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38)화 (38/154)

38.

“경은 활을 잘 다루더군. 시험 때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활 쓰는 걸 좋아하는 편입니다.”

플로라는 픽 웃으며 제 손에 들린 활을 내려 보았다.

“개처럼 생긴 마수의 껍질이 단단하던데, 이마를 관통해버리다니. 솔직히 좀 놀랐어.”

보초를 설 때는 잠들지 않기 위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그게 자신의 칭찬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 조금 민망해진 플로라가, 흠흠, 헛기침을 내뱉었다.

“칭찬을 들은 대가로 제가 마굴에서…… 엄호를 해드리겠습니다.”

그게 뭐냐는 듯 사르트가 픽, 웃음을 흘렸다.

이후 병사에게도 가족 이야기나 백작령의 맛있는 술집을 추천해달라는 등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사르트와 기사단에 관해 대화하는 사이 보초를 서는 시간은 빠르게 지났다.

사르트는 조용한 편이었고, 말수도 대체로 적었지만 뭔가를 물어보면 곧잘 대답해 주었고, 그래서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마스터로 제국의 정예 기사가 되었고 아직 기사단에 몸 담근 지는 2년밖에 되지 않았다고 했다.

아직 제국의 마스터가 검에 마력을 싣고 전투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 없다고 했더니, 조만간 곧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며 그가 옅게 웃었다.

“그런데 넌 왜 마력을 쓰지 못하는 거지?”

사르트도 마력을 가지고 있으니, 타인의 마력 또한 보이는 모양이었다.

대마법사를 만났던 얘기는 어쩐지 하면 안 될 것 같아,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하고 대충 얼버무렸더니 그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저기요, 기사님들.”

남자 병사의 조심스러운 부름에 사르트와 플로라가 동시에 그를 보았다.

병사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혹시 무서운 얘기 좋아하십니까?”

“아니요.”

“싫어합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정색하며 대답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보초를 설 시간이 지났다.

교대를 하기가 무섭게 플로라는 언제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있었냐는 듯, 다시 기절해버렸다. 너무 피곤했다.

“……이거 참, 재미있네.”

이럴 때는 누군가 주변에서 서성거리는 기척도, 속삭이는 말도 제대로 알아들을 여력이 없었다.

* * *

새벽이 찾아오기 무섭게 1조는 짐을 챙겨 일어났다.

바닥에서 그냥 잠들었더니 몸이 쑤시고 피부가 찼다.

플로라는 뻣뻣하게 굳은 손으로 활을 메고, 대열을 맞춰 걸었다.

짐승이 우는 소리가 스산하게 귓가를 훑고 지나갔다.

어제와 같은 피로의 연속이었다.

이제는 다들 정신력으로 버티는 것 같기도 했다. 주변을 꼼꼼히 살피고, 수상한 곳이 보이면 직접 확인도 했다.

하지만 점심이 될 때까지 아무런 수확이 없었다. 마수 대신 독사한테 습격당할 뻔한 것을 겨우 칼로 찔러 죽인 게 전부였다.

허기가 지자, 자리를 잡고 앉아 또다시 구운 밀반죽을 씹었다. 씹는 내내 기사단 식당이 그리웠다.

밀반죽을 먹기 전에는 돌이라도 씹을 수 있을 것 같은 기세였는데 막상 입에 넣고 보니 푸석푸석하고 아무런 맛도 나지 않는 데다 딱딱해서 턱이 아팠다.

집 떠나면 개고생이야. 오늘만 벌써 다섯 번째 되새기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어!”

젊은 남자 병사가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모두 고개를 들었다.

붉은 불꽃 두 개가 나란히 하늘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찾았군. 가지.”

하키라의 말에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법 표식이 떠오른 방향을 잡은 하키라와 조원들은 지체 없이 그 길로 향했다. 조금 쉬면서 배도 채웠으니 버틸 만했다.

마굴에서 어떤 마수가 튀어나와 그들을 괴롭힐지 모르겠지만…… 당장은 불꽃이 피어올랐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고, 기사들에게 견고한 결의를 다지게끔 했다.

거리는 생각보다 멀었다. 어둑해질 때쯤 도착한 곳에는 기사들이 모여 있었다. 전부 다 모인 것 같진 않았다.

하키라와 조원들은 먼저 주변을 훑었다. 플로라가 첫날 마주쳤던 개 같은 모습의 마수가 두 마리 쓰러져 있었다.

“이것들만 마굴 밖으로 빠져나온 건가…….”

마굴 입구는 누가 보아도 ‘나 수상해요.’ 하는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둡고, 그 틈에 섞인 보랏빛의 정체 모를 빛이 기이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플로라가 한 번 가봤던 마굴도 이런 생김새였던 것 같다.

이미 경력이 만연한 상관들도 별말 없는 것 보니 마굴이 맞긴 한 모양이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기사들이 어느 정도 합류하면 진입한다.”

그 뒤로 한 조가 도착했다. 아직 남은 조가 두 개였다.

하키라 단장의 말에 모두들 수긍하며 따랐다.

기사들은 익숙해진 듯 모닥불을 피우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딱딱한 밀반죽을 씹었다.

도착한 사람 중에 폴은 없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조에 속한 모양이었다.

플로라는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불씨를 바라보다, 문득 제 맞은편에 앉은 여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불씨만큼이나 정열적인 붉은 머리를 가진 여자였다.

