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47)화 (47/154)

47.

“무사히 돌아오기만 하라고 했더니. 그 명령 하나 지키질 못해.”

카신은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쯧 차면서도 걱정 어린 표정은 숨기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단장님.”

플로라가 시무룩한 얼굴을 하자 카신은 한숨을 푹 쉬었다.

“깨어났으면 됐다.”

폴 경도 어서 깨어나야 할 텐데.

이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을 플로라는 똑똑히 들었다.

카신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자, 그가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괜한 짓을 했어. 오랜만에 들어온 제대로 된 기사라고 생각해서 빨리 키우고 싶었던 모양이야. 과욕이 불러일으킨 화지.”

기사들에겐 언제나 동료들의 죽음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그것이 그들의 삶이었다. 그럼에도 결코 초연해지지 않았다.

마굴에서 빠져나온 마수 때문에 가뜩이나 기사단의 인명 피해가 컸다.

그것도 모자라서 정체불명의 괴한까지 나타나 아끼던 신입 기사를 죽이려 했다.

카신의 마음은 평소보다 더욱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제가 선택한 일입니다. 그러니 단장님께서 자책하실 필요 없습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어.”

마음이 그렇지 못할 뿐이지. 그가 씁쓸히 웃었다.

이 자리가 주는 무게는 부하들이 다치거나 죽을 때마다 더해졌다.

누군가의 위로로도 그 텅 빈 공허는 채워지지 않았다. 스스로가 감내해야 할 몫이었다.

“잠깐 앉았다 가도 되겠나?”

카신의 말에 플로라는 여전히 단장이 선 채로 자신을 내려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황하며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한결 풀어진 표정으로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하게 이야기해줄 수 있겠나?”

카신이 머뭇거리다 물었다.

회복도 덜 된 부하에게 나쁜 기억을 되새기게 하는 것 같아 미안한 기색이었지만, 플로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설명했다.

하지만 그 전에 쪽지를 받은 일이나, 그자가 타국의 첩자일 것 같단 사실은 밝히지 않았다.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었다.

“토벌 임무에 나가서 폴 경과 가까이 지냈다고 하던데.”

“그렇습니다. 폴 경이 전투에서 다리를 다친 터라 방에만 갇혀 있었습니다. 도울 사람이 필요했어요.”

“걸을 수 있게 된 뒤로 혼자 산책을 다녀왔다고.”

“네. 제게 같이 가자고 권유했지만 거절했습니다.”

카신이 흠, 하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백작령에서 폴 경과 유달리 사이가 안 좋았던 사람이 있나?”

“수색조가 달라 잘 모르겠습니다. 백작성으로 돌아간 이후로 부딪친 사람은 없는 것으로 압니다.”

“경도 폴 경의 상처를 봤을지 모르겠지만…… 단도가 정확하게 박혔더군. 일반 사람이라면 기사를 제압해 깔끔하게 사람을 찌를 수 없을 거야.”

플로라도 그의 상처를 봤다. 상대가 누군지 지레짐작은 했고, 분노와 절망 따위의 온갖 음습한 감정에 휩싸여서 당시에는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지만.

“처음은 기습으로 찔러 운이라고 칠 수 있어도, 세 번이나 매끄럽게 찌르기란 쉽지 않아. 폴 경이 아무리 다리를 다쳤다고 하더라도 걸을 수 있다면 저항도 했을 텐데도.”

“그럼 기사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원한 관계가 있다면 충분하다고 본다. 게다가 사르트 경에게 듣기로, 범인이 말을 타면서 먼 거리에서 정확하게 경을 조준했다고 했어. 활을 다룬다면 알 거야. 아무나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거.”

플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단장님…… 이 일과 연관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폴 경이 공격당하기 이전에 제게도 의심스러운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얘기해.”

“단장님께서 주신 활을 누군가 제 방에 몰래 들어와 부러뜨리고 갔습니다.”

카신은 단숨에 눈썹을 구겼다.

“사르트 경이 뒤에서 엄호를 해주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저희를 공격하고 있다는 건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짐작했습니다. 신입 기사인 저희를 견제하고 있거나 원한을 가진 인물은 아닐까 하고요.”

“경은 원한 살 일이 있었나?”

“아니요. 처음에 활이 부러진 것을 봤을 때는, 단순히 저희를 괴롭히던 상관의 장난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폴 경도 같은 생각이었고요. 하지만 괴롭히는 것과 살의를 느끼는 것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지 않습니까. 제게만 원한이 있었다면 폴 경을 공격한 이유를 모르겠고요. 저와 폴 경 둘 다 죽이고 싶어 했던 것 같은데, 저희 둘의 접점은 별로 없어 특정 인물을 짐작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일단 그 일도 연관 지어 조사해보겠다. 이미 기사들 상대로, 무단이탈을 한 사람이 있는지 조사는 마쳤지만 나온 게 없었어. 그렇다면 활을 부러트린 자와 공격한 자, 둘로 나뉘었다고 보는 편이 맞겠군. 공범일 수도 있겠어. 일단 조사를 더 해볼 테니…….”

