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흰색과 검은색의 격자무늬로 이어진 바닥이 그의 피로 얼룩덜룩해졌다.
“……마을 외곽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계신 걸 발견했습니다. 단복을 입고 계시지 않았다면 몰라 뵐 뻔했습니다.”
그를 여기까지 데려온 병사는 힘이 다 빠진 듯 그 옆에 주저앉아 상황을 보고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부단장이 기사들에게 신관을 불러 올 것을 명령했다.
상황의 심각성을 직접 확인한 기사들이 너나할 것 없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플로라는 한참을 어쩌지 못하고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하지만 뻣뻣해진 몸과 달리, 그녀의 검은 동공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세차게 흔들렸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센칸이 그동안 제게 어떤 짓을 벌여 왔었는지 잠시 잊고 있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그동안 과거 같은 건 모두 잊은 양, 참 태평하게도 지냈다 싶어 기가 찼다.
‘어서 가거라.’
‘하지만…… 어르신이.’
‘……찾는 사람이 없다면 돌아가겠지. 지들이 별 수 있겠나? 어서 가. 이것아. 살아야지.’
센칸을 탈출한 후, 플로라가 처음 만났던 어르신의 마지막 미소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3일은 꼬박 굶고 정처 없이 걷기만 하던 그녀에게 빵 한 조각을 나눠 주었던 오두막집의 여자도, 대제국으로 걸어갈 수 있는 방향을 일러준 남자도 떠올랐다. 모두 센칸의 손에 의해 처참히 죽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플로라가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죽은 게 아니었다. 그저 플로라를 돕고, 말을 섞었기 때문에. 단지 그런 이유로 짓밟혀버린 것뿐이다.
비릿한 웃음이 목 안쪽으로 삼켜졌다. 예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센칸은 애초에 그런 야만적인 놈들이었다.
“독이 많이 퍼졌습니다. 출혈은 잡았지만 독이 문제에요. 퍼지는 속도만 늦췄을 뿐 정화는 제 선에서 불가능합니다. 제도에 있는 신전에서 치유력 강한 신관님께 치료받지 못하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듯합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온 백작령의 신관이 폴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드러난 폴의 등에 단도에 찔렸던 자국이 세 군데나 나 있었고, 피부는 보랏빛으로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폴에게 난 상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플로라가 미간을 좁혔다.
독을 쓰는 것을 보면 더 의심할 여지도 없이 센칸의 짓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독이 퍼지는 상태가 지금껏 그녀가 보고 겪었던 것과는 좀 달랐다. 웬만한 독에는 해독법을 알고 있는 플로라지만, 이건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었다.
길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기간 동안 아이든은 더 끔찍한 것을 만들어내고 발전한 모양이었다.
“누가 이런 짓을……!”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단장 하키라는 분노했다. 목숨이 위태로운 긴박한 상황인 만큼 기사단 간부들은 긴급회의를 시작했다.
그동안, 신관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치유력을 폴에게 붓고 코피를 쏟았다. 그럼에도 폴의 등에 퍼진 독은 조금도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플로라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에 절망했다. 해소되지 않는 분노가 피부까지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
폴 경은 제도로 긴급호송하기로 결정됐다. 호송 인원은 둘. 플로라와 사르트였다. 토벌 임무가 끝났고, 동이 틀 무렵이면 다른 기사들 역시 출발할 예정이니 인원이 비어도 무리 없을 거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플로라는 괴한이 또 다른 기사를 위협하면 어쩌나 고민했으나, 결국 폴을 제도로 데려가는 편을 택했다. 이미 성과 마을에 경계는 강화되었다. 사르트를 제외한 마스터들도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제 아무리 막무가내인 센칸이라도 전쟁을 할 생각이 아닌 이상은 멍청하게 굴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하키라는 세 사람의 텔레포트 이용을 허가했다. 가장 가까운 텔레포트는 백작령의 경계에 있었다.
플로라는 폴이 쓰러지지 않도록 꽉 붙잡은 채 말을 탔다. 곁을 따르는 사르트는 수상한 자가 없는지 경계하고 엄호했다.
텔레포트까지는 꼬박 달리면 한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다. 곧장 제도와 연결된 곳으로 갈 수 있으니, 거기까지만 무사할 수 있으면 됐다.
그리고 무탈하게 반 정도 달려 왔을 때였다.
“……플로라 경.”
“예.”
“뒤에 누가 따라 붙은 것 같군. 넌 앞만 보고 달려라.”
사르트의 외침에 플로라는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얼굴은 검은 천으로 가려 있어 보이지 않았지만, 단복도 입지 않았으니 확실히 아군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달리는 채로 화살을 장전하고 있었다.
공격이다.
“최대한 빨리.”
