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잠깐 나와 산책하겠나?”
플로라는 카신을 따라나섰다.
기사단 구역을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그에게선 아무 말이 없었다.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얼굴이어서 플로라는 그저 조용히 그 곁을 따랐다.
“점심은 먹었나? 플로라 경.”
“……예. 단장님.”
오랜 침묵 끝에 카신이 입을 열었다. 물론 만족스럽게 끝마치지는 못했지만, 먹긴 먹었으니 플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침묵하는 카신의 얼굴에 피로가 가득해 보였다. 고민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다.
“단장님,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주무셨습니까?”
“좀. 일이 많아서. 근래 들어 심각한 일만 생기는 것 같군.”
“마굴 때문입니까?”
“그래.”
카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플로라를 보았다.
“경이 기사단에 들어온 지도 벌써 일주일이 넘었어. 적응은 좀 됐나?”
“아직 부족한 것은 많지만 차츰 나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플로라의 솔직한 말에 카신이 픽 웃었다.
“힘든 일은 없고?”
힘든 일이야 많았다. 상관들의 괴롭힘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별별 이유는 많았다. 그녀가 평민이라서, 여자라서, 그리고 상관이니까 위계질서를 바로잡는단 명목으로.
플로라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 생각하며 군말 없이 버텨냈다.
상명하복의 원칙을 이해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상관들이 그런 태도조차 배 아파한다는 게 문제였다.
한 번 길길이 날뛰기라도 하면 그 명목으로 쥐어팰 생각이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래. 확실히 상관들은 플로라를 일부러 더 괴롭히고 있었다.
그녀가 시험에서 월등한 실력을 뽐냈지만 그건 제 상관들에게는 소문일 뿐이었다.
직접 대련 상대로 참관한 몇 명의 중급 기사가 아니고선, 시험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로 전해 듣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실력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배 아파하고, 콧방귀를 뀌었지만 그렇다고 정식 대련 신청을 하지는 않았다.
괜히 본때를 보여준다고 섣불리 나섰다 대련에서 패배하면 자신들에게 수치스러운 소문만 생길 것이 염려되는 모양이었다.
가끔 괘씸할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플로라는 여기가 좋았다. 사람들과 다시 무리 지어 살고, 어떤 공동체 안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은 묘한 안정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혼자 살던 삶과는 비교할 수 없이 지금이, 행복했다.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플로라는 자신을 괴롭히는 이들을 떠올리다, 짧게 대답했다.
카신은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는 신입 기사의 하루 일과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정예 기사나 상급 기사들에게 몇 무리가 플로라를 괴롭힌다는 사실 또한 전해 들어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전혀 내색조차 하지 않고 있다. 숨기는 게 아니라 정말 힘들어 보이지도 않았다.
조직의 위계질서는 아주 중요한 문제 중 하나이므로 카신은 개입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특별하게 생각하거나 동정심을 느낀다고 해서 도움을 줄 수는 없었다.
단장인 그의 특별은 부하들의 눈에 차별로 비춰질 수 있었다. 그러니 공적인 일에 사적인 감정은 배제해야 했다. 그게 결과적으로 괴롭힘당하는 하급 기사에게 더 도움이 되기도 했다.
물론 도를 넘는 행위가 있다면 그때는 직접 제재하고 징계를 내리긴 하지만, 잔머리로는 일가견이 있는 상급 기사들이 도를 넘는 행동을 할 리 없었다.
전해 듣기로 플로라는 같이 들어온 다른 신입들보다 더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유야 보나 마나 뻔했다. 평민이니까. 여자니까. 그리고 모로 보나 자신보다 실력이 우월한데 계급은 낮으니 상급자의 직급을 과시하고 싶은 거였다. 특별할 것도 없는 치졸한 이유들이었다.
이런 일은 매해 있어 왔고, 이번이라고 다를 게 없었다. 이번엔 그 괴롭힘이 대부분 플로라에게만 집중되어 있다는 것만 빼고는.
카신은 엄격하지만 좋은 상관인 편이었다. 그는 바쁜 와중에도 자신의 부하들에게 자주 신경을 썼다.
신입이 들어오고 일주일 내지는 한 달 정도가 되면 부단장들과 돌아가며 신입들이 조직 생활에 힘든 점은 없는지, 개선되어야 할 점들이 있는지,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등을 면담했다.
사회생활 경험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몇몇 귀족 가문의 신입들은 카신의 배려에 힘든 점을 줄줄이 읊기도 했다.
훈련이 너무 고되다, 상급자의 괴롭힘을 견딜 수가 없다, 등등.
가만 보면 플로라는 이상하게 신입 같지 않았다. 연차가 한 5년 정도 쌓인 완연한 기사 같았다.
그게 자신의 주제를 잘 알아서 멍청하게 이 악물며 버티기만 하는 부류도 아니었다.
조직의 체계를 이해하기에 그저 순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플로라는 확실히 고요한 파도 같았다. 하지만 카신은 그 파도가 일렁거리는 것을 보고 싶었다.
