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그건 애초에 시몬이 약해서가 아니라, 오랜 전쟁으로 인해 약해진 황권 때문이었다.
시몬의 아버지인 선대 황제는 대륙 통합을 목표로 삼아 주변 국가들을 끊임없이 삼켜대는 전쟁광이었다.
전쟁에는 많은 피해가 뒤따랐다.
자금과 물자는 항상 부족했다. 그래서 황제는 돈이 많은 탐욕스러운 귀족들을 가까이 두었다.
전쟁의 막대한 자금을 대주는 대신, 그들은 높은 자리들을 하나둘 꿰차기 시작했다.
귀족의 세력이 확장될수록 점차 황권은 약해졌고,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귀족들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아비는 그들의 횡포 또한 눈감아주었다.
권력에 눈이 먼 자들은 끊임없이 황태자였던 시몬을 생지옥으로 몰았다. 전쟁을 나가 마굴에 갈 기사들이 없다는 이유로 시몬을 지휘관으로 내몰기도 했고, 자잘한 암살과 독살 시도를 했다.
암살은 주로 전쟁으로 멸망한 왕국의 기사들에게 맡겼다.
하네칸 황실에 악감정을 가진 이들만 골라 보내니, 암살에 실패하면 그들은 배후를 말하는 대신 저주를 퍼붓고 죽음을 택했다. 그런 자잘한 이유들로 배후를 밝혀내는 것도 번번이 실패하곤 했다.
황제 즉위식에서 의식을 치러야만 신 아르카제가 봉인한 사역마가 계승되었기 때문에 그 전에 확실하게 없애버리려는 귀족들의 수작질은 질리도록 이어졌다.
때로는 운이 좋았지만 시몬은 끝내 살아남았다. 귀족들의 눈을 피해 검술 훈련을 죽도록 한 결과였다.
제국의 사정은 돌보지 않고, 전쟁에만 미쳐있던 아비지만 제국 유일의 후계자인 시몬을 걱정하기는 했기에 몰래 자신의 힘을 기르는 것을 허락했다.
시몬은 대외적으로 몸이 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적을 알지 못하니, 귀족들의 암살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황태자 휘하의 호위 기사들의 능력이 출중한 탓이라고 오해를 했다. 마수 토벌의 지휘관으로 나서면서도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많았다.
계속 죽음의 전장에서 살아 돌아오자, 결국 귀족들은 시몬이 발톱을 숨긴 호랑이라는 걸 눈치챘지만 오히려 좀 더 조심스럽고 야비해졌을 뿐 위협이 사라지진 않았다.
그렇게 밤의 그림자처럼 살아남길 오랜 시간이었다.
그는 결국 황제가 되었다.
사역마가 생기면서 미비하게 가지고 있던 마력이 강해졌으니 암살 시도는 눈에 띄게 줄었다.
하지만 이미 성을 꽉 잡고 있는 세력을 시몬 혼자서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황제가 되었어도 바뀌는 건 없었다.
몇 번 귀족들의 비리를 잡아내어 자신의 세력 또한 조금씩 키워갔지만 여전히 그 숫자는 미비하기만 했다.
그가 곁에 가까이 두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귀족의 사람이었다.
그를 경계한 에르네는 공식적인 움직임에서는 꼼꼼하게 호위 기사들을 배치했다.
제 한 몸 지킬 힘이 있으니, 요란하게 굴지 말라고 해도 에르네는 단호했다.
그런 걸 보면 사냥터로 잠행을 나간 날, 플로라를 죽이지 않은 게 용했다.
그때도 지금도 계속 죽일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폐하.>
“…….”
<이틀 전 마렌 백작령 산지에서 마수가 발견되었다는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민간인 세 명과 백작령 기사 두 명이 사망했고 세 명이 큰 부상을 당했다고 합니다. 백작령의 지원요청에 따라 황실 기사단에서 토벌대를 꾸릴 예정이고, 삼 일 후 출발 예정이라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지휘관은 하키라 단장입니다.>
“하키라가 직접 가는가? 규모가 좀 큰 모양인데.”
시몬이 에르네를 보며 물었다. 에르네가 보고를 계속했다.
<산지가 험준하고 수색해야 할 면적이 넓은 데다 마굴에서 마수가 빠져나오기까지 한 상태라, 평소보다 많은 인원을 기사단에서 차출한다고 합니다.>
“한동안은 잠잠한 것 같더니 또 시작이군.”
시몬의 못마땅한 목소리를 듣던 에르네가 답지 않게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눈치 빠른 시몬이 입을 열었다.
“더 할 말 있으면 해.”
<토벌대 인원에 백기사단 소속 플로라 경이 있습니다.>
시몬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 * *
카신의 말대로 플로라를 괴롭히던 상관들은 그녀가 사지로 걸어 나가는 것을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누군가는 그녀가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도망치는 것으로 알아 으스대기도 했다.
한동안은 눈엣가시 같은 신입이 보이지 않으니 편할 것이고, 제아무리 능력이 좋아봤자 무슨 공이라도 세우겠냐는 안일한 태도가 대부분이었다.
몸조심하라고 말하는 목소리에 동료애 같은 건 없었지만,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아 다행이었다.