플로라는 사르트의 명령에 따라 좀 더 속력을 냈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간절함과 긴장감, 그리고 분노는 한데 뒤엉켰다.
소중한 것이 생기고, 지킬 것이 생기면 그만큼 위험한 일도 많이 생길 거라는 가르침을 주었던 기사단 상관의 말이 떠올랐다.
도망친 이후 센칸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자신을 도운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이제는 집요하게 하네칸까지 쫓아 들어와 동료들과 소중해진 사람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번엔 가만히 안 둬.’
절대로.
플로라의 눈빛에 한층 강한 의지가 깃들었다.
***
사르트가 괴한을 공격하기 위해 속도를 늦추고, 가까이 붙으려 하자 활을 쏘는 방향이 바뀌었다.
이번엔 플로라 쪽이었다.
화살촉은 오른쪽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강한 통증과 함께 잠시 몸의 균형을 잃을 뻔했으나 플로라는 내리 꾹 참았다.
뒤를 돌아 볼 여력도 없었다. 화살촉에 폴에게 썼던 독이라도 묻어 있는 것인지 조금씩 저릿해지기 시작했다.
플로라는 이를 악물었다.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는 건 웬만한 실력자가 아닌 이상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멀어지고 있는 플로라를 활로 위협할 정도니 검술 또한 출중한 자일 게 분명했다.
사르트는 계속 날아오는 화살을 칼로 쳐내고, 또 적에게 가까이 붙으려 하고 있었다.
‘거의 다 왔으니까…… 조금만.’
그때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멍한 이명이 찾아왔다.
플로라는 깊게 숨을 삼켰다. 살이 찢어지는 고통은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눈을 슬쩍 내려 보니 화살이 깊게 지나간 자리에 뜨거운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웬만한 독에는 내성이 있었지만, 이리 연달아 여러 군데를 공격당하면 그녀도 버티기 힘들었다. 게다가 폴이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야 해서, 온 몸에 힘을 주고 있었더니 체력이 더 빠르게 소진 되었다.
두피까지 지끈지끈 거리는 통증이었다. 눈앞이 거꾸로 뒤집히려 할 때마다 플로라는 자신의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입술 속으로 비릿한 피 맛이 스며들었다.
사정거리를 벗어난 것인지, 다행히 더 이상의 공격은 없었다.
속도는 자연스레 줄었고, 플로라는 뒤집히려는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렸다. 멀리 목적지가 보였다.
저건 아르제카의 신상이 분명했다.
***
텔레포트를 할 수 있는 아르제카의 신상에 도착한 플로라는 바싹 마르기 시작하는 입 안을, 입술에서 흐르는 피로써 축였다. 팔 한쪽은 이제 완전히 고장 났다. 감각이 없으니 통증도 미비해진 것이 다행이었다.
폴을 짐처럼 자신의 어깨에 얹어 내리려 했으나, 키가 크고 건장한 성인 남성을 성치 않은 몸으로 제대로 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플로라는 폴의 아래에 깔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폴이 더 다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끙끙거리며 벗어나려 해봤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한참 발버둥 쳤다.
‘시간이 얼마 없어…….’
플로라는 점점 더 어둑해지는 주변을 돌아보며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사르트를 기다릴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만에 하나 그까지 잘못되기라도 했다면. 정말 시간이 없다.
더 이상 나약하게 굴 수 없다고 판단한 플로라는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폴에게서 벗어났다. 제도로 돌아가 폴을 무사히 치유하고, 시몬의 안위 또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독하게 마음을 먹고 부르르 떨리는 다리에 겨우 힘을 주어 일어서던 찰나였다.
멀리서 말이 빠르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팽그르르 도는 시야 사이로 언뜻 흩날리는 금빛 머리칼이 비췄다.
사르트다.
마치 그가 구세주처럼 느껴졌다.
“플로라 경.”
능숙하게 말에서 내린 사르트가 플로라를 부축했다. 그 역시 많이 지쳐 보이는 기색이었으나,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경. 걸을 수 있겠어?”
사르트가 눈을 찡그린 채 플로라를 훑었다.
그녀가 화살에 맞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용케 균형을 잡고 계속해서 말을 몰기에 가벼운 상처인 줄 알았다.
오른쪽 팔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건지 뼈가 부러진 사람처럼 축 늘어뜨린 채였고, 입술은 짓누르고 터져 주변에 피가 범벅이 되어 있었다.
몸도 간헐적으로 떨리는 것 같았고, 정신 또한 거의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르트가 미간을 구겼다. 그는 다른 말 같은 것들은 전부 잊고, 재빨리 텔레포트를 할 준비를 했다.
말을 기둥에 묶어 둔 뒤, 폴과 플로라를 아르제카의 신상이 감싸는 동그란 마법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윽고 사르트가 마력을 불어 넣자, 마법진에 반짝거리는 빛이 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