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마수는 완벽하게 처치되었다.
모두가 지친 기색으로 검을 넣고 부상자를 챙겼다.
플로라도 마수가 쓰러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올라왔던 길을 도로 내려가 다친 기사들을 도왔다.
누군가 명령하지 않아도 자신의 동료들을 챙기는 이들의 모습을 보자, 가슴속에서부터 타오르는 듯한 감정이 전신을 뒤흔들었다.
이건 플로라가 그동안 누려보지 못했던 삶이었다.
부상당해서 쓸모가 다한 사람은 버리고 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하나 같이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조직이었다. 센칸은.
플로라는 새삼 자신이 얼마나 쓰레기 같은 곳에 몸 담그고 있었는지 실감했다.
폴은 왼쪽 다리에 부상을 입은 채 커다란 돌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지키겠다고 다짐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는 플로라가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공격당해 다친 상태였다고 했다.
플로라가 걱정하는 기색을 비치자, 폴은 괜찮다며 씩씩하게 웃어 보였다.
플로라의 눈에는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3급 마수가 여기 있는 걸 보니. 마굴에 있는 것들은 다 빠져나온 모양이군.”
하키라는 쯧, 하고 혀를 차며 볼품없이 늘어져 있는 식물 더미를 보았다.
“너희는 여기서 부상당한 기사를 살피도록. 나는 마굴에 다녀오겠다. 혹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잔당이 숨어 있을지 모르니.”
“단장님! 그건 위험합니다. 아직 마굴 안쪽 상황이 어떤지 모르지 않습니까. 적어도 정예 기사는 전부 데려가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흑기사단 기사가 단장의 말에 절대 안 된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몇몇 기사들이 덧붙여 동의하자, 그럼 따라오라는 듯 손짓했다.
플로라는 하키라 단장의 명령에 따라 협곡의 뒷정리를 했다.
출혈을 멈추고 상처 회복에 도움을 주는 약초들을 산에서 뽑아와 짓이겨 부상당한 기사들의 환부에 발랐다.
대부분 미심쩍어하는 눈빛이었지만 많이 지친 터라 이게 뭔지 캐묻거나 반항할 힘도 없는 듯 그저 순응했다.
사망한 기사들은 한쪽으로 모아 곱게 눕혔다. 유품 또는 옷깃을 잘라 모아두고, 그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위해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사망자는 총 다섯 명이었다.
그리고 하키라 단장과 나머지 사람들이 협곡으로 돌아온 것은 해 질 무렵이었다. 다행히 작은 부상 외에 인명피해는 없었다.
사르트에게 전해 듣기로, 자잘한 마수들이 많아서 좀 성가셨을 뿐 토벌은 끝났다고 했다.
협곡을 떠날 때보다 훨씬 더 지쳐 보이는 기색의 하키라 단장은, 협곡에 도착하자마자 털썩 주저앉았다가 3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몸을 움직였다. 사망자들의 시신이 모인 곳으로 향한 것이다.
단장의 움직임에 일동 숙연해졌다.
방금 마굴에 다녀오느라 지친 기사들도 시신으로 향했다. 누군가에게 상관이고, 동료이자, 부관이기도 한 사람들이었다. 모두 제국을 위해 희생한 고결한 기사들을 위해 기도했다.
오늘은 이곳에서 밤을 보내고, 내일 아침 일찍 부상자들을 데리고 산을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주변에 가볍게 손이나 얼굴을 씻을만한 개울가도 있었고, 돌이 좀 많아서 등이 무척 불편하긴 했지만 한꺼번에 많은 인원이 머물기에 이만큼 제격인 장소가 없어 보였다.
“이건 뭐지?”
사르트는 플로라가 짓이겨둔 약초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상처 회복과 출혈을 막는 데에 도움을 주는 약초를 캐서 짓이겨둔 겁니다.”
“그런 것도 아는 모양이네. 보면 볼수록 재미있단 말이지.”
그는 돌 위에 짓이겨진 약초를 손에 콕 찍어, 자신의 팔에 난 자잘한 상처에 발랐다.
그러면서 플로라에겐 눈길도 주지 않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경의 엄호는 성공적이었어. 고맙다.”
* * *
모두가 잠든 야심한 시각.
협곡에 검은 그림자가 서성거렸다.
누군가를 찾는 듯 한참 헤매다가, 손을 뻗었다.
그에 눈을 뜬 사람은 잠시 놀란 듯 숨을 삼켰으나, 이내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협곡의 뒤쪽으로 향했다.
보초도 서지 않고, 오고 가는 사람도 없는 은밀한 공간이었다.
“미쳤어요? 여기서.”
“짜릿하잖아.”
“…….”
“얼른 주기나 해.”
그들은 목적이 뚜렷한 사람들이었다.
서로 원하는 바를 거래했다. 마법석과 돈이었다.
마법석을 쥔 자가 먼저 상급 마법석 하나와 일반 마법석 두 개를 건넸다.
“고작 세 개?”
“……이것도 많이 뺀 거예요.”