하지만 따뜻한 동료나 자신을 잘 챙겨주는 상관들도 많았다.
이번 토벌대로 떠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멜리아는 계속 그녀를 걱정했다. 시험을 함께 봤던 몇몇 동기들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대단해. 대단한 건 맞는데…… 폴, 플로라. 둘 다 괜찮은 거지? 언젠간 우리도 해야 할 일이긴 하지만…… 제안을 받았을 때 솔직히 겁부터 났어. 말만 상급 기사들을 지원하는 역할이지, 마수가 마굴에서 나왔는데…… 잘못 걸리면 같이 전투에 참여해야 하는 거잖아.”
그들과는 고된 훈련과 상관의 텃세를 견디며 꽤 친밀해졌고, 동기다 보니 나이에 상관없이 말을 놓았다.
플로라는 본인이 떠나는 것처럼 겁에 질린 멜리아를 다독였다.
“괜찮아. 폴도 있으니까.”
신입 기사 중에서는 플로라 외에 한 명이 더 토벌대에 참여하기로 했다.
그는 지난 시험에서 플로라에게 말을 걸었던 ‘폴 카르틴’이라는 남자였다.
폴은 두 번째 시험을 겪고 난 후 어떤 일이든 제국에 도움이 되는 일은 나서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그는 전갈 모습을 한 마수에게 물려 다리가 잘리는 고통을 느꼈었는데, 그런 악몽을 견뎌낸 것은 물론 기사로서의 긍지를 가진 것이 대단하게 여겨졌다.
플로라는 마수의 습격을 당하게 된다면 폴은 꼭 지키겠다고 마음먹었다.
동기들과 오찬을 마치고 나오니 하늘이 붉었다.
온통 주홍빛의 석양으로 물든 하늘을 볼 때면 플로라는 자연스레 누군가를 떠올렸다.
“플로라. 또 어딜 가는 거야?”
“난 산책 좀 하다 갈게. 너희끼리 들어가.”
“피곤하지도 않나 봐, 정말. 대단해.”
플로라는 중얼거리는 동료들을 뒤로한 채 정원으로 걸었다.
지금은 그녀가 하루 중에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기사단에 들어온 이후 시몬을 만나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한구석에 자리 잡은 공허는 좀체 숨겨지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눈에 담고 있을 걸, 싶은 후회도 밀려왔다.
하필이면 마지막으로 그를 보며 느꼈던 감정이 쓸쓸함이라 더 찝찝했다.
시몬은 잘 지내고 있을까.
남 걱정이 제일 쓸데없는 거지만, 시몬은 남이 아니라 주군이니까…….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으면서도, 시몬을 떠올릴 때면 왜 이리 가슴이 먹먹해지는 건지 모르겠다.
그는 잘생겼으니까……? 잘생긴 얼굴을 못 봐서?
이제 그런 속물적인 생각으로 마음을 가로막기엔 이유가 턱없이 부족했다.
정말 웃긴 감정이었다. 따뜻하게 손 한 번 내밀어주었다고 감히 누굴 마음에 담은 것인지. 지나가던 개미조차 비웃을 일 아닌가.
영원히 알고 싶지 않았던, 그래서 부정하려고 노력했던 감정을 깨달아 버렸으니 이를 어쩌면 좋을까.
플로라는 걸음을 멈추고, 커다란 나무 아래에 앉아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었다.
하네칸 성의 정원은 꽤 넓은 편이라 사람과 마주칠 일이 거의 없다는 게 참 좋았다. 사색을 하기에는 이곳이 제격이었다.
선선한 바람결이 은실 같은 머리칼을 훑고 지나갔다.
남의 속도 모르고 날씨는 왜 이리 좋고, 풍경은 왜 이리 예쁜 것인지 모든 것이 삐뚤게만 보였다.
시몬을 다시 만날 날이 올까?
눈에 보이지 않는 태양이라도, 섬겨야만 하는데 이런 불순한 생각이 자꾸만 드니 스스로가 불결하게 느껴졌다.
잠깐의 침묵과 사색 끝에 플로라는 한숨을 후, 내쉬었다.
후회와 걱정은 이 한숨으로 털어냈다.
며칠 내리 속앓이를 하다 보니, 이 감정을 다루는 법을 어느 정도 터득한 것 같았다. 이것으로 또 내일을 버틸 원동력을 얻는다.
플로라가 땅 끝에서 다시 하늘로 시선을 돌리던 찰나였다.
멀리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검은 형체가 보였다.
로브로 몸을 꽁꽁 감싸고 있는 남자의 인영이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그가 한 발씩 걸음을 떼어 가까이 올 때마다 심장이 쿵, 쿵, 쿵, 함께 발맞춰 뛰는 것 같았다.
타오르는 석양을 등지고 걸어오는 남자의 모습은 그녀의 가슴까지 불태우기에 충분했다.
플로라는 시간이 멈춘 듯 그를 보았다.
일어나 무릎을 꿇을 생각도, 알은체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심장의 고동 소리에 온 신경이 매달려 있었다. 머리까지 울리는 것 같았다.
이번에도 정말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신의 장난인지, 신의 선물인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