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방금 ‘리비에르’라고 했던가.
플로라는 시몬이 했던 말을 상기하다가 눈을 크게 떴다.
“이만 앉지.”
시몬의 말에 무릎을 꿇고 앉았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뒤집어쓰고 있던 로브를 벗은 그의 모습이 보였다.
밤색의 곱슬머리와 정돈되지 않은 수염 때문에 조금 지저분한 인상을 주는 중년의 남자였다.
이곳에 들어온 뒤로 줄곧 시몬에게만 향해있던 눈이, 잠시 플로라에게 머물렀다.
남자는 파악하기 애매한 표정으로 플로라를 보았다.
고동색 눈동자에는 오랜 시간 켜켜이 쌓인 쓸쓸함이 녹아 있는 것 같았다.
“플로라, 이쪽은 리비에르다. 하네칸의 대마법사 중 한 명이야. 뭐, 지금은 사정상 쉬고 있지만…….”
시몬이 리비에르를 소개하며 옅게 웃음을 흘렸다.
리비에르를 그저 쉬고 있다고 말해야 할지, 대마법사를 그만둔 거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우스웠기 때문이다.
“하네칸 백기사단 소속 신입 기사 플로라입니다. 고결하고 지혜로우신 대마법사 리비에르 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플로라는 리비에르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시몬에게서 이름을 들었을 때, 이미 하네칸의 대마법사라는 걸 짐작했기 때문에 놀란 마음을 감출 수 있었다.
리비에르 타탄.
하네칸의 대마법사 중 한 명이나, 오래전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지금은 휴식 중에 있는 사람이었다. 듣기로는 전 대륙 곳곳을 떠돌아다니며 잃어버린 딸을 찾고 있다고 했다.
그가 자신의 딸을 잃어버린 사건은 지금까지도 하네칸 제국민들 사이에서 회자가 되고 있는 일 중 하나였다.
“나는 리비에르다. 대마법사라는 말은 그저 과거의 영광이었고, 지금은 방랑자라고 하는 것이 좋겠군.”
리비에르는 자신을 짧게 소개하며 머쓱한 듯 웃었다.
빤한 시선은 여전히 플로라에게 닿아 떨어질 줄 몰랐다.
지난날, 예언가 레바를 만났을 때처럼 자신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에 플로라는 마른침을 삼켰다.
누군가 자신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는 것을 허락하는 건 아직 어색했다.
센칸에서는 누구도 그녀와 눈을 맞추려 하지 않았는데 하네칸은 달랐다.
시몬부터 시작해 플로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거리낄 것 없다는 듯 그녀를 봐주었다.
이제 어느 정도는 적응이 된 것 같았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면 여전히 심장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이 제국의 모두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할 거란 생각 따위는 하지 않기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실제로 백기사단 내에서도 상관 몇몇은 그녀와 눈을 맞추면 괜히 기분이 더럽다고 수군거리기도 했었다.
“머리색이…… 특이하군.”
플로라는 이어진 리비에르의 말에 동그랗게 눈을 떴다.
경직되어 있던 어깨가 맥없이 파르르 떨렸다.
하도 무시무시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어 괜히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심장이 뛰었지만 그의 말에 모든 것이 파삭 식어 내렸다.
“그렇지? 이렇게까지 반짝이는 은발은 나도 처음 봐.”
“…….”
리비에르는 시몬의 맞장구에 다시 플로라를 빤히 보았다.
눈을 맞췄다가, 머리칼을 보았다가, 설핏 미간을 찡그리길 반복하자 결국 플로라가 슬그머니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는 이내 픽 웃으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마법을 쓰지 못한다고 들었네.”
“……아, 네.”
자신에게 던져진 질문에 플로라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마법 때문인 모양이었다.
시몬이 소개해주고 싶다고 말했던 사람이 리비에르라는 게 확실해졌다.
플로라는 뾰족하게 날이 섰던 마음을 조금 가라앉혔다.
“리비에르 그댈 만나기 전에 네이라에게 먼저 이 아이를 보여 주었다. 네이라의 말로는 본인 스스로가 마력을 봉인한 것 같다고 하더군.”
“역시 네이라군요. 저도 폐하께 서신을 받았을 때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마력을 봉인하는 법에 대해서 연구한 적이 있어서요.”
“하지만 플로라는 자신이 마력을 봉인했단 사실을 알지 못해.”
“마법을 잘 다루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본인 기억까지도 지웠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그런 건지 궁금해지네요.”
리비에르는 마력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 흥미롭다는 눈으로 플로라를 보고 있었다.
모두 궁금해하는 것 같지만, 플로라는 현실 같지 않았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고, 자신의 일 같지도 않기에 무어라 대답할 말도 없었다.
