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그 정도 능력이면 아마 원인도 짐작했을 텐데.”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네이라가 어깨를 으쓱이며 생긋 웃었다.
“뭐, 마법사들이 전지전능한 건 아니니까요. 저도 책에서 읽지 않았다면 몰랐을 거예요.”
“…….”
“자, 그럼 더 궁금한 게 있으실까요?”
“하나 더 있긴 한데요…….”
“네.”
혹시 자신을 귀찮아하는 건 아닐까 싶어 머뭇거리던 플로라가 한 번 더 용기를 냈다.
“그 마력을 봉인하는 거요. 만약 제가 그런 경우라면. 풀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책에 분명 남아 있을 테니 한 번 조사해 볼게요.”
플로라는 넋을 놓고 네이라를 바라보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정도로 궁금증은 풀렸을까요?”
“네. 감사합니다. 네이라 님.”
네이라가 고개를 기울이며 묻자, 플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몬도 덩달아 고개를 까딱했다.
“수고했어. 네이라.”
“그럼 저는 소피 님께 혼나기 전에 얼른 가야겠어요. 폐하, 다음에 식사 꼭 같이 해주셔야 해요. 폐하께 무한한 영광과 축복이 깃드시길.”
그녀는 플로라와도 인사를 나누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플로라는 네이라가 사라질 때까지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시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시몬의 눈에도 제가 마력이 있는 게 보이는 건가요?”
시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마력이 없는 사람은 모른다는 건데. 라비우와 아이든은 왜 내게 마력이 있다고 했지?’
확실히 미심쩍은 부분이었다. 플로라는 설핏 미간을 좁혔다.
“내가 괜한 짓을 한 건 아닌가 싶군. 기사단에 정식으로 출근하기 전에 마력까지 쓸 수 있게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아닙니다. 저도 제 마력에 대해서는 호기심이 많았어요. 유익한 시간이었어요.”
“너도 네 마력의 존재를 알고 있을 줄은 몰랐어. 다른 사람의 마력은 전혀 보지 못하는 것 같기에 모를 줄 알았지. 네가 가진 힘을 궁금해하지 않았나?”
“처음엔 저도 마력이 있다는 말을 듣고, 어떻게 하면 사용할 수 있을지 다방면으로 노력해봤어요. 하지만 매번 실패만 하다 보니 관심이 자연스레 끊겼고요.”
“…….”
“그런데요, 시몬. 지난번에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게 네이라 님인가요?”
“아니. 그건 다른 사람.”
“……누군데요?”
“있어. 제 할 일은 내팽개치고, 떠돌이처럼 사는 사람.”
대답을 마친 시몬의 얼굴에는 살짝 그늘이 드리웠다.
그에게 꽤 소중한 사람인 것 같긴 한데, 어쩐지 더 캐물어 볼 수가 없었다.
“곧 제국에 방문한다고 연통이 왔으니, 그때 소개해 줄게.”
플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슬슬 일어날까? 좀 더 같이 있고 싶지만, 곧 지긋지긋한 회의가 있어서 말이야.”
“방금 좀 황제 폐하 같았어요.”
“황제 맞는데.”
시몬이 플로라의 이마를 가볍게 툭 쳤다.
“일하는 모습은 처음 봐서요.”
시몬이 쿡쿡 웃었다.
“맞아. 보통 이 시간엔 신나게 놀거나 오수를 즐기는 편이지. 지금 이 회의도 한참 미루다 가는 거야.”
“…….”
“칼만 없을 뿐이지 날 어떻게 구워 먹을지, 삶아 먹을지 고민하는 놈들 틈에 섞여 있는 건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그의 목소리는 어쩐지 해탈한 듯했다. 플로라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날 안일하다고 질책해도 어쩔 수 없어. 어차피 난 지금도 매일 죽음의 위협 속에서 살고 있어. 이 성에 있는 모두가 내게 충성을 맹세하진 않으니까.’
왜 갑자기 그가 했던 말이 떠오르는 걸까.
시몬의 모습이 조금 쓸쓸해 보였다.
* * *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백기사단 본부로 들어가는 날이 되었다.
플로라는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다. 간밤에는 설레서 잠도 못 잤다.
저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본부의 위치를 듣긴 했는데, 말만 들어서는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복도에 서 있던 성기사에게 다시 한번 길을 물어보려던 참에 이든이 나타났다.
다행히 그가 본부까지 데려다준 덕분에 길을 헤매는 일은 없었다.
“이든에게 매번 신세만 져요.”
“신세라니요. 그런 말 마세요. 레이디의 앞날을 응원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이든은 어쩜 이렇게 말도 예쁘게 하고, 마음이 따뜻한 걸까.
기사단 본부에 들어간다고 영영 이든을 못 보는 건 아니겠지만, 아마 지금처럼 자주 보진 못할 것이었다.
그래서 플로라도 그에게 무언가 따뜻한 말을 해주고 싶었다.
고마움은 느끼고 있었는데, 정작 제대로 그 마음을 표현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고민하던 플로라가 입을 열었다.
