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훈련장을 모두 돌아보고 나왔을 때는 어느덧 날이 어둑해져 있었다.
“오늘 돌아다니느라 고생했다. 둘 다 이만 숙소로 돌아가서 쉬도록. 마음 같아선 더 놀고 싶지만, 내 부하의 눈 밑 그림자를 지켜줘야 해서 말이야.”
카신의 말에 멜리아가 쿡쿡 웃었다.
플로라와 멜리아는 카신에게 정중하게 인사하고 숙소로 향했다.
멜리아는 아카데미를 갓 졸업한 학생답게 여전히 소녀처럼 보이는 면이 있었다.
카신의 사소한 말에도 교수님의 수업을 듣는 것처럼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서, 그 모습이 꽤나 귀엽다고 느꼈다.
“앞으로 잘 지내봐요. 플로라 님! 그럼 푹 쉬세요.”
여기사의 숙소는 3층에 모여 있는 모양이었다.
같은 층에 올라오자 멜리아가 플로라에게 먼저 인사했다.
“저도 잘 부탁해요. 멜리아 님.”
플로라도 그녀에게 인사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기사단의 첫날은 그렇게 흘러갔다.
* * *
신입 기사의 일과를 묻는다면 훈련, 훈련, 심부름 그리고 또 훈련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어느 나라에서나 수습의 일과는 공통인지, 센칸에서도 갓 신입 기사가 되었을 때 그저 지옥 같은 훈련만 견뎌 냈던 것 같다.
솔직히 그때보다는 훨씬 편안한 일정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훈련했던 센칸과는 달리, 하네칸의 훈련 일정은 비교적 인간적인 면모가 있었다.
오전 훈련 이후 식사, 그리고 두 시간의 휴식, 오찬 전까지 훈련. 그 이후는 퇴근이었다.
휴식 시간은 말이 휴식이지 상급 기사들의 잡무를 떠맡아야 하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훈련과 잡무뿐인 일상이라 지치고 무료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일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백기사단에 적응도 많이 하고 정보도 알아냈다.
일단 황실 기사단의 계급은 총 6개로 단장, 부단장, 정예 기사, 상급 기사, 중급 기사, 그리고 신입 기사로 나뉘었다.
플로라가 몸 담그고 있는 신입 기사는 아까도 말했듯 훈련 또는 잡무를 도맡아 했다. 제국의 범죄나 경비 같은 임무를 받는 것은 중급 기사부터였다.
중급 기사 승급시험은 석 달에 한 번 있었는데, 사전에 미리 공지한 검술 교본을 얼마만큼 정확하게 구현할 수 있는지 보고 그 자격을 부여한다고 했다.
중급 기사 이상은 시험이 아니라, 여러 기본적 소양을 토대로 승급이 결정되었다.
가령 기사단 내에서의 규칙과 예의, 그리고 제국의 법령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정치와 전투를 보는 눈과 같은 능력이 필요했다.
전투 능력이 좋은 기사는 분명 기사단에 큰 명예를 가져다주겠지만, 예의나 법도 같은 걸 무시하는 사람이라면 사람들을 이끄는 지휘관이 될 수 없었다.
오로지 전투 능력만 보는 계급도 따로 정해져 있었는데, 그게 ‘정예 기사’였다. 그렇다고 해서 정예 기사가 힘만 세고 막돼먹은 사람만 모이는 건 아니었다.
보통 마스터는 신입으로 들어오면 수습 기간을 거쳐 바로 정예 기사로 승급했다.
굳이 마스터가 아니더라도 전투 능력이 뛰어나다고 판단되는 자는 정예 기사로 진급했다.
그리고 부단장 자리가 공석이 되면, 상급 기사나 정예 기사에서 기본적 소양을 두루 갖춘 사람을 채우게 되었다.
신입으로 들어와서 정예 기사까지 고속으로 승급해도 다른 말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일 년 중 절반 이상을 마굴이나 국경 지역에서 보내기 때문이었다.
보통의 상급 기사보다 위험하고 전투에 참여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
항상 제국을 위해 목숨을 내던지고 일하는 자들에게 계급이니 뭐니 말만 번지르르한 소릴 했다간, 그 역시 당장 마수 토벌대로 쫓겨날 것이 뻔했기에 목숨이 아까운 자는 하나 같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이틀 전에 안 사실 한 가지.
사르트와 암살자인 줄 착각했던 남자는 무려 ‘정예 기사’였다.
국경 수비 임무를 마치고 짧은 휴가 끝에 본부로 복귀했고, 때마침 신입 기사 입단 시험이 열려 참관했던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며칠 후면, 얼마 전 생긴 백작령의 마굴로 떠난다.
“플로라 경. 앉아도 되겠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 플로라의 앞으로 한 기사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예.”