“다행이네.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해.”
“예.”
“그리고 제안을 하나 해볼까 하는데.”
카신의 말에 플로라는 힐끗 눈을 들어 자신의 대장을 보았다.
“네가 이번 마수 토벌대 임무에 합류해보는 게 어떻겠어?”
“…….”
“아, 네게만 특별한 기회를 주는 건 아니야. 게시판을 봤으면 알겠지만 중급 기사들에게는 이미 신청을 받고 있어. 신입 기사들에게는 면담하며 제안하고 있고.”
잠시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던 플로라는 특별한 취급이 아니라는 말에 안도했다.
그런 그녀를 관찰하고 있던 카신이 픽 웃었다.
비록 마력은 못 쓰지만 플로라의 실력은 당장 정예 기사에 넣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뛰어났다.
칼을 휘두르는 것에 망설임이 없는 걸 봐서는 분명 사람 또한 베어봤을 솜씨였다.
신입에서 썩히긴 무척 아까웠다.
“중급 기사는 한 명밖에 지원이 들어오지 않았어. 신입 기사들은 아직 다 면담을 하지 않았지만 하겠다는 사람은 없겠지. 선발되면 전투보다는 후방에서 상급 기사를 지원하는 업무가 배정될 거야.”
“제안이시라면 거절해도 되는 겁니까?”
“물론이지. 강요는 안 해. 넌 신입이니까. 하지만 기회를 놓칠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플로라는 다시 카신을 올려다보았다.
“저는 아직 입단한 지 얼마 안 된 새내기입니다. 벌써 임무에 들어가면 기사단 내에서 반발이 심할…….”
“그런 것까지도 신경을 쓰나? 대단한걸.”
“…….”
“근데 반응은 둘 중 하나일걸. 좋아하거나, 걱정하거나. 전자인 쪽은 널 비웃을 거다. 제 발로 사지에 걸어 나간다고.”
생각해 보니 카신의 말이 맞는 것 같아, 플로라도 옅게 웃었다.
곧 카신이 말을 덧붙였다.
“넌 제국에 충성하고, 약자를 수호하며 정의를 버리지 않는 기사가 되겠다고 했고.”
“…….”
“난 널 이끌어주겠다고 했으니. 네가 가지 않겠다면 강요를 좀 해보고 싶은데. 어떤가?”
그녀의 고요한 눈동자가 결국 작게 일렁거렸다.
* * *
시몬은 하루에 한 번 수석 비서관 카디오크에게 오늘 회의에 대한 요약을 간략히 받고, 그에 대한 안건 서류들을 전달받는 시간을 갖는다.
그건 황제 시몬의 공식 일정이었다.
“폐하, 집무실엔 언제 나오실 예정이십니까.”
“매일 가.”
“늦은 밤에 말씀이십니까?”
“밤에 일이 얼마나 잘 되는지 몰라. 세상이 그렇게 고요할 수가 없어. 찾아와서 방해하는 사람도 없고.”
“…….”
“넌 낮에 혼자 넓은 집무실을 다 쓰면 황제가 된 것 같고 좋지 않나?”
카디오크는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끝내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정 외로우면 그대도 밤에 출근하든가.”
시몬이 픽 웃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도 설득에 실패한 카디오크는 그렇게 황제를 떠나보내고, 혼자 집무실에 남았다.
시몬이 집무실을 빠져나오자 주변에 서 있던 근위대가 그의 곁으로 붙었다.
밤에는 보통 에르네가 곁에 붙고 나머지는 그림자처럼 숨어 다니지만, 낮에는 성에서도 대놓고 그를 호위하는 기사가 많았다.
몰래 다녀야 하는 경우를 차치하고, 귀족들이 빠르게 소식을 접할만한 공식적인 움직임은 전부 그랬다.
시몬이 자라온 환경은 그랬다. 공식적인 일정은 결코 편할 수가 없었다.
자잘한 암살 시도와 독살 시도가 꾸준히 있어 왔기 때문이다.
그가 칩거하다시피 밤에 일을 하는 이유도 그런 것들에 기인한 결과였다.
또한 어떻게든 자신의 이익만 배불리 챙기려는 귀족들과의 만남이 피곤하기도 했다.
그들을 마주치지 않으려면 밤에 일하는 것이 제격이었다.
귀족들 역시 그편을 더 좋아했다. 제 입맛대로 안건을 올리거나 숫자에 장난질을 할 수 있을 테니.
귀족들은 애초에 시몬이 일을 제대로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듯했다.
그들의 바람대로 낮엔 열심히 자거나 노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기도 했으니,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멍청한 놈들은 금방 속아 넘어갔다.
시몬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중요한 안건이 있을 때만 회의에 참여했고 자잘한 것들은 서류로 전달받아 승인하거나 거절 의사를 내비쳤다.
매번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며 탁상공론을 해야 하는 일은 그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저 하나를 취하거든 적당히 뭔가를 내어주며 기회를 엿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