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그, 남자는…… 주, 죽였……습니……까?”
“경, 말하지 마.”
순식간에 제도였다.
건장한 남성을 등에 업고 걷는 사르트의 발걸음이 묵직했다.
하지만 그의 신경은 오롯이 옆에 있는 이에게 쏠렸다. 플로라까지 부축하기에는 손이 모자라서 홀로 걷도록 내버려두었더니, 까딱하면 정신을 놓을 것처럼 위태로워보였기 때문이었다.
보다 못해 힘들면 팔이라도 잡고 걸으라는 말을 건네자, 그녀는 겨우 손을 뻗어 옷깃을 꽉 쥐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 플로라 경.”
“…….”
“죽지 마.”
사르트는 담담하게, 그러나 진심을 담은 어조로 말했다.
플로라는 듣지 못한 듯 계속해서 꼴까닥 숨이 넘어갈 것처럼 굴었지만, 옷깃을 잡은 손에 좀 더 힘이 실리는 것이 느껴져 안심했다.
광장부근까지 도착해서야 오후 정찰을 나온 기사를 만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중급기사의 등에 업힌 플로라는 그제야 완전히 정신을 놓았다.
“……이…는, 안 돼.”
끊기듯 들리는 그녀의 음성은 사르트의 귀에 또렷이 들렸다.
이번에는 안 돼.
***
이든과 몇 명의 신관들은 부름을 받아 급하게 이동했다.
성기사단 숙소에 심한 독에 노출된 환자 두 명이 있었다.
신전에서 이 숙소까지 걸음을 옮기는 동안 아니길 계속해서 바랐건만, 한쪽은 또 익숙한 얼굴이었다. 신관들을 다른 기사 쪽으로 보낸 이든은 플로라의 상태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찢긴 단복 사이로 손을 넣어 손쉽게 갈라낸 이든의 얼굴에 찬기가 서렸다.
“마수에게 당한 건가요?”
두 명의 부상자를 모두 데리고 온 명예기사가 플로라의 방 모퉁이에 심각한 표정을 한 채로 서있었다. 이든은 거리낄 것 없이 그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대답은 금방 돌아왔다.
“습격이었습니다.”
습격이라는 짧은 말 이후로도 자초지종을 간단하게 설명하는 기사의 말을 들으며 이든은 입술을 살짝 짓씹었다.
치유에 집중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사르트까지 방에서 내보낸 이든은 급한 대로 치유력부터 쏟아 넣었다.
마수에게 당했냐고 물었던 건 괜한 것이 아니었다. 몸 안에서 꿈틀 거리면서 제 영역을 넓혀가려는 이 보랏빛 독 속에서 마수의 것 같은 어떤 불쾌한 기운이 느껴졌다.
치유력으로 해독하는 것은 여러 번에 걸쳐서야 가능했다.
어떤 고약한 작자가 만들어낸 독인지는 몰라도, 해독하기가 퍽 까다로운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 따로따로 제 영역을 넓히며 독을 퍼트리는 것만 봐도 그랬다.
이든은 독이 더 퍼지지 못하도록 응급처치만 간단히 한 상태에서 문을 열어 여자 성기사와 신관을 불러 치유하기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혀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다른 방으로 향했다. 옷을 벗길 시간조차 없었는지 남자 기사의 옷을 아무렇게나 찢어낸 흔적이 방 안에 역력했다.
세 명의 신관은 심각한 부상을 입은 기사를 돌보고 있었다.
“상태는 어떻습니까?”
이든이 그들 틈에 끼어 육안으로 상처를 확인했다. 등에 완전히 독이 퍼져 보랏빛으로 변한 형태가, 꼭 차원의 결계 너머에서 온 마족처럼 보였다.
“좋지 않아요. 상처도 깊고, 피도 많이 흘린 것 같아요. 게다가…… 이 독은. 해독하기가 너무 까다로워요.”
응급처치를 빨리 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죽었을 것이 분명했다.
이든은 다시 플로라에게로 갔다.
그녀는 어느새 단복 대신 하얀 로브만 걸친 채였다.
방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령을 끝으로, 이든은 치유를 시작했다.
독이 어디까지 퍼졌는지 몸을 구석구석 확인해야 했기에 여자 신관 또한 함께했다. 외관상으로는 오른쪽 팔 전체와 어깨, 그리고 등까지만 퍼져 있었다.
하지만 막상 치유에 들어가니 몸 속 내부까지 그 영향이 닿은 것 같았다. 한참 힘을 쏟아 부었다. 독을 조금 완화시키고 나서야 이든은 의자에 힘겹게 주저앉았다.
“이든 님, 괜찮으십니까?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제게 시키십시오.”
“물과 수건을 준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마력은 무한대로 생성되는 것이 아닌 소모였다. 마치 기사들이 검을 많이 휘두르면 지치는 것처럼. 치유력도. 마력도 그랬다. 처음에 이성을 잃고 온갖 치유력을 다 때려 부었더니 금방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이든은 모든 것이 불타버린 듯 멍한 눈빛으로 플로라를 보았다. 엎드려 누워 있는 그녀의 등이 눈에 들어온 탓이었다. 이리 저리 찢기고, 찔린, 수많은 자국. 살면서 많은 기사들을 치유했고 그들의 상태를 살폈다. 그러나 여태껏 봐왔던 사람들 중 이렇게 상흔이 많이 남은 사람은 없었다.
