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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49)화 (49/154)

49.

며칠 새 회복은 점점 빨라졌다.

이제는 등이 살짝 욱신거리기만 할 뿐, 움직이는 데에는 지장이 없어졌다. 하도 씹어 대서 다 터졌던 입술도 이제는 말끔했다.

조금만 더 있으면 기사단도 복귀할 수 있을 듯했다. 외출 금지가 풀렸다는 게 그 증거였다.

밖을 나갈 수 있게 되자, 플로라는 가장 먼저 폴의 방으로 향했다.

그는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회복에 차도를 보이고 있으니, 곧 눈을 뜰 거란 희망의 말은 들었지만 불안한 마음은 좀체 가시지 않았다.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죄책감은 점점 쌓여만 갔다.

“폴, 어서 일어나.”

그가 깨어나야 이 무거운 죄책감이 조금은 덜어질 것 같았다.

플로라는 한참 그의 곁에서 서성이다가 침대 옆 탁상에 초콜릿을 하나를 두었다.

요즘 자꾸 단 게 먹고 싶어져서, 이든에게 부탁해 얻었던 초콜릿 중 하나였다.

문병을 끝내고 폴의 방을 빠져나오자, 맞은편 제 방문 앞에 에르네가 수문장처럼 서 있는 게 보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복도를 지키고 있던 성기사들은 어느새 사라진 채였다.

잠깐 자리를 비운 새에 시몬이 온 모양이었다.

무언가 못마땅해하는 보라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 안녕하세요?”

플로라는 그를 향해 어색하게 웃으며 정중히 인사했다.

그가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와…… 장족의 발전이다. 이미 몇 번 인사를 나누긴 했지만 여전히 놀라웠다.

이제 다음은 목소리를 들려주시려나.

생각해보니 아직 한 번도 그의 목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인사 외에 별다른 말을 건넬 자신이 없어 플로라는 재빨리 방 안에 들어섰다.

“왔어?”

시몬을 마주하자, 거대한 마수라도 만난 듯 쿵쿵 뛰던 심장이 한결 진정 되었다.

근데…….

“이게 다 뭡니까. 시몬?”

방 안에는 마수 대신 다른 거대한 무언가가 있었다.

정체는 고급스럽게 포장된 바구니였다.

플로라가 눈을 의심하며 깜빡거렸다. 시력이 떨어졌나. 그럴 리가 없는데…….

“요새 초콜릿이 먹고 싶다며.”

아니겠지, 했는데 바구니 안에 든 것이 전부 초콜릿이었다.

“아직 이든이 준 것도 남았습니다…….”

“이게 더 맛있어. 그건 버려.”

“…….”

이건 대체 뭐지.

무슨 생각이신 거지……?

플로라는 시몬을 물끄러미 보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뿌듯해하는 얼굴이라 잔소리를 하기도 뭐 했다.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다고 말하려다 결국 고맙다는 말만 전했다.

“네게 찾아오는 사람들과 나눠 먹어.”

“그럴게요. 시몬.”

그의 표정이 한층 더 밝아지는 게 눈에 띄었다.

“근데 어딜 다녀오는 길이야?”

“아…… 폴 경에게 다녀왔습니다.”

폴의 이야기에 분위기는 자연스레 가라앉았다.

시몬도 플로라의 눈치를 살폈다.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동료로서 걱정이 크겠어.”

“네. 폴 경은 저 때문에 다친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플로라는 백작령에서 피가 낭자한 채 쓰러져 있던 폴의 모습을 떠올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때 느꼈던 분노와 충격은 여전히 가슴 속에 남아 있었다.

그녀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는 것을 눈치챈 시몬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고민했다. 지금은 위로도, 응원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예전에 그녀가 한 말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제 가벼운 말 한마디 때문에 그 사람이 죽을 수도 있어요. 그래도…… 서운할까요?’

‘말 그대로예요. 제 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거든요.’

그때는 별거 아닌 우연이 겹쳐 생긴 트라우마라고 생각했는데, 가만 보니 그게 아니었다.

플로라가 백작령에서 받았다던 쪽지 내용까지 알게 된 시몬은 그제야 비로소 지난날 그녀가 했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네 곁에 있는 사람은 모두 죽을 거라고…… 했던 말 기억하고 있어.”

“…….”

“모두 그들의 짓이었던 건가?”

플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에서 도망치기 전에도 종종 있었던 일이에요. 저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을 골라 죽인 모양이에요. 나중에서야 알았어요.”

그건 아이든의 악취미 중 하나였다. 플로라는 그 악마를 떠올리며 살짝 이를 악물었다.

“왜 그렇게 널 못살게 구는 거지? 비밀을 알고 있단 이유로?”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아이든이 인간 실험을 한다는 것은 외부인에게만 국한된 비밀일 뿐이었으니까.

아이든의 태도에 대해서는 플로라 역시 센칸에 머물 때부터 한참 생각해왔다.

앞에서는 다른 기사들보다 다정하게 대해주면서 뒤에서는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왜? 왜 나한테만 그래? 내가 뭘 잘못했어? 수없이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한 대답은 아직도 찾지 못했다.