“저 그동안 이든을 보면서 많이 배웠어요. 마음을 표현하는 법이나, 남에게 베푸는 법 같은 거요.”
“…….”
“항상 따뜻하게 대해주셔서 감사해요. 응원도요. 앞으로 지금처럼 자주 만날 수는 없겠지만, 시간 날 때 종종 신전에 들를게요.”
이든이 느릿하게 마음을 전하는 플로라를 바라보며 옅게 웃었다. 천천히 말을 헤아려 진심을 전하려는 게 눈에 보였다.
하여간, 정말 귀엽다니까.
이든은 저도 모르게 그녀를 향해 손을 뻗으려다 멈칫하고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게 허락된 것은 딱 여기까지였다.
“우린 이제 친구인 거죠?”
“이든만 괜찮다면요.”
“저는 영광입니다. 레이디.”
친구가 된 거구나.
플로라가 해사하게 웃었다. 이든도 그녀를 보며 조금은 쓴 미소를 지었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가까이 지내고 싶었던 사람에게 친구란 말을 들으니 기분이 벅차올랐다.
* * *
“플로라.”
적진으로 돌진하듯 결의에 찬 얼굴로 백기사단 본부로 발을 디뎠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익숙한 녹안과 시선이 마주쳤다.
“아……! 안녕하십니까.”
시험 당일 자신을 연무장까지 데려다주었던 기사였다. 한눈에 그를 알아본 플로라가 반색했다.
“시험 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플로라가 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기도 전에 사라져 버린 게 떠올라, 고마움을 전하자 사르트는 그저 짧게 고개만 끄덕였다.
“우리 기사단으로 소속을 결정했단 얘긴 들었어. 앞으로 잘 부탁한다. 내 이름은 사르트 알펜네다. 편하게 이름으로 부르면 돼. 앞으로 마주칠 일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네. 사르트 님.”
“그럼 들어가지. 단장실로 안내해주겠다.”
플로라는 사르트를 만나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단장실은 1층의 오른쪽 복도 끝에 위치하고 있었다.
단장실 앞을 지키고 있던 신입 기사가 문을 두드리며 플로라의 방문을 알렸다.
곧 문이 열렸다.
플로라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사르트는 오로지 그녀를 데려다주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처럼 따라 들어오지 않고 어디론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단장실은 넓었다. 한쪽 벽은 책으로 가득했고, 다른 한쪽 벽엔 서류가 가득했다. 또한 카신이 앉은 등 뒤로는 넓은 창이 있어 빛이 환히 들어왔다.
그 창문에 달린 커튼은 한쪽만 내려져 있었는데, 백기사단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사자 문양이 달린 화려한 표식을 보고 있자니 어떤 벅차오르는 감정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불필요한 것은 하나도 없는 깔끔한 공간이었다. 플로라는 단장실의 분위기를 살피며 딱 카신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백기사단 신입 기사 플로라, 카신 단장님께 인사드립니다.”
플로라는 카신을 보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어깨너비로 보폭을 넓히고 등 뒤로 손을 모은 채 서자, 카신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게. 플로라. 오는 길을 헤매진 않았나?”
“네. 데려다주신 분이 있어 편히 왔습니다.”
“그렇군.”
단장실 안에는 카신 외에도 다른 기사가 두 명 더 있었다.
문을 지키는 기사와 단장의 부관인 것 같았다. 플로라는 그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으려 애쓰며 오로지 카신만을 바라보았다.
“아침은 먹었나?”
“……예. 먹었습니다.”
“그래. 앞으로 식사는 거르지 말고 챙기도록. 훈련이 힘들 테니.”
“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방을 안내하겠네. 방에 단복이 있을 테니 갈아입고 기별을 하면 다시 내려오도록 해.”
“알겠습니다.”
플로라의 안내를 맡은 건, 문밖에 서 있던 기사였다.
그는 별다른 말 없이 명령대로 플로라를 숙소로 안내했다.
기사단 본부 건물 뒤쪽에 숙소가 있었는데 플로라의 방은 3층에 있었다.
성기사단의 숙소와 구조는 비슷했다. 필요한 가구는 안에 이미 다 구비되어 있어 걱정할 것이 없었다.
플로라는 자신을 안내해 준 기사가 떠나자마자, 가장 먼저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단복을 갈아입었다.
몸에 꼭 맞는 하얀색 단복은 보기와는 달리, 움직임이 편했다.
장갑과 신발까지 모두 신고, 허리에 시몬이 선물해주었던 롱소드까지 차자 비로소 백기사단에 발을 들인 게 실감 났다.
옷만 입었을 뿐인데 어쩐지 무거운 책임감이 마음에 얹어지는 것 같다.
지금까지는 이 하네칸에서 이도 저도 아닌 존재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항상 시몬에게 도움을 받아야만 무언가 할 수 있었고, 또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흘려보내는 날이 태반이었기 때문이다.
이제야 자신도 이 제국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겠구나 싶은 기대가 생겼다.
감회가 새로웠다.
약자를 수호하고, 정의를 지키고, 황실에 충성하는 기사가 될 것이다.
그녀는 다시 한번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결심을 굳건히 했다.