“도대체 레이디는…… 어떤 삶을 살아오신 겁니까.”
검을 쥐는 그녀에게 감히 몸을 아끼라고 말할 수 없었다.
몸에 고스란히 남긴 지나온 나날들의 상처가 궁금했고, 살아온 삶이 궁금했다.
궁금한 것은 차츰 늘어만 갔다. 계속해서 눈이 닿았다. 마음껏 연민하고 사랑하고 긍휼하되, 욕심은 내지 말라는 아르제카님의 응답에 순응하려 했지만 인간의 몸인지라, 하찮은 마음인지라 계속해서 짓궂은 감정이 들었다.
자꾸 이렇게 마음을 쓰게 만드니, 더더욱 감정을 다스리기가 어려웠다.
계속 들여다보고, 지켜주고 싶었다. 이런 생각은 욕심일까? 아르제카님께서 말한 ‘욕심’이란 대체 무엇일까.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한 이든은 긴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쓸쓸하게 웃었다.
***
“비켜.”
“폐하, 이든 님께서 치유중이십니다. 조금만…….”
시몬은 사색이 된 얼굴로 꿋꿋하게 문을 사수하려는 신관을 가볍게 밀치고, 문을 열어젖혔다. 벽에 머리를 기댄 채 지친 듯 눈을 감고 있던 이든이 한쪽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방에 들어온 이를 확인했다. 시몬과 에르네인 것을 보곤 옅게 웃었다.
“소식이 빠르십니다. 폐하.”
“상태는 어떻지?”
“지금은 많이 호전됐습니다.”
“이게 많이 괜찮아진 건가? 그럼 처음엔 얼마나 심했다는 건가.”
반쯤은 이불이 덮인 채였으나, 날갯죽지까지 드러난 플로라의 등과 어깨가 보랏빛으로 얼룩덜룩했다. 시몬의 눈빛에 냉기가 서렸다.
“폐하. 레이디께서 처음 이곳에 오셨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
“그때보다 훨씬 까다로운 독입니다. 퍼지는 속도도 빠른데다 해독하기가 힘들었어요.”
그 말에 상응하듯 확실히 이든이 지쳐보였다. 그만큼 치유력을 많이 소모했단 소리겠지. 근래 들어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조금만 더 늦게 오셨더라면 죽었을 겁니다. 독에는 면역을 가지고 계신 줄 알았는데…… 아니군요. 아니면 레이디께서도 예상 못한 다른 형태의 맹독일 수도 있고요.”
숙소 밖에서 만난 백기사단의 명예기사에게 사건의 경위에 대해서는 들었다.
체면이고, 신하들의 시선 같은 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숙소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직접 플로라의 상태를 두 눈으로 확인을 해야만 안심이 될 것 같아, 앞을 막아서는 신관까지 제치고 들어왔다.
……확실히 이성을 잃었었다.
“그럼 목숨은 부지했다는 건가.”
“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조금 안심이 됐다.
시몬은 제 머리를 가볍게 쓸어 올리며 눈을 감았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면 됐다.
죽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었기에 그런 생각은 다소 충격이었다.
애초에 마수 토벌 임무에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보낼 수밖에 없었던 마음이 떠올랐다. 수십 번도 더 마음을 다잡았다. 그때 고집을 부려봤어야 했다. 후회는 언제나 선택보다 늦었다.
시몬은 침대 옆 탁상에 놓인 천에 물을 묻혀 그녀의 얼굴을 직접 닦아 내었다.
에르네가 말렸고, 이든 또한 자신이 하겠다고 만류했지만 시몬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
플로라가 간신히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익숙한 공간, 익숙한 냄새. 무사히 성에 도착했단 사실에 가장 먼저 안심했다.
옆에서 찰랑 거리는 소리가 들려 눈을 굴리니, 신관복을 입은 여인이 수건에 물을 묻히고 있었다.
“아, 깨셨습니까? 아르제카님의 은총이 기사님께 깃들기를.”
신관은 적신 수건을 들고 플로라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눈을 뜨고 있는 그녀를 보고 다소 놀란 듯한 얼굴을 했지만, 이내 정중하게 인사를 하곤 플로라의 입가를 닦아주기 시작했다. 플로라는 고분고분 그 손길을 받았다.
반항할 힘도 없거니와 목이 말라 죽을 것 같았다. 신관이 입술 주변을 닦아준 덕분에 그나마 갈증이 조금 해소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갈증은 계속 되었다. 물을 달라고 해야 하는데 입이 차마 떨어지질 않았다.
플로라가 입술만 움찔 거리자, 가만 내려다보던 신관이 대답했다.
“아, 아직은 좀 더 쉬셔야 해요. 목이 마르실 수도 있으니 물은 가볍게 입술 사이로 몇 방울씩만 떨어트릴게요.”
신관은 숟가락을 이용해 천천히 입술 위에 물을 툭, 툭 떨어트렸다.
마른 땅에 단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