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44)화 (44/154)

44.

입술을 움직일 적마다 쩍쩍 달라붙었던 것이 겨우 떨어졌다.

입 안 역시 처음에 눈 떴을 때와는 달리 한결 움직이기가 편해졌다.

‘폴은 어떻게 되었지? 시몬은? 사르트 경은?’

하지만 아직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거나, 몸을 일으키는 것은 무리였다.

숨을 쉴 때마다 몸속에 있는 온 장기들이 바늘에 찔리는 것 같았다.

플로라는 궁금한 것이 많았으나 결국 무언가를 말하거나, 움직이길 포기했다.

신관은 다정한 목소리로 조금 더 잘 수 있게 돕겠다는 말과 함께 플로라에게 약간의 치유력을 불어 넣었다.

‘편안해…….’

격통으로 혼란스럽던 머릿속이 차츰 안정되더니, 이내 시야가 어두워졌다.

* * *

습격으로 크게 다친 신입 기사를 맡게 된 하급 신관 니야는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성기사단의 숙소를 신전의 병실로 쓰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기사의 숙소는 따로 시녀가 배정되지 않으니 청소 또한 방의 주인이 직접 해야 했다.

사경을 헤매는 환자에게 청소를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 일은 고스란히 니야의 몫이다.

그 외 매시간 환자의 상태를 체크해서 보고를 올리고, 상급 신관이 지시한 간단한 치유 또한 해야 했다.

시간 맞춰 입술 사이로 물을 흘려 넣어준다든지, 메마른 얼굴을 꼼꼼히 닦아준다든지 하는 자잘한 일도 모두 그녀가 맡았다.

그뿐이랴. 나머지 비는 시간에는 아르제카 님께 기도를 올리고 성전도 읽어야 했으니 근래 니야의 하루는 무척 바쁘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오전 기도가 끝나면 점심 기도가 열릴 때까지는 꼼짝없이 환자의 곁에 머물렀다.

오늘도 그녀는 청소를 하는 중이었다.

간밤에 내려 두었던 커튼을 곱게 접어 묶고, 창문을 연 뒤 곳곳에 내려앉은 먼지들을 닦아냈다.

‘이제 슬슬 오실 시…….’

그리고 어떤 생각을 끝마치기도 전에 방의 문이 열렸다.

니야는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 그에게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카신 님.”

제국의 황실 기사단 중 하나인 백기사단의 수장, 카신 르벨로티아 백작.

오늘은 그가 첫 방문객이 되었다.

근 일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성기사단의 숙소를 집처럼 들락날락하다 보니 궁금하지 않았던 것 또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이 방에는 신입 기사를 걱정하는 방문객이 아주 많다는 것.

그중 대부분이 성을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보기 힘든 고명하신 분들이라는 것.

“며칠 전에 잠깐 눈을 뜬 것 외에는 아직 소식이 없는 건가.”

카신의 무덤덤하고 냉기 서린 목소리에는 어쩐지 약간의 쓸쓸함 또한 묻어 있는 것 같았다.

혼잣말이 아니라, 제게 질문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니야가 방을 나가려다 멈춰 서서 재빨리 대답했다.

“예. 하지만 금방 깨어나실 겁니다. 이든 님께서도 그리 말씀하셨어요.”

카신은 ‘벌써 며칠째 그 말을 하는 거지?’ 하고 다그치는 듯한 눈빛으로 니야를 바라보았다.

니야는 더 해줄 수 없는 말이 없었다.

괜한 불똥이라도 튈까 후다닥 방에서 빠져나온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짧게 폭 내쉬었다.

전장에서 적을 서슴없이 베고 죽이는 사람의 눈빛이 얼마나 냉철한지는 마주 보아야 알 수 있었다.

카신 단장은 살짝 마주보기만 해도 간이 떨렸다.

카신이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이든 님이 오셨다.

며칠 치유력을 무리해서 사용해 피곤하고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모습에도 이 신입 기사만큼은 꼭 시간 맞춰 제 손으로 돌보셨다.

그런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든 님의 치유를 가까이서, 그것도 혼자서! 직관하며 그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에 무척 기뻤다.

그녀에게 이보다 더 훌륭한 교육은 없었다.

그리고 다음 방문객은 어떻게 보면 카신보다 더 무서운 사람들이었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할 일을 마저 하거라.”

그들은 자리를 비켜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게 더 불편했다.

방문객은 그걸 모르고 있는 듯하지만 감히 말대답을 할 수도 없어 고분고분 따랐다.

니야는 마른 수건을 물에 적시다 말고 손끝을 살짝 떨었다.

몸을 움직이는 행동 하나하나에 제약이 걸린 것처럼 삐끗거렸다.

시선이 느껴진다고 해서 곁을 돌아볼 수도 없었다.

‘차라리 무릎을 꿇고 엎드리게 해주세요.’

니야는 속으로 울음을 삼키며 수건의 물을 꼭 짜내었다.

간헐적으로 떨리는 몸을 겨우 틀어 서자마자, 주홍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소, 송구합니다!”

하네칸 제국의 태양, 시몬 이제너스.

감히 폐하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니야가 울컥 솟아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반사적으로 사죄의 말을 건네자, 시몬이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이쯤 되면 익숙해질 법도 되지 않았나. 괜찮으니 계속해.”

