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리비에르는 시몬의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술술 대답했다.
“다른 사물이나 마법진 같은 건 타인이 해제할 수 있지만, 몸에 직접 새긴 마법은 함부로 풀 수 없어요. 자칫 잘못했다간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
“마법을 시전 할 때 그걸 깨트릴 수 있는 장치를 심어두었을 겁니다. 예를 들면, 이 음식을 먹게 되면 나는 마법에서 풀려날 거야, 하고 말이죠. 그게 음식일 수도 있고, 어떤 말일 수도 있고, 장소일 수도 있어요.”
“풀기 어려운 암호군.”
“한데 마력을 봉인한 것으로도 모자라 기억까지 지웠다는 건 본인이 영영 마력이나 기억을 되찾고 싶지 않아 한다는 뜻 같은데…….”
“…….”
“찾고 나서 후회하지 않을까요?”
플로라의 의중이 궁금하다는 듯, 두 사람이 동시에 그녀를 보았다.
어떤 기억을 숨겨 두었든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플로라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모든 것에 대한 감당은 오로지 그녀의 몫이었다.
조금 두렵긴 했지만, 살아온 기억보다 가시밭길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만약 정말로 기억을 지우고, 마력을 봉인한 것이 아이든과 라비우와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되찾고 싶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확실히 알아야겠다.
플로라는 고민을 거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찾고 싶어요.”
리비에르도 무언가 결심한 듯한 얼굴을 했다.
“본인의 의지가 그렇다면, 기억을 찾는 일은 제가 도울 수 있습니다.”
“도와주겠나?”
“시간은 좀 걸릴 겁니다. 급하게 찾고자 한다면 저와 플로라 둘 다 위험해질 테니까요. 하지만 기억을 찾으면 그 장치도 금방 찾아낼 수 있으니…….”
“리비에르, 그럼…….”
“당분간 하네칸에 남겠습니다.”
그의 결심은 이것이었던 모양이다.
십여 년을 넘게 방황하던 생활을 정리하고 하네칸에 정착하는 것.
시몬도, 플로라도, 에르네도 놀란 눈으로 리비에르를 보았다.
어떤 회유의 말에도, 또 명령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우직하게 자신의 길을 걷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왜,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을 위해서……?
시몬은 눈을 찡그렸다.
“이걸 좋아해야 할지, 기분 나빠해야 할지 모르겠어.”
“…….”
“기분이 좋은데, 불쾌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인지 물어도 되겠나?”
“늙은이의 변덕이라고 생각해주십시오.”
리비에르의 웃음이 익살스러웠다.
시몬은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쯧 찼다. 대마법사가 오랜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복귀하겠다는데…… 왜 이렇게 약이 오르는 걸까.
그동안 숱하게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울고, 불고 애썼던 시간들을 생각하면 당연했다.
“단순히 변덕이라고 말하면 내가 기분이 어떻겠나? 참 오랜 시간이었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가 싶군.”
“만약을 위해서요. 그곳에 많은 아이들이 있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 때문이라면 지금…….”
“그리고 폐하의 곁을 너무 오래 비웠습니다. 안 그래도 슬슬 복귀하려 했던 참입니다. 이번에도 살던 집을 정리하느라, 서신을 받고도 하네칸에 넘어오기까지 좀 시간이 걸렸고요.”
“뒷말은 전혀 믿기지가 않아.”
리비에르가 쿡쿡 웃었다.
“못 믿으실 만하겠지만, 진심입니다.”
시몬도 허탈한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돌아왔어. 리비에르.”
“감사합니다. 폐하.”
“그대의 저택에서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자자해.”
시몬이 툭 던진 농담에 리비에르가 으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하네칸에 마지막으로 발을 들였던 때가 반년 전이었다. 그때도 폐하께서는 같은 말을 하셨다.
떠돌이 생활을 하며 저택 관리 따위는 일절 신경 쓰지 않았으니, 사람들에게 유령이 나오는 폐가쯤으로 보일 만도 했다.
“집값이 떨어진다고 다들 난리야. 귀족들의 아우성으로 피곤하니 얼른 복구하도록 해. 사람 사는 꼴로.”
“……폐하,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가도 되겠습니까? 유령을 잡으러 가야 해서요. 일을 하려면 제 연구 일지도 다시 봐야 할 테고요.”
“식사는 하지 않아도 되겠나?”
“괜찮습니다.”
“……그럼 성에서 보지.”
아직 플로라를 쫓던 침입자에게서 회수한 마도구에 대해서 묻지 못했지만, 리비에르가 이곳에 남기로 결정한 이상 시간은 많았으니 조급할 필요 없었다.
시몬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허락하자, 리비에르가 정중히 인사를 했다.
