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쾅쾅.
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에 칼같이 일어난 기사들은 자신의 짐을 챙겨 여관 밖으로 나갔다.
벌써 새벽의 어슴푸레한 빛이 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눈꺼풀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새벽공기를 마시니 몸이 금세 개운해졌다.
“출발한다.”
하키라의 묵직한 목소리가 허공을 메웠다. 그녀가 보았던 ‘산만하지만 편한 사람’의 면모는 온데간데없었다.
단장의 명령에 따라 기사들은 각자의 위치를 고수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산을 지나며 중간에 한 번 더 쉬고 나니, 어느새 백작령이었다.
그리고 백작성에 도착했을 때는 늦은 밤이었다.
환대와 함께 기사들은 방을 안내받아 짐만 풀고, 다시 집합했다.
하루 종일 내리 걷고 주변을 경계하느라 쌓였던 피로는 이미 한계에 달해 있었지만, 계급의 순서대로 칼같이 오와 열을 맞춰 선 기사들은 흐트러짐 없이 단장을 기다렸다.
하키라 단장과 부단장들, 그리고 백작과 그 휘하에 있는 기사단장이 짧은 회의를 끝내고 모습을 드러냈다.
동이 틀 무렵부터 전 인원이 조를 나눠 산을 수색하기로 했다.
플로라는 1조에 속했다. 폴과는 다른 조였다.
* * *
“각 조의 마력 보유자들은 마굴을 발견한 즉시 꼭 하늘에 불을 두 번 쏘아 올리도록 하라. 마굴 안에 몇 급의 마수가 있는지 파악되지 않았으니, 절대 먼저 들어가지 말 것. 산에 마수가 돌아다니고 있단 제보가 있었으니 마주치면 무조건 죽여. 만에 하나 열세에 몰리면 하늘에 불을 한 번 쏜다. 불꽃이 한 번 타오르면 가까운 조만 이동해 돕는다.”
“…….”
“산이 험준하니 오를 때 발밑을 조심하도록. 수색은 마굴을 찾을 때까지 계속한다. 해가 저물 때까지 찾지 못하면 이동을 중지하고 쉴만한 공간을 찾아 쉬기로 한다. 이상, 다른 규칙은 각 조 대장이 정하도록 하고 조원은 그를 따른다.”
하키라 단장의 말이 끝나자 각 조들은 정해진 경로대로 흩어져 움직였다.
플로라는 하키라와 함께 움직이는 1조였다.
그녀의 조에는 백기사단 정예 기사 사르트, 그리고 흑기사단과 백작령의 기사들, 병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후방에는 병사들이 경계와 호위를 맡았으므로 플로라는 자연스레 중열로 들어가게 됐다.
선두를 따라 천천히 산을 올랐다.
새벽 산의 공기는 피부에 내내 소름이 돋칠 정도로 차가웠다.
나뭇잎을 밟는 소리와 나무들 사이사이로 바람이 흩어지는 소리, 날짐승들이 우는 소리가 한데 뒤섞여 그 음산함을 더했다.
산은 험해서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잘못 발을 디디면 미끄러지는 곳도 있어 발밑을 잘 봐야 했다. 덕분에 체력은 금방 떨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수색하는 속도도 느려졌다. 뒤처지는 병사도 생겼지만 곧 5급 마수가 발견되었던 지점까지 왔다는 말에 모두들 다시 바짝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움직였을까. 낯선 시선과 불길한 감각이 신경을 한층 더 예민하게 만들었다.
하키라 단장도 눈치를 챈 모양인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병사들의 거친 숨소리와 고오오, 하는 음산한 바람 소리가 공중을 메웠다.
그 틈에서 다시 어떤 알 수 없는 낯선 존재의 움직임을 느꼈을 때였다.
“……으아악! 악!”
후방에 있던 병사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플로라는 재빨리 화살을 장전해 소리가 나는 쪽을 겨눴다.
들개처럼 생긴 검은 마수 두 마리가 병사 두 명을 맹렬하게 물어뜯고 있었다.
같은 후방에 배치된 병사들이 들고 있던 창을 휘둘렀지만 마수의 몸이 단단한 모양인지 여간한 힘으론 상처를 내지 못했다.
상처를 입어도 한 번 문 사냥감은 놓치지 않겠다는 듯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플로라는 이를 악물고 힘껏 화살을 날렸다. 한 마리가 이마를 관통당해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 화살을 장전하던 찰나였다.
“조심해!”
이번엔 앞쪽에서 칼을 휘두르는 소리가 났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앞에도 같은 마수가 언제든 공격할 기세로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앞쪽은 걱정할 것 없었다. 플로라는 병사들을 공격하는 마수의 머리통을 날렸다.
무리 지어 공격하고, 몸집이 작은 것을 보니 5급 마수가 분명했다.
앞 열은 호위할 것도 없이 순식간에 정리가 되었다. 사상자 총 세 명. 모두 살점이 뜯겨 나가 죽었다.
5급 마수가 가장 역겨운 점은 식인을 한다는 거였다.
죽은 마수의 입 사이에 죽은 병사의 살점이 물려 있었다. 시체를 제대로 접할 기회가 없던 일반 병사 몇 명은 헛구역질을 했다.