전혀 익숙해지질 않는데요. 폐하. 전혀요!

니야는 울음을 삼키며 겨우 신입 기사의 입술 주변을 부드럽게 닦아 내기 시작했다.

‘나는 하급 신관이야. 본분을 잊지 말자…….’

니야는 속으로 계속해서 자신의 본분에 대해 되뇌었다.

일에 집중하면서 몸이 떨렸던 것은 겨우 멈췄지만,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듯 뛰어대는 것은 여전했다.

일을 마치고 나자, 시몬이 수고했단 말을 건넸다.

정말이지…… 얼른 도망치고 싶었다.

니야는 물을 버리러 간다는 것을 핑계로 방을 나섰다.

방을 나가려는 도중에 문 옆에 서 있던 에르네와 살짝 팔이 부딪친 것만 빼면 정말이지 완벽한 도주 계획이었다.

황제의 직속 근위대. 그중에서도 최고인 근위대장, 에르네 폴 라이젠 경.

무시무시한 소문만 한 트럭인 그를 직접 마주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카신보다도, 그리고 어쩌면 황제보다도 눈빛이 매섭고 잔인해서 눈을 마주친 순간, 신의 품으로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니야는 새삼 자신이 극한 직업을 가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이후에도 여러 기사들과 흑기사단장 하키라까지 들르고 나서야, 니야의 하루도 끝이 났다.

“오늘도 수고했어. 니야. 이만 들어가 봐.”

“감사합니다!”

니야는 이든을 향해 맑게 인사하고, 잠시 머뭇거리다 물었다.

“저, 그런데요…… 이든 님. 기사님은 언제쯤 깨어나실까요?”

“……곧 깨어나실 거야.”

곧 깨어날 거라는 말은 어쩐지 주문처럼 들렸다.

니야는 침대 옆에 앉아 기사를 빤히 보는 이든의 모습을 살폈다.

‘피곤하실 텐데…….’

처음에는 저 표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리 환자여도 왜 저렇게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인지. 자신이 혹사당하는 줄도 모르고 왜 저리 미련하게 모든 것을 도맡아 하려는 건지.

하지만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곳에 방문한 몇몇 사람의 표정은 단순한 ‘걱정’을 벗어난 범주의 것이었으니까.

니야는 오늘 밤에는 신입 기사님과 내일 또 방문할 고명하신 분들을 위해 기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 * *

“수고했어요. 파르베 경.”

아이든은 반짝거리는 마법석을 손바닥에 놓고 바라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근데 왜 여기까지 직접 왔나요? 중요한 일이 아니면 서신이나 다른 이에게 말을 전하는 거로 대신하라고 했을 텐데.”

“…….”

“고향이 그리웠던 건 아닐 테고.”

짙은 남색의 주머니에 회수한 마법석을 넣은 아이든은, 이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기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무슨 중요한 일이 있으셨을까?”

비아냥거리는 듯한 목소리에도 파르베는 꿈쩍하지 않았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든 파르베가 아이든을 향해 고했다.

“플로라를 보았습니다.”

와락 구겨지는 얼굴에 잠시 등골이 서늘해졌지만, 파르베는 주먹을 꽉 말아 쥐는 것으로 그 두려움을 이겨냈다.

“……어디서?”

교양은 금세 잊었다는 듯한 하대가 그에겐 더 익숙했다.

파르베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녀가 하네칸 백기사단에 입단한 것 같습니다. 이번 백작령에 생긴 마굴 토벌대에 함께 왔어요.”

하네칸. 결국 하네칸인가…….

아이든은 마른 침을 삼키며 자신의 가운을 꽉 움켜쥐었다.

알 수 없는 초조함이 밀려들었다. 머릿속에 어둠의 연개가 꽉 낀 것 마냥 갑갑하다.

“제 손으로 직접 처리하고 싶었지만 기회가 닿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아이든 님께서 주신 독으로 그녀에게 상처를 내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한동안 깨어나지 못할 겁니다.”

“방금 그 애에게 독을 썼다고 했나?”

“……네.”

아이든은 잠시 충격받은 얼굴로 멈춰 선 채 고민에 잠긴 듯 눈만 굴렸다.

마음대로 플로라를 처리하려 한 기사를 죽여야 할지 말지, 하는 고민이었지만 파르베는 알 리 없었다.

그저 다음 명령을 기다리며 묵묵히 주인에게 복종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을 뿐이었다.

“……명령 없이 멋대로 움직였음에도 플로라를 놓쳤다는 무능하고 멍청한 소릴 하러 여기까지 온 건가. 파르베 경.”

자신이 얼마나 멍청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반박할 수 없었다.

신 아르제카가 직접 돌보기라도 하는 놈들인지 다리를 다친 기사의 숨통을 완전히 끊기 전에 주변에서 인기척이 들려 몸을 숨겨야 했다.

게다가 소중한 사람을 지키려는 플로라를 쫓을 때는, 제국의 마스터가 그녀를 엄호해 공격에 방해를 받았다.

어떤 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해 벌을 받으리란 건 알았지만 그래도 직접 주인에게 고해야 할 것 같았다.

그건 진짜 ‘기회’를 얻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아이든 님. 제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신다면 반역자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