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너무 보고 싶었어요. 폐하.”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시몬을 올려다보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처연하고 사랑스럽게 보이는지 몰랐다. 이런 건 예상에 없던 일이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라벤더. 아니야.”
“폐하. 그게 무슨…….”
“이럴 때가 아니라고.”
“……아니에요?”
“응. 아니야.”
시몬이 웃으며 그녀를 힘주어 떼어냈다.
그러자 라벤더는 서운한 기색도 없이 그저 맺혔던 눈물을 닦아내며 뻑뻑해진 눈을 깜빡였다. 오로지 연기하기 위한 눈물이었다는 듯이.
시몬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플로라를 향해 있었다.
플로라는 아무 감정도 없는 얼굴을 한 채였다. 보고도 보지 못한 척, 들어도 듣지 못한 척해야 하는 기사의 면모를 확실하게 뽐내는 중이었다.
그게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어쩐지 변명하기도 우스운 상황이 됐다.
“……음.”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시몬이 난감해하는 것을 본 라벤더가 흐음,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슬쩍 플로라 쪽을 다시 보았다.
리비에르 님과 만난다고 해서 별일 없을 줄 알았는데, 처음 보는 낯선 여자가 있어 반사적으로 연기가 흘러나왔다.
황제가 한눈에 반해 미친 듯이 쫓아다니는 코르티잔.
……을 연기하는 것이 라벤더의 역할이었다.
오랜 시간 그렇게 살다 보니 낯선 사람이 보일 때면 미리 말을 맞추지 않아도, 항상 자연스레 연기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이번엔 확실히 잘못 짚은 모양이었다.
‘이 분위기는 뭘까? 음?’
라벤더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사는 것이 막막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던 자신 앞에 나타난 구세주.
그때부터 라벤더는 시몬을 위해 살았다.
오랜 시간이었다. 한데 그를 만난 이래로 이렇게 당황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방법을 완전히 잊은 어린 소년처럼 굴고 있었다.
사랑에 미친 척 연기할 때도 라벤더가 어떤 돌발 행동을 하든 당황하지 않던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지금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누군가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모습은 꽤 눈꼴 셨다.
주홍빛 눈동자가 오늘따라 유독 달았다. 그건 아마도 그의 눈에 든 사람 때문이겠지.
보는 사람의 속이 다 간지러울 정도였다.
그동안 한 사람에게 푹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남자를 연기하던 황제에게 결코 진심 같은 것은 없었다.
이런 완벽한 남자는 도대체 어떤 여자와 만나게 될까, 궁금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에게 진짜 연인 같은 건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라벤더는 우월감에 취한 적도 있었다.
껍데기라도 가질 수 있는 여자는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모두 과거의 이야기였다. 지금은 제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 바라는 대로 충성을 다하는 것이 그녀의 삶, 전부였다.
괜한 사사로운 감정으로 제게 주어진 기회를 허투루 날려 버릴 생각 따윈 없었다.
라벤더는 뒷골목에서 자라온 소녀답게 눈치가 빨랐고 명석한 편이었다. 자신의 주제를 잘 알았기에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잠시 황제에 미모에만 혹해 느꼈던 사사로운 감정을 내리누르니, 지금에 이르렀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네.’
이 광경을 보고 있자니, 죽지 않고 살아있길 잘했단 생각마저 들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하며 눈을 깜빡이는 황제의 모습이 퍽 안쓰러웠다.
눈빛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벌써 오조 오억 번쯤은 한 것 같은데, 상대의 눈동자는 여전히 시리기만 했다. 아니지. 아예 이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있었다.
‘하기야. 방금 모습은 오해할 만했지.’
라벤더는 목구멍 안쪽으로 웃음을 삼켰다.
“실례했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어쩐지 오해를 손수 풀어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다소곳이 시몬과 에르네, 플로라를 향해 인사한 라벤더는 다람쥐처럼 쪼르르 방을 빠져나갔다.
뒤늦게 시몬이 손을 뻗었지만 잡히지 않았다.
분위기를 이렇게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저 혼자만 쏙 빠져나가다니. 저, 요망한……!
시몬은 방을 빠져나가는 라벤더의 뒷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울컥 화를 삼켰다.
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시몬은 멋쩍은 미소와 함께 목덜미를 긁적였다.
플로라는 여전히 아무 감정 없는 얼굴로 목석같이 서 있을 뿐이었다.
어쩐지 그녀의 시간이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시몬이 도와달라는 듯 에르네를 보았지만, 그 역시 보고도 못 본 체하며 고개를 돌렸다.
