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억겁 같던 시간이 지나고, 그의 그림자가 나무의 그림자 속에 감춰진 순간, 플로라는 짧게 숨을 삼켰다.
“……플로라.”
그녀는 얇고 붉은 입술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온전히 지켜보았다.
가장 싫었던 이름이, 가장 성스럽게 들렸다.
“플로라.”
플로라가 대답 없이 그를 올려다보고만 있자, 허리를 굽힌 시몬이 바짝 얼굴을 가져다 대며 다시 그녀를 불렀다.
“또 귀신 취급을 하는 건가.”
그제야 정신을 차린 플로라가 눈을 깜빡였다.
익숙한 체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이보다 완벽한 미약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플로라가 천천히 움직였다.
“백기사단의 플로라, 하네칸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기사는 온 마음 다해 주군을 향한 충성을 맹세했다.
잠시 침묵하던 시몬이 그녀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살살 매만지는 따뜻하고 나른한 느낌이 들었다.
플로라가 허락한 주인의 익숙한 손길이었다.
“이제 그만 고개를 들어. 플로라. 나의 기사.”
그 부드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나의 기사.
머릿속에 각인된 것처럼 그의 말이 사라지지 않았다.
될 수만 있다면 영원히 이 시간, 이 순간이 지속되길 바랐다.
아아, 나의 기사라니.
지금 죽는다고 해도 여한이 없을 만큼 벅차오르는 말이었다.
그녀는 다짐했다.
이 남자의 기사로서 고귀하게 살다 죽기로.
“오랜만이야.”
“……폐하.”
“이제 인사는 끝났으니, 이름을 불러주겠어?”
“하지만 저는 이제 폐하의 기사로…….”
“그게 우리 둘 사이의 규칙이었잖아.”
시몬은 단호한 얼굴로 다시 재촉했다.
“어서.”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리움이란 건 영 찝찝한 감정이었다. 이리 조금도 시선을 뗄 수 없는 것을 보면.
“플로라.”
“……시몬.”
결국 플로라의 입술이 열렸다. 언제나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시몬은 만족스럽다는 얼굴을 했다.
한낱 장난이든 호의든, 동정이든 뭐든. 그가 만족한다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편하게 앉아. 그리고 앞으로는 둘이 있을 때 내게 그리 인사하지 마.”
플로라는 입술을 꾹 물었다가 이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찾아오셨어요?”
“미행을 붙였는데.”
“……네?”
플로라는 미간을 좁히며 주변을 살폈다. 시몬이 어이없다는 듯 픽 웃었다.
“그렇게 봐서 보이면 그게 미행인가.”
“수상한 기척은 못 느꼈는데요.”
“걸리면 내 근위대가 아니지.”
시몬이 어깨를 으쓱였다.
뿌듯해하는 그의 모습에 플로라도 옅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웃으니 보기 좋아.”
“…….”
“날 반기지 않는 것 같아 내심 서운했는데.”
“제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모르는 일이지. 한 번도 물어본 적 없고, 네가 말해준 적도 없으니.”
그랬던가. 플로라는 시몬을 힐끗 보았다.
방금 보았던 진풍경을 마음 가는 대로 낱낱이 다 이야기할 순 없지만, 조금은 드러내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플로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에요. 석양이 질 때.”
“…….”
“좋아하는 시간에 시몬을 봐서 더 좋아요.”
낯선 감정, 낯선 공기의 흐름. 그건 비단 플로라만 느끼는 게 아니었다.
그녀의 감정까지 알 리 없는 시몬은 끙, 하고 침음을 흘리며 살짝 눈을 감았다가 떴다.
플로라가 토벌대 임무에 차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녀는 뛰어난 기사이고, 앞으로 더 훌륭해질 텐데 무슨 걱정이 든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것이 그의 계획에 무척 어긋나는 뜻밖의 상황임은 분명했다.
시몬은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미묘하게 타오르는 작열감을 느꼈다.
“앞으로도 네가 그리 표현해주면 더 좋겠군.”
그는 애써 무심한 척 말하며 그녀에게 보이지 않는 손을 꾹 말아 쥐었다.
계속해서 불쑥 느껴지는 희한한 감정에 도취되어 버릴까 얼른 화제를 바꿨다.
“임무에 나간다는 소식을 들었어.”
“아, 들으셨어요?”
플로라는 그제야 시몬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래. 네가 가겠다고 지원한 건가?”
“네.”
“입단한 지 아직 일주일밖에 안 된 것 같은데 왜 벌써 그런 위험한 일에.”
“제게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서요.”
시몬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할 수가 없었다.
그에겐 그럴 권리도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제국의 기사가 마수와 용맹하게 싸우는 것은 황제로서 치하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잘 다녀올게요. 시몬.”
근데 왜 그러기가 싫지?
시몬은 플로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플로라가 웃고 있었다.