아주 짧은 머리칼의 남자였다. 구태여 인상을 찡그리거나 겁을 주려 하지 않아도, 화가 나 있는 듯한 험악한 인상이라 플로라는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아마도 상급 기사일 것이다. 단복에 달린 휘장과 견장의 화려함 또한 그의 계급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름이…….’
켈렌이었던가. 컬린이었나. 플로라는 가물가물한 상급자의 이름을 더듬어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수십 명의 상급자 이름을 외우는 것은 아직 그녀에겐 무리였다.
“플로라 경. 직속상관은 결정했나?”
그의 물음에 플로라는 잠시 잊고 있었던 걸 깨달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아니요. 아직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신입 기사는 훈련을 도와주거나 일을 가르쳐줄 직속상관을 선택해야 했다.
일이나 검술, 예의 같은 걸 배우기는커녕 상관의 뒤치다꺼리나 하고 다닐 것이 분명했지만 지옥 같은 앞날이 훤히 보인다고 해서 공동체의 관례를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직 이름도 다 외우지 못했는데.’
플로라는 눈을 흐릿하게 뜨며 기억을 더듬었다.
처음 훈련을 나가고 이틀 동안은 모든 상급 기사가 함께 나와 신입 기사를 도왔다.
그때 눈여겨보았던 기사는 분명 있었다. 문제는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거였다.
별별 이유로 그녀를 괴롭히는 상급 기사도 많았지만, 반대로 그녀를 대단하다고 여겨주고 좋아해 주는 상관도 있었다.
눈앞에 이 남자처럼.
“흠흠. 그럼 내 밑으로 들어오는 게 어떻…….”
“플로라 경. 카신 단장님이 찾아.”
상급 기사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다른 기사가 불쑥 말을 잘라내고 그녀를 불렀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거지……?’
플로라는 눈을 깜빡이다가, 양해를 구하고 눈앞에 상급 기사에게 묵례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단장이 부른다고 하니 성을 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켈렌도, 컬린도 아닌 상급 기사 ‘키렐’은 그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먹고 있던 식기를 정리한 플로라는 식당을 빠져나갔다. 단장이 무슨 이유로 자신을 찾는 건지 알지 못했다.
입단 이후 일주일이 넘는 사이, 상관이 시비를 걸어도 꾹 참고 넘어갔고, 같은 신입 계급을 단 주제에 더 빨리 입단했다고 으스대는 놈들과도 친하게 지내려 노력했다.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도 사고를 쳐서 부른 건 아닌 것 같았다. 근데 왜 이렇게 가슴이 서늘해지는 건지 모르겠다.
입단하기 전에는 카신을 백기사단의 악명 높은 기사단장이라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괜한 일로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존재가 되었다.
‘이것이 조직에 물들어가는 과정인가…….’
센칸에서도 그랬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플로라는 단장실 앞에 멈춰 섰다. 곧 문을 지키는 기사가 플로라가 왔음을 알렸다.
문이 열리고, 플로라는 짧게 심호흡한 뒤 안으로 들어섰다.
단장실은 처음 들어섰을 때와 똑같은 풍경이었다.
카신은 앉아서 쌓인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고, 문을 지키는 기사는 꼿꼿하게 선 채로 미동도 없었다. 부관 역시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지 손이 바빠 보였다.
플로라가 정중하게 인사했지만, 카신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 잠시 머쓱해졌다.
“플로라 경. 잠깐만 앉아서 기다려주겠나? 이것만 처리하고 가겠네.”
“예. 천천히 하십시오.”
“고맙군.”
뒤늦은 카신의 말에 그제야 플로라는 소파에 앉았다.
곧 부관과 카신이 하네칸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실종사건과 마굴에 대해 짤막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둘 다 흥미로운 사건이었지만, 그 사이에 플로라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현재로부터 딱 이틀 전.
플로라가 입단한 이후 처음으로 마굴에 대한 소식이 들려왔다.
험한 산지로 약초를 캐러 떠났던 백작령 주민 세 명이 실종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와 백작 휘하 기사단이 수사에 나섰다. 그리고 훼손된 사체를 깊은 산골짜기에서 발견했다.
그들은 정찰 중 만난 5급 마수 다섯 마리를 처치했지만 열 명의 기사 중 두 명이 사망하고, 세 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황실 기사단에 지원요청이 왔다.
이미 마수가 마굴에서 빠져나와 산을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언제 마을까지 침입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마수 토벌대는 앞으로 삼 일 후 백작령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그중 백기사단 소속은 부단장 한 명과 정예 기사 다섯 명, 상급 기사 세 명, 중급 기사 한 명으로 총 열 명의 임시 인원이 선발되었다.
또 하네칸 전역에서 벌어진 실종사건에 대해서는 들은 게 없어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부관과 카신이 심각하게 이야기하는 걸로 봐서는 여간한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잠시 사색하던 플로라는 잠시 눈을 치떴다. 고요한 호수 같던 그녀의 눈동자에 어떤 파문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