“하기야. 인간들이 너무 많아. 쯧.”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이제 막 잠에서 깬 사람은 와락 인상을 구겼다.
“보수는 여기 있어.”
이번엔 돈을 든 주머니가 손에서 손으로 옮겨갔다.
머뭇거리던 손은 결국 돈을 받아냈다.
“다음은 없어요.”
“……그걸 네가 정할 수 있던가?”
“난 할 만큼 했어요. 이제 내가 정해요. 그러니 그 사람들에게 전해요. 다음은 없다고.”
“오호. 무서워라.”
비열하게 씩 웃는 미소를 보니, 들은 체도 안 하는 게 분명했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얼굴에 잠재된 폭력성은 뚜렷했다.
* * *
부상자들을 모두 이끌고 험난한 산에서 내려오는 일은 힘들었다.
교대로 업기도 하고, 부축하기도 하면서 기사들은 신속하게 산을 빠져나왔다.
다행히 해가 떨어지기 전에 백작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성에서 기다리고 있던 신관들은 부상자들을 치유했다.
백작은 음식과 술과 잠잘 곳을 베풀어 기사들의 노고에 감사를 표했다.
딱딱하게 구운 밀반죽에는 완전히 질려있던 플로라는 고기에 눈이 멀어 버렸다.
너무 맛있다!
뭘 먹어도 입에 꼭 맞았다. 풀떼기에 과일 소스만 끼얹은 음식을 먹어도 맛있었다.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로 허겁지겁 식사를 마쳤다.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플로라는 침대에 누웠다. 그동안 흙바닥에서 아무렇게나 잤더니 온몸이 다 쑤셨다.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틀자 잠자기 딱 좋은 자세가 됐다.
앞으로 3일 동안 이 백작령에서 쉬며 피로를 풀고, 산에 마수의 잔당이 없나 동태를 파악하기로 했다.
이후에는 다시 성으로 복귀한다.
모든 것이 지나고 나니, 임무를 해냈다는 뿌듯함이 밀려들었다.
플로라는 옅게 미소 지었다.
마음이 평화로웠다.
얼른 돌아가서 시몬을 보고 싶었다. 이렇게나 잘 해내고 왔노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그 행복은 얼마 가지 못해 휘청거렸다.
* * *
“폴. 괜찮은 거야?”
토벌 임무를 마친 다음 날, 플로라는 백작성 방에 꼼짝없이 누워 있을 그에게 병문안을 갔다.
다리는 여전히 못 쓰는 상태였다.
식물의 줄기가 허벅지를 화살처럼 꿰뚫었다고 했다.
신관에게는 제도로 돌아가기 전엔 다 나을 거라 말은 들었지만, 그래도 걱정은 쉬이 가라앉지는 않았다.
플로라의 걱정 어린 질문에 폴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싸우는 모습 봤어. 진짜 참 용감하더라. 활은 어떻게 그렇게 잘 다루는 거야?”
플로라는 질문 공세에 눈을 끔뻑거렸다.
“높은 곳에 서서 단장님과 상관들을 엄호하는데, 완전 멋있어. 나도 그렇게 용기 있고 싶다.”
“지금도 충분히 용기 있어.”
폴의 입가에 어느새 씁쓸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아니야. 사실 나 무서웠어.”
“…….”
“그래서 용기를 못 냈어.”
플로라는 폴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혹시라도 죽을까 봐 너무 무서워서 더 싸울 수 있었는데도 기절한 척했어.”
“……폴.”
“그 사이에 우리 조원들은 다섯 명이나 죽었는데…… 나는.”
플로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폴. 자책하지 마. 우리는 이제 입단한 지 이주밖에 안 된 햇병아리야. 죽음 앞에서 초연할 수 있는 햇병아리는 없어.”
“…….”
“앞으로 더 많은 시행착오가 있을 거야. 그때마다 네가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하면 돼.”
폴이 새빨개진 눈으로 플로라를 보았다.
내내 괜찮은 척했던 것뿐이지, 그녀가 느낀 대로 진짜 괜찮은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몰골을 보니 어젯밤 한숨도 자지 못한 게 분명했다.
“너, 일단 잠을 좀 자야겠어. 그래야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플로라는 상체를 일으켜 앉아 있는 폴을 침대에 눕혔다.
정말 신입은 신입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애는 나중에 직접 사람을 죽이면 또다시 그 일로 고통스러워할 것이 뻔했다.
많은 신입들이 처음으로 사람을 제 손으로 베고 찔렀을 때 죄책감을 느꼈다.
센칸에서 그런 경우는 거의 없긴 했지만, 더러 보일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플로라는 이렇게 말했다.
남의 목숨 끊기 싫으면, 차라리 네 목숨을 끊어 버리라고.
지금 생각해 보면 답도 없고 한숨만 나오는 냉정한 소리였다.
“얼른 눈 감아.”
플로라는 사색에서 벗어나, 여전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폴에게 말했다.
설핏 인상을 찡그리고, 날 선 목소리를 내자 기가 막히게 눈치를 챈 건지 그가 눈을 꾹 감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