그녀가 가진 최초의 기억은 어두컴컴한 감옥 같은 곳이었다. 주변 환경과는 어울리지 않게 예쁘장한 토끼 인형을 들고, 몸을 웅크린 채 떨고만 있었던 기억.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런 그녀에게 처음 말을 걸어준 사람이 있었다. 타오르는 불길처럼 붉은 머리칼과 그을린 피부, 유리알처럼 맑고 투명한 갈색의 눈동자를 가진 소년.
‘이름…… 이름이…….’
이름을 물었던 말에 기억이 나지 않아 대답하지 못했다.
‘기억나지 않는구나.’
‘……네.’
혼란스럽고 왜인지 모르게 슬펐다.
눈물을 뚝뚝 떨구며 소년을 올려다보자, 그가 안쓰럽단 얼굴을 했다.
그가 자신을 버리고 갈까 두려웠다.
‘저런. 그럼 넌 다섯 번째 아이라고 하겠다. 진짜 이름은 나중에 되찾아줄게.’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그는 손을 내밀어 함께 이 어두운 곳에서 나갈 기회를 주었다.
‘나와 함께 가겠느냐?’
그가 지금의 센칸의 왕 라비우였다.
그의 손을 잡은 후로부터 메린 성으로 들어가 살았다.
그리고 자라는 내내 마법은 사용한 적이 없었다.
플로라는 기억이 남아 있는 과거를 되짚어보다가 설핏 미간을 좁혔다.
지난번 대마법사 네이라에게 들었을 때처럼 찝찝한 구석이 있었다.
마법을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데, 라비우와 아이든은 자신에게 마력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안 걸까. 최초의 기억이 시작된 그 컴컴한 공간은 어디였지?
“경은 하네칸 사람이 아니라고 들었네.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말해줄 수 있겠나?”
리비에르의 질문에 사색에서 깨어난 플로라가 눈을 굴렸다.
시몬에게도 아직 말한 적 없는 이야기였다.
시몬과 에르네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까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불편했다.
“폐하…….”
플로라가 곤란하다는 듯 눈을 굴리자, 시몬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아. 네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아. 하지만 이곳에서 벌어진 일이 밖으로 새어나갈 일도, 리비에르가 위험해질 일도 없어.”
시몬은 이 남자를 믿는 걸까? 플로라가 곁눈질로 리비에르를 보았다.
대놓고 말하길 꺼려 했는데도, 그는 기분 나빠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마음을 열길 기다려주는 것만 같았다.
“저는…….”
플로라는 입술을 달싹였다.
시몬이 믿는 사람이라면 이야기할 수 있었다.
“센칸에서…… 온 사람입니다.”
말 한마디에 돌이 얹어진 것처럼 무거웠다.
이 말을 꺼내기가 왜 이리 힘들었던 건지.
속이 후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말 때문에 소중한 것들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다시금 밀려왔다.
“센칸. 그래…… 센칸.”
시몬은 놀란 기색을 잠재우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센칸에서도 마법을 다뤘던가. 처음 듣는 소리군.”
“저도 듣지 못했습니다. 폐하.”
리비에르와 시몬이 대답을 바란다는 듯 플로라를 보았다.
말은 없었지만, 곁에서 듣고 있던 에르네 역시 그녀를 날 선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의심의 빛을 거두지 않는 눈이었다.
“제가 자란 그곳에서…… 저는 유일하게 마력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마법을 썼던 기억은 없지만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해줬습니다.”
리비에르가 잠시 무언가 생각하듯 침묵했다.
“마력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그걸 볼 수 없을 텐데.”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아는 것이 없으니 무어라 대답할 수 없었다.
대체 무엇을 위해 마력을 봉인해버렸던 것일까.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사실 저는…… 그곳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요.”
플로라는 그저 자신이 알고, 짐작하는 것만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제가 자란 곳에는 기억을 잃은 아이들이 많이 왔어요. 모두 부모를 잃은 불쌍한 아이들이라고 했지만…… 크면서 알았죠. 그게 아니라는 거. 성의 주인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데려온 아이들이었어요.”
플로라는 끔찍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입술을 꾹 물었다.
도장을 찍어내는 것처럼 머릿속에 단편적인 장면들이 떠올랐다.
어린아이들이 우울한 얼굴로 어두운 공간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장면.
“그럼 진짜 뿌리가 센칸이 아닐 수도 있겠군.”
“…….”
“기억은 어떻게 되찾지? 방법이 있는가.”
시몬이 사뭇 진지한 투로 리비에르에게 물었다.
플로라에게 궁금한 것들은 차고 넘쳤지만 일단은 마력을 회복할 방법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렇지 않고선 플로라의 마력을 되찾는 것은 뒷전이 될 것 같았다.
아직 별다른 이야길 들은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기분이 좋지 않은 걸 보면 예감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기억을 잃은 아이들을 모아둔 곳이라니.
플로라의 전투와 이든이 했던 말을 떠올리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유추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생각만 해도 속이 끓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