“…….”

“너는 이제 아무 생각 말고 쉬어.”

카신이 플로라의 이마를 가볍게 톡톡 건드려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단장님.”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지 못한 점이 미안했다.

* * *

플로라에게 닿는 위협은 그치지 않았다.

이미 그녀의 평화는 백작령에 잠입한 첩자에 의해 산산조각이 났다.

센칸에 있을 때부터 주기적으로 먹어야 했던 이름 모를 액체들 중에는 기사들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묘약이 섞여 있었다.

그 때문에 아이든이 그동안 도망친 그녀를 줄기차게 추격할 수 있었다.

아이든은 천재가 나쁜 마음을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전형적인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마법석에 담긴 마력을 추출해 온갖 마도구를 만들어 낼 수 있었고, 그것으로 모자라 신의 영역에도 도전하고자 하는 놈이었다.

플로라가 보기에 아이든은 이미 연금술로는 최고의 경지였다.

그가 개발한 묘약이 세상에 풀린다면 온갖 범죄에 악용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이미 섬에 틀어박혀 온갖 나쁜 짓은 다 하고 있지만, 한곳에 정착해 센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나온 삶을 잊게 만드는 묘약, 신체를 일부 강화시키는 묘약, 마도구와 연계해 위치를 추적할 수 있게 하는 묘약 등. 신박한 것들을 오랜 시간 연구하며 잘도 개발했다.

플로라도 그중 여러 개의 묘약을 마셨다.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묘약은 물론이고, 아마 과거가 잘 생각나지 않는 것을 보면 기억을 잃게 만드는 것 또한 마셨던 것이 분명했다.

추적의 주기가 점점 길어진 것으로 봐서는 그 묘약에는 기한이 있는 모양이었다.

원래 물불 안 가리는 아이든의 성정으로 본다면, 이런 위협도 성에 발을 들이자마자 받았어야 했다.

‘……누군가 있다.’

이제는 완벽하게 들킨 것 같으니 습격에 대비해야 했다.

플로라는 잠결에 느껴지는 낯선 인기척에 눈을 번쩍 떴다.

잠결에도 이렇게 경계를 품은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눈을 굴려 재빠르게 주변을 훑어보았으나 다행히 방 안에서 느껴진 인기척은 아니었다.

창밖이었다.

주변에는 손에 잡힐 만한 무기가 없었고, 몸을 전처럼 날렵하게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순간 등줄기에 식은땀이 났다.

그리고 그때, 창가에 비치던 검은 그림자가 갑자기 사라졌다.

당장이라도 들어올 기세였는데……?

플로라는 꾸역꾸역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챙겨 들었다.

그녀가 창가로 다가갔을 때, 마치 그림 같은 한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달빛이 비치는 아래로 누가 봐도 수상한 남자를 단숨에 베어 버리는 어떤 기사가 있었다.

그를 죽이고, 검은 가면을 벗겨 얼굴까지 확인한 기사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검을 든 채 경계하고 있던 플로라와 눈이 마주쳤다.

푸른색의 긴 머리칼을 반으로 묶은 남자였다. 달빛이 내려 그런지 유독 반짝거리는 것만 같았다.

입고 있는 옷을 보아하니 누군지 알 것 같았다.

* * *

폐하께서 묘령의 여인을 성으로 데려오신 후, 그녀를 만나는 일이 잦아졌다.

이젤은 폐하가 그 여자를 볼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눈치챘다. 연애는 이미 숱하게 해보았기에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도 알았다.

정작 폐하 본인은 느껴지는 감정을 부정하고 억누르려 하시는 것 같아 안타깝지만…….

근위대에 입단한 이후로, 한 번도 폐하께서 여자에게 관심을 보인 걸 본 적 없었기에 더 이젤의 흥미를 끌었다.

사실 황제의 많고 많은 소문 중에는 폐하가 남색이라는 것 또한 있었다.

시몬에게 따르는 모든 소문이 거짓이었지만 그동안 연애를 한 번도 하지 않으시니, 황제가 사실 남색이다! 하는 소문은 이젤 역시 은연중에 의심하고 있던 참이었다.

기사단 내에서도 인기 많은 이젤이 인정할 정도로 눈이 부시게 아름답고 완벽한 황제에게 그 정도 흠은 인간미라고 생각했다.

소문이 사실이라고 해서 충성이 꺾일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결국 그 소문도 사실이 아니었다.

폐하는 역시 완벽하셔.

그런 폐하를 사로잡은 여인은 대체 뭘까.

이젤은 더더욱 플로라가 궁금했다.

그러던 그에게 성기사단 숙소를 호위하라는 임무가 내려졌다.

그곳에는 폐하께서 데려오신 여인, 플로라가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