 되찾았다. 그녀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채 애꿎은 옷자락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어딘지 불안해 보이는 모습이 눈에 밟혀, 삽시간에 감정에 휘둘렸다.
“왜 그런 얼굴이야? 플로라.”
“……아. 아닙니다.”
“내 걱정 때문인 건가? 내가 그들 손에 죽을 것 같아?”
지난번 숙소에서 플로라는 말했다.
이 이야기들을 지금까지 숨겨온 것은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도 있지만, 무엇보다 안위가 걱정되었다고. 그냥 짚어 넘긴 질문인데도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걱정 안 해.”
그가 손을 뻗었다.
따뜻한 손길이 그녀의 뺨 언저리에 닿았다. 플로라가 놀라 숨을 삼키며 눈을 질끈 감았다.
“네가 지켜주면 되잖아.”
그리고 이어진, 바람결처럼 살랑거리는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아름다운 두 눈동자는 그녀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서로를 지키자.”
“…….”
“나는 네가 도망치며 살지 않도록 지킬 테니, 너는 나를 지키는 거야.”
시몬의 말에 플로라는 잠시 넋을 놓았다.
‘지키자는 말이 원래 이리 설레는 말이었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거센 박동 소리에 혹여 이 불순한 마음이 그에게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다.
이런 와중에도 불쑥 쓸데없는 생각이 들다니.
폐하는 단지 자신을 동정하고 있을 뿐일 텐데. 그리고 신하로서 챙기는 것일 테고.
사랑하는 연인도 있는 이에게 괜한 부담을 안겨 줄 필요 없다.
그에게 충성을 보이는 것만이, 신뢰를 보이는 것만이 허락된 감정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폐하를 지키겠습니다.”
플로라는 제 처지를 담담히 정리하곤, 다짐하듯 말했다.
“넌 너무 걱정이 많아.”
플로라의 생각을 알 리 없는 시몬은 그저 그녀가 계속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리라 생각해 내심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그는 남의 속도 모르고 소년처럼 개구지게 웃었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에르네는 끙, 신음을 흘리며 시선을 돌렸다.
심각한 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을 주고받질 않나, 장난을 치질 않나…….
상황이 오늘의 요점에서 완벽히 벗어났다. 가만 보고 있기 무척 불편한 광경이었다.
라벤더와 연기를 할 때는 진심이 아닌 것이 보였으니 차치하고, 이건…… 이건 너무 백 퍼센트 진심이셨다.
마음에 담은 여인을 볼 때의 눈빛은 저러하구나.
주홍색의 오묘한 빛깔의 동공이 다이아보다 반짝거린다. 시선이 얼마나 달콤한지 보고 있는 사람도 금방 녹아내릴 것 같았다.
그게 적응이 안 돼서 팔에 닭살이 돋쳤다.
에르네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왜 못 낄 데 낀 기분이 드는 걸까. 그는 뒷문을 지키고 있을 부하들이 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