병사들이 겁에 질린 까닭에 죽은 병사의 시신에서 유품을 찾는 일과 마법석 회수는 플로라가 했다.
마땅한 물건이 없으면 갑옷 속 옷깃을 잘라내었다. 혹시라도 시신을 회수하지 못하는 일이 생길 때를 대비해서였다.
병사에게 마법석과 유품을 보관하라고 넘긴 뒤, 플로라는 다시 길을 열을 맞춰 걸었다.
가뜩이나 가파른 길 때문에 체력이 깎여 있는데, 방금 전투로 더 지쳐 버렸다.
하키라 단장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조금 평평한 지대가 나오자 짧게 휴식 시간을 갖기로 했다.
나무 기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엉덩이는 딱딱하고 몸은 찝찝했지만 이마저도 지금은 달콤하게 느껴졌다.
플로라는 방금 전 만났던 마수를 떠올리며 설핏 이를 악물었다.
“플로라 경. 대단하던걸.”
그때 그녀의 곁에 누군가 다가와 앉았다. 단장 하키라였다.
플로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려 하자, 하키라는 질색하며 손사래를 쳤다.
“앉아. 앉아. 쉬는 시간이잖아.”
그는 언제 위엄을 뿜어냈냐는 듯 생글 웃고 있는 낯이었다.
성에서 봤을 때와는 달리, 단복도 구겨지고 뺨과 턱에 마수의 보라색 피가 튀어 있었지만 여전히 화려해 보이긴 했다.
플로라는 잠시 그의 옷에 매달린 보석 브로치로 시선을 돌렸다가 입맛을 다셨다.
이런 토벌 임무에도 보석을 달고 나오는 남자는 아마 이 사람밖에 없을 거다.
“역시 엄청 아깝다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우리 기사단 올래?”
“거절하겠습니다.”
“마수 보고 쫄지도 않잖아. 크.”
하키라가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플로라를 경이롭다는 듯 치켜세웠다.
“제가 후방에 설 걸 그랬습니다.”
플로라는 피 묻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까 죽은 병사들의 시체를 만지느라 묻은 잔해였다.
하키라도 말없이 그 손을 내려 보더니, 물병과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손을 벅벅 닦아 주었다.
그러더니 한참 동안 플로라의 곁에서 쓸데없는 소리를 재잘거렸다.
제도에 어디 잡화점이 브로치가 예쁘다는 둥, 어느 나라에서 신비한 광물이 나온다는 둥, 정말이지, 혼이 쏙 빠질 정도의 잡담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부하에게 끌려가기 직전까지 떠들었다.
플로라가 질린 표정을 짓자, 흑기사단의 기사가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했다.
한결 조용해진 틈을 타 플로라는 눈을 감았다.
그래도 쓸모없는 얘기가 도움은 되었다. 정신을 쏙 빼놓은 덕에 쓸데없는 땅굴은 파지 않았으니 말이다.
죽은 병사들에 대한 죄책감보다는 사상자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나온 것에 대한 아쉬움 정도였다.
얼마 후 플로라는 하키라 단장의 집합 명령에 다시 열을 맞춰 섰다.
플로라는 활을 들고 있기도 하니, 후방에 서 있어도 좋다는 명에 그녀는 자연스레 병사들의 뒤로 향했다.
* * *
수색은 느렸지만 기사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하늘이 잠잠한 것을 보니, 다른 사람들 역시 마굴의 행방을 찾지 못한 것 같았다.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었다. 모두 이동을 중지하고, 쉴만한 평지를 찾아 불을 피우고 준비해 온 전투식량인 얇은 밀반죽을 먹었다.
딱딱하고 퍽퍽했지만 허기가 졌던 터라, 의무로 씹어 삼켰다. 그래도 씹다 보면 맛있겠지. 뭔 맛이 나겠지. 하고 삼키다 보니 배가 불렀다.
1조는 총 열 명의 인원이었고, 세 명씩 번갈아 가면서 보초를 서기로 했다.
남은 한 명인 하키라는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스스로 자진해서 첫 번째 보초를 서겠다고 했다. 그래서 첫 보초는 네 명이 되었다.
플로라는 사르트, 그리고 병사 한 명과 함께 두 번째 순서를 맡았다.
피곤할 테니 얼른 자라는 말을 남긴 단장은 앞서 걸어 나갔다.
플로라는 눈을 깜빡거리며 그를 지켜보다 딱딱한 땅에 대충 널브러진 채로 곯아떨어졌다. 너무 피곤해서 다른 생각 따위 할 겨를이 없었다.
아, 집 나가면 개고생이야, 라는 생각 정도는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가볍게 팔을 흔드는 손길에 눈을 떴다. 보초를 서야 할 때임을 깨달았다. 그녀는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초를 서는 곳까지 나가 기지개를 쭉 켜자, 뼈에서 으득, 으득 거리는 소리가 났다.
곁에 서 있던 사르트와 병사가 야만적이란 눈으로 그녀를 힐끗 보았지만 플로라는 그 시선들을 가볍게 무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