에르네에게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이상한 배신감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플로라.”
그는 플로라의 이름을 불렀다.
불씨가 사라진 텅 빈 눈빛을 하고 있던 동공에 미약한 빛이 스치는 것이 보였다.
“플로라.”
시몬이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이번에는 완전히 빛이 돌아왔다.
두어 번쯤 눈을 깜빡이던 플로라가 작은 입술을 움직였다.
죽어있던 인형이 생명을 얻어 깨어난 느낌이었다.
“……네, 폐하.”
“이리와 앉아. 에르네도.”
그가 자신의 옆을 툭툭 두드렸다.
플로라는 시몬이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차마 다른 여인과 마주 안은 채 사랑을 속삭이는 꼴은-플로라의 상상에서- 두 눈 뜨고 볼 수가 없어 억지로 사색에 잠겼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아이든을 백 번도 더 죽이고 있었다. 정말 아이든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것은 플로라의 인내를 도왔고, 정신을 차려보니 시몬에게 안겨 있던 묘령의 여인은 연기처럼 사라진 채였다. 눈에서 사라지니 속이 더부룩했던 것이 조금은 가셨다.
플로라는 시몬의 명에 따라 그 곁으로 가 앉았다. 에르네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황제와 근위대장과 한 테이블에 앉아있다니, 이게 참 신선하게 어색해서 방금 전 받았던 충격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곁에서 시몬의 시선이 집요하게 느껴졌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신가 싶어 고개를 돌린 플로라가 숨을 참았다.
로브 때문인지 머리칼이 흐트러졌는데도 그게 얼마나 자연스럽고 청량해 보이는지, 시몬의 미모에 심장이 두 쪽으로 쩍 갈라져 버리는 것만 같았다.
또 사술 어린 눈빛은 무척이나 달아서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심장은 물론이고 혈관이 팔딱팔딱 뛰는 것까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왜 이런 눈으로 보시지?’
아무 때나 써대도 늘 먹히는 미인계였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신선하고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그가 무얼 바라고 이러는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냥 심장에 무리만 왔다.
그의 입술이 무언가 말하기 위해 달싹거렸던 찰나였다.
방문객이 왔음을 알리는 노크 소리가 침묵을 갈랐다.
시몬이 에르네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마찬가지로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정체불명의 남자가 방에 들어섰다.
시몬이 방 안에 들어오길 허락한 사람이니 굳이 경계할 필요는 없겠지만, 어쩐지 위험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키가 아주 큰 남자였다. 로브 사이로 언뜻 삐져나온 그의 구불구불한 중단발의 머리칼은 밤색을 띠고 있었다.
에르네도 일어나고, 시몬도 자리에서 일어나는 통에 플로라도 슬그머니 따라 일어섰다.
한마디 언질도 받지 못하고 이곳까지 왔으니, 플로라는 이래저래 혼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지난번 함께 외출했을 때 이야기했던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을 만나러 오겠거니 막연히 생각했는데, 난데없이 황제의 애정행각을 보질 않나. 이번에는 또 누구일까 싶었다.
물론 앞선 장면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이제는 어떤 말을 듣고, 어떤 걸 봐도 덤덤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하늘이 두 쪽으로 갈라진다 해도 덤덤할 수 있을 것 같다.
플로라의 머릿속으로 생각이 가지처럼 뻗쳤다.
근데 정말 그 여자는 누구일까.
잠깐 보았던 애틋한 눈빛으로 봐서는…… 설마, 애인?
플로라는 최악의 가정부터 떠올리며 이제야 겨우 다 나은 아랫입술을 다시 잘근잘근 씹었다.
분명 그 여인은 ‘폐하, 보고 싶었어요.’ 하고 간지러운 목소리를 내었지.
게다가 연인을 오래 보지 못한 것처럼 애틋한 눈빛이었다고.
주색에 빠져 있단 소문은 들었지만, 여태 그런 면은 한 번도 보지 못해 소문은 완전히 소문이라 치부한 채 잊고 있었다.
아아…… 이런 거였나.
마음에 쩍 금이 가는 것 같았다. 일부러 다른 사색에 잠기면서까지 보지 않으려 했는데, 잠깐 보았던 그 장면만으로 온갖 생각들이 다 들었다.
좋지 못한 징후였다. 머릿속을 비워내야 한다고 마음먹은 사이, 로브를 쓴 남자가 시몬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하네칸의 태양을 뵙습니다.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그대가 내게 평안을 물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리비에르.”
시몬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어지럽던 머릿속이 한결 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