구불구불하고 윤기가 흐르는 머리칼을 볼 때마다 참 예쁘다고 생각했기에 그 이름 또한 기억하고 있었다.

백기사단의 정예 기사 이브니에 이케나 경.

현재 정예 기사 중 유일한 여자였다. 비록 마스터는 아니지만, 검술 실력이 춤을 추는 듯 유려하다고 정평이 나 있었다.

아직 플로라는 한 번도 그녀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본 적 없었지만, 상상만 해서는 불꽃을 품은 나비처럼 보일 것만 같았다.

이브니에는 차갑고 도도한 면이 있었지만, 아름다운 외모 탓에 기사단 내에서 인기도 많은 편이었다.

폴도 맨 처음 그녀를 처음 본 날 홀딱 반한 듯 귀를 붉혔었다.

하지만 귀동냥으로 들은 바로는 그녀가 단장님을 좋아하고 있다고 했다.

기사단에 많은 기사들이 알고 있을 정도라면, 아마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했다.

단장님은 좀 차갑게 생겼는데…….

뭐, 생긴 것만 보면 두 사람이 잘 어울리는 것도 같았다.

너무 빤히 보고 있던 탓일까.

밀반죽을 씹던 이브니에가 돌연 플로라를 쳐다봤다.

플로라는 허둥지둥하다 겨우 눈인사를 했다. 하지만 이브니에는 그저 고개를 홱 돌려버리기만 했다.

* * *

첫 보초를 서고, 잠에 들었다 깬 것은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 때문이었다.

“……불꽃입니다!”

부스스 눈을 뜨고, 흑기사단의 기사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니 가까운 곳에서 불꽃 하나가 피어오르고 있는 게 보였다.

지금 막 잠에서 깨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하키라는 차분하게 기사들을 향해 명령했다.

“1조, 2조, 3조 기사만 출발한다. 병사와 나머지는 조는 마굴 앞을 지킨다.”

하키라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플로라는 활을 들고 불꽃이 피어오른 방향으로 향했다.

곁을 돌아보니, 다른 기사들도 날쌘 몸짓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다들 어느덧 험준한 산에 적응해버린 것 같았다.

‘빨리 도착해야 할 텐데……!’

불꽃 하나의 의미를 알기에 모두가 조급할 수밖에 없었다.

플로라는 부디 지원을 갈 때까지 아무 일이 없길 바라며 걸음을 쉬지 않았다.

불꽃이 피어오른 곳은 협곡 안이었다.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에 플로라가 미간을 좁혔다.

마수는 식물의 형태인 것 같았는데, 입이 쩍쩍 벌어지고 식물의 줄기를 자유자재로 늘려 기사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플로라가 멀리서 화살을 장전해 날렸다.

화살이 굵은 줄기에 명중했다.

삐이익, 하고 괴상한 비명을 지른 마수가 이내 플로라 쪽을 돌아봤다.

플로라는 다시 화살을 장전했다.

기사들이 마수에게 가까이 붙을 동안 공격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끔 막아주어야 했다.

협곡 특성상 공간이 좁아서 저리 줄기가 쭉쭉 늘어나는 형태의 마수와 싸우는 건 불리했다. 피할 곳이 얼마 없었기 때문이다.

플로라가 화살 두 개를 동시에 쏘자, 잎사귀와 두꺼운 붉은 꽃잎에 명중했다.

놈이 팔 같은 잎사귀를 휘적거리다 이내 기사들을 공격했다.

그녀는 주변을 훑었다.

이제 자칫 잘못했다간 기사들에게 맞을지도 몰랐기에 높은 곳을 찾아가야 했다.

협곡의 위쪽으로 올라가는 경사를 발견한 플로라가 그리로 뛰었다.

이미 검을 쓰는 기사는 마수에게 많이 붙어 있으니 플로라는 높은 곳에서 기사들을 엄호하기로 결정했다.

경사로 올라가 공격에 당할 것 같은 기사가 보일 때면 화살을 쐈다.

마수는 방해가 된다는 듯 또 고개를 돌려 플로라 쪽을 보았다.

화살이 명중할 때마다 듣기 싫은 고음의 비명이 계속해서 울렸지만, 어쩐지 마수가 약이 바짝 오른 것 같아 통쾌했다.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한번 활을 쏘려던 순간이었다. 무언가 플로라의 시선을 끌었다.

높은 곳에 있으니 전투 현장이 한눈에 보였다.

플로라는 그 가운데 기이한 작은 빛을 보았다. 자세히 보니 사르트의 손에 들린 검에서 나는 것이었다.

그게 ‘마력’이라고 깨닫자마자 은은하게 빛나는 노란색의 빛이 허공을 갈랐다. 슈우웅, 하고 검날이 크게 돌았다.

사르트의 일격에 마수가 치명상을 입었다. 보랏빛 피가 끈적하게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마수는 그럼에도 줄기를 계속해서 뿜어내며 주변 기사들을 자유자재로 공격했다.

위험해 보이는 줄기 하나가 길게 늘어나 사르트의 등을 기습 공격을 하려 했다. 플로라는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활을 쐈다.

덕분에 사르트를 향했던 공격이 실패했다.

동시에 마수의 야비한 술수를 눈치챈 하키라는 그 줄기를 잘라내었다.

사르트의 눈이 잠시 플로라에게로 향했다 떨어졌다.

이윽고 그가 다시 한번 검을 휘두르자, 꽃잎이 댕강 날아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