플로라가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미친놈에게 답을 찾는 것만큼 한심한 짓이 없더라고요.”

억눌린 말에는 온갖 감정이 실려 있었다.

시몬은 해탈해 버린 듯한 플로라를 바라보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한 사람을 이렇게까지 망가뜨리다 못해 이제는 죽이려고 하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참자, 하던 인내심은 결국 동났다.

남들은 모든 걸 다 가졌다고 말하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정작 그녀에게 아무 도움이 될 수 없음에 화가 치밀었다.

처음 플로라를 성에 들일 때와는 완전히 다른 의도로, 그녀의 비밀을 알고 싶어졌지만 시몬은 스스로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플로라.”

“……네. 시몬.”

“내가 보여준다고 했지? 네 곁에 있어도 죽지 않는다는 거.”

그날의 일은 평생 잊지 못한다.

아이든이 만든 묘약을 먹는다 하더라도, 언제든 기억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플로라는 그때 느꼈던 주변의 풍경과 온도, 자신의 심장이 어떻게 뛰었는지까지 전부 기억했다. 그만큼 그녀에게 중요한 기억이었다.

“폴 경도 깨어날 거야. 그러니 너무 깊이 파고들지 마.”

툭툭, 머리 위로 와 닿는 손길에 플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회복해서 이제는 제가 지킬 거예요.”

“그래.”

플로라의 결의는 한층 견고해졌다. 어느새 얼굴에 드리워졌던 어둠은 사라진 채였다.

시몬은 옅게 웃었다.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자신의 것을 지키겠다는 마음을 가진 그녀가 평소보다 더 빛나고, 멋있어 보였다.

* * *

한밤중에 잠에서 깬 플로라가 창밖을 보았다.

오늘따라 유독 달이 밝게 느껴졌다.

여전히 여명기사단은 호위를 하는 모양이었다. 검은 그림자가 시야에 보였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얼마 전, 그녀를 습격하려 했던 괴한은 성에서 일하던 정원사 중 한 명으로 밝혀졌다.

플로라가 성에도 첩자가 있을지 모른다고 했던 말에 설마 하고 붙인 호위는, 그런 이유로 여태 계속되고 있었다.

밤까지 고생하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하긴 했지만 덕분에 밤이 편안했고, 몸도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다.

플로라는 침대에서 일어나 조심조심 창가로 향했다.

잠겨 있던 창문의 고리를 젖히고 열자, 선선한 바람이 들어왔다.

곧 나무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플로라는 소리가 나는 어둠 속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숨어 있던 기사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플로라가 그에게 가까이 와달라고 손짓했다.

머뭇거리던 기사는 얼마 후 어둠 속에서 빠져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플로라와 눈이 마주쳐 당황한 듯이 몸을 주춤거리더니, 이내 굵직한 나뭇가지를 타고 그녀가 서 있는 창문 가까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걱정이 묻어 있는 다정한 목소리는 속삭이듯 작았다.

플로라뿐 아니라 성기사들도 묵고 있는 숙소였기 때문에 소란을 떨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중상을 입은 기사들을 위해 성기사단 역시 건물 내부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한데 다른 기사단이 몰래 이들을 호위하고 있다는 걸 알면 자존심이 크게 상할 터였다.

잘못 걸렸다간 기사와 기사가 아니라 단장과 단장의 문제로 번질 수 있는 일이었다.

“아, 이거 드리려고요.”

플로라는 멋쩍게 웃으며 그에게 오늘 시몬에게 받았던 초콜릿을 한 움큼 건네주었다.

얼결에 손을 내밀어 초콜릿을 받은 기사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

“선물을 받았는데 혼자 다 먹긴 힘들 것 같아서요. 밤에 일하시려면 힘드실 테니까…….”

혹시 부담스럽다거나 오지랖 넓다고 생각할까 봐 횡설수설 말을 덧붙였다.

기사는 플로라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 옅게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짧게 묵례한 기사는 다시 어둠 속으로 연기처럼 사라졌다.

거절하지 않아 다행이다.

플로라도 편안한 마음으로 다시 잠자리에 누울 수 있었다.

* * *

“아주 쌩쌩하군. 그래.”

“저 다 나았습니다. 복귀하게 해주세요. 단장님.”

카신이 병문안을 온 김에 플로라는 복귀하고 싶은 마음을 슬쩍 내비쳤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빤히 그녀를 살피던 카신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십니까?”

“이틀은 얌전히 더 쉬어.”

“알겠습니다. 번복하시면 안 됩니다!”

“안 괜찮아 보이면 다시 보낸다.”

“……네!”

몸이 근질거려 죽을 것 같았다.

통증이 사라졌을 때부터 복귀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카신의 반대에 막혔다. 그는 기사단으로 돌아온다 해도 당분간 네가 임무에 투입될 일은 없으니 푹 쉬면서 회복부터 신경 쓰라고 말했다.

복귀 제안을 거절당해 서운했지만, 틀린 말도 없어 찍소리 못하고 참았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허락이 떨어졌다. 얼마나 기쁜지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었다.

카신이 그렇게 좋냐는 얼굴로 플로라를 봤다.

픽, 하고 한쪽 입꼬리만 당겨 웃는 모습이 그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게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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