그 미소에 가슴이 자꾸 간질거렸다.
“잘 다녀와. 다치지 말고.”
툭툭. 머리를 가볍게 두드려주는 손길에 플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몬.”
“그래. 플로라.”
플로라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를 보았다.
“……저, 다녀오면 꼭 할 말이 있어요.”
고백하는 그녀의 눈빛은 전에 없던 결의에 차 있었다.
시몬은 그 눈빛 속에 숨은 기색을 헤아렸다.
그건 무한한 신뢰였다.
“……그래. 기다릴게.”
그래서 그도 화답해 주었다. 같은 신뢰로. 시몬은 활짝 웃었다.
* * *
예정된 날짜에 토벌대는 백작령으로 출발했다.
흑기사단과 백기사단을 합친 토벌대의 총인원은 마흔 명이었다.
그리고 흑기사단의 단장인 하키라가 지휘관으로 나섰다.
백작령은 말을 타고 꼬박 하루 내지는 이틀을 가야 도착하는 곳이었다.
플로라는 이 토벌대에서 가장 뒤쪽, 기사들의 짐을 실은 마차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나도 단장님이랑 내기하고 싶다.”
묵묵하게 주변을 살피며 길을 걷던 중, 뒤에서 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리냐는 듯 뒤를 돌아보자 폴이 대답했다.
“나도 선물 받고 싶어.”
“…….”
“활은 못 쏘는데 멋있긴 하다. 이거. 그냥 소장 욕구가 생겨.”
플로라는 다른 기사들과 달리, 검뿐만 아니라 등에 활까지 맨 상태였다.
폴이 부러워하는 이 활은 토벌대가 출발하기 하루 전날, 카신 단장이 그녀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단장님.”
단장실로 불려간 플로라는 그에게 활을 받았다.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검은 빛깔의 활은 손에 착 감겼다.
보급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좋은 활이었다.
플로라가 눈이 동그래져서 묻자, 카신은 내기에서 비긴 선물이라고 대답했다.
“선물은 월급날 교환하기로 한 것 아니었습니까?”
“그랬지. 근데 네가 그때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니 미리 주는 거야.”
“그렇다고 이렇게 비싼 걸 주시면 저는…….”
“네게 어울릴 것 같아 샀다. 가격은 걱정하지 마. 비싼 건 아니야.”
아마 시몬도 검을 선물로 주면서 비슷한 말을 했었지.
그 주군에 그 기사인가.
플로라는 아스라이 떠오르는 시몬의 생각에 휙휙 고개를 저었다.
그런 모양새를 바라보며 카신이 눈썹을 구겼으나, 그가 문제가 있느냐고 묻기 전에 플로라에게서 대답이 들려왔다.
“저, 활잡이입니다. 단장님. 이 활이 어떤 재료로 만들어진 건지, 값이 얼마나 나가는지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거짓말을 들킨 카신이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거 샀다고 나 굶어 죽는 거 아니니 걱정 마라. 임무 나가서 네 동료들 잘 지키라고 주는 것이니 사양 말고 받도록.”
“이만한 선물을 돌려드리려면 저는 굶어 죽겠는데요.”
“누가 같은 값어치로 받겠대? 선물은 마음이지. 얼른 가지고 나가. 일해야 하니.”
플로라는 얼결에 떠안은 활을 소중히 품었다.
이제 카신은 대꾸하기도 귀찮은 듯 굴었지만, 인사는 해야 했다.
“감사합니다. 단장님. 임무에서 돌아오면 저도 꼭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그에 카신이 웃었다.
“무사히 돌아와라. 그거면 돼.”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난 플로라는 어느새 옅은 미소를 품고 있었다.
센칸에서 가져온 활을 써야 하나, 고민하던 참에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참 따라 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밤에는 길이 어둡기도 하고, 하루 종일 걸어 피로하기도 한 탓에 쉬어가기로 결정했다.
기사들은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날이 밝는 대로 바로 떠날 예정이었기에 짐을 따로 풀진 않았다.
플로라는 굶주린 배를 채우자마자 마구간에서 하루 종일 움직였던 말에게 물도 먹이고, 건초도 먹이는 일을 했다. 다른 하급 기사들도 함께였다.
이번 토벌 임무에 따라온 흑기사단의 하급 기사들 중에도 플로라, 폴과 같은 시험을 치렀던 동기들이 있었다.
플로라는 그들과 안부 인사를 나누고 배정받은 방에서 잠을 잤다.
숙소의 환경은 열악해서 여기사들은 계급과 관계없이 한방에 묶여 잤다.
그 중 흑기사단의 상급 기사 한 명과 백기사단의 정예 기사 한 명이 같은 침대를 썼고, 나머지 하급 기사들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서 쪽잠을 청했다.
맨바닥에 누워서 자는 것은 불편했지만, 너무 피곤해서 그런 것을 느낄 여력도 없이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