그리고 플로라에게도 정식으로 복귀하게 되면 서신을 보내겠다고 말했다.
리비에르가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실감이 났다.
기억을 찾는다, 마력이 봉인된 것을 해제한다.
마법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온 플로라로서는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인 것만 같았다.
“고마워. 덕분에 리비에르도 하네칸에 눌어붙게 생겼어. 수년간 내가 난리를 쳐도 돌아오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양반인데 말이야. 이거 뭔가 허탈한데?”
시몬은 허탈하다고 말하면서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유 없는 호의는 아닌 것 같습니다. 리비에르 님이 제게 원하시는 게 있는 듯한데, 혹시 폐하께선 무엇인지 아십니까? 만약 제가 해 드릴 수 없는 거라면 곤란할 것 같아서요.”
“아, 그거.”
시몬이 눈빛이 살짝 가라앉는 것이 보였다.
“리비에르는 딸을 잃었어.”
“……네. 그 사건은 저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래. 하네칸을 떠난 것도 그 일 때문이야. 잃어버린 딸의 시신이라도 찾기 위해서 온 곳을 돌아다녔지. 하지만 아직도 찾지 못했어. 네가 있던 곳에 기억을 잃은 아이들이 있었다고 했으니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는 모양이야.”
“아…… 그렇군요.”
딸을 찾기 위해…….
플로라는 빠르게 수긍했다. 하지만 성에 있는 모든 아이들을 전부 만나본 건 아니었다.
그녀는 비교적 자유롭게 성을 돌아다닌 편이었지만, 다른 아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어릴 때의 기억이 온전히 남아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없어졌다.
그때 시몬이 플로라에게 손을 뻗었다.
“그건 너무 신경 쓸 것 없어. 리비에르도 별로 기대하는 것 같지 않으니.”
“…….”
“기대했다면 널 붙잡고 당장 물었겠지.”
자신을 보게끔 만드는 손길에 플로라는 속수무책으로 빤히 그와 눈을 맞춰야 했다.
그의 말에 위안이 되었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플로라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네 이야기를 듣고 싶다. 플로라.”
“…….”
“내게 얘기해줄 수 있겠어?”
따뜻함이 담긴 눈빛, 다정한 목소리.
거절의 말은 잊은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진작 했어야 할 이야기였기에, 하지 못한 말들이 마음에 남아 찝찝했던 참이었다.
더는 그를 속이고 싶지 않았고, 숨기고 싶은 것도 없었다.
한 가지, 그에게 위험이 도사릴 수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머뭇거리게 했지만, 이미 센칸의 첩자는 플로라의 곁에 있는 무엇이든 앗아가겠다고 말했고, 실제로 건드리기까지 한 마당에 더 무서워할 필요는 없었다.
속된 말로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위험에 대비해야 하고, 지켜내야 했다.
마침 에르네도 함께 있으니 잘된 일이었다. 그 역시 이번에는 집중할 마음이 생긴 듯 살기 어린 눈빛을 조금 누그러뜨린 채, 플로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센칸에서 자랐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센칸의 영토와는 떨어진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는 섬에서 자랐죠.”
“…….”
“그곳에서는 비윤리적인 실험과 비밀 군사 훈련을 합니다. 센칸의 영지지만 민간인의 출입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어요.”
시몬은 플로라의 말을 들으며 미간을 좁혔다.
비밀 군사 훈련이라.
그가 기억하는 센칸은 약소국으로, 그런 간 큰 짓을 할 만한 곳이 아니었다.
센칸은 자랑할 만한 특산물도, 특별한 기술이 있는 나라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마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매해 하네칸에 비단이나 보석, 식품을 과할 정도로 바쳐왔다.
그 노력을 높이 산 선황제께서 그 조그만 땅덩어리를 먹어 무엇 하겠느냐며 정복지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게다가 매해 보내는 공물의 반을 돌려보내는 자비까지 베풀었다. 선황제의 유지에 따라 시몬 역시 마찬가지로 그들이 바치는 선물은 받지 않는 중이었다.
……그만큼 ‘불쌍하게’ 여겼던 나라에서, 뭘 한다고?
“그들은 하네칸을 동경하는 것을 넘어 광적으로 집착합니다. 특히 제국이 가진 마법을요.”
생각해보니 어이가 없어 시몬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진 소리를 내었다.
“비윤리적인 실험과 비밀 군사 훈련이라는 것이 무엇이지?”
뒤통수를 거하게 맞은 느낌이었다.
“마스터를 만들어내려 합니다.”
“만들어낸다?”
“마력을 가지지 않은 존재에게 마력을 심으려는 겁니다.”
순간 시몬의 눈빛이 싸늘하게 바뀌었다.
“……이거, 생각보